최영숙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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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땅에서 풀고 가요, 엄마

2013.09.25 04:39

최영숙 조회 수:528 추천:123

<  땅에서 풀고 가요, 엄마>

                                   
엄마! 또 그 이야기야?”
“응? 내가 언제 그 얘기 했니?”
한국에 있는 엄마는 화상전화 속에서 아버지를 혼내주었다는 스토리를 연속해서 말하고 있다. 아무리 지적을 해도 엄마의 말은 그치질 않고 반복된다.

아버지가 옆에 있는 자신을 무시하고 다른 여자들하고 농담하면서 신나게 노는 모습을 보고 크게 소리 질러 나무라고, 미국에 사는 딸들한테 간다고 협박했다는 이야기이다. 그랬더니 아버지가 싹싹 빌며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약속했다면서 한 번 두고 보겠다고, 여든 세 살 울 엄마는 의기양양하게 말한다.

“이래서 여자도 할 말은 해야 돼! 내가 맨날 참았더니 날 바보로 안다니까.”
“아주 잘했어! 엄마.”
나도 같은 말로 엄마에게 답한다.

새벽 네 시면 일어나서 연탄불에 밥 안치고, 빨래를 시작하고, 새벽 통근열차로 서울로 출근하는 아버지를 보낸 다음, 우리들 도시락을 서너 개씩 싸던 엄마는 우리들하고 디스코 춤을 같이 추면서 놀던 쾌활하고 씩씩한 아줌마였다.
지칠 줄 모르는 엄마의 에너지를 먹고 자란 우리 형제들은 지금도 우리가 세상에서 제법 잘난 줄 알고 살고 있다.

매사에 튼튼하던 엄마가 꼼짝 못하는 일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아버지가 가진 학력이었다. 머리가 총명했지만 여자는 공부 많이 하면 팔자가 세어진다는 할아버지의 사상 때문에 중간에 공부를 그만 둔 엄마는 아버지의 학력을 아주 자랑스럽게 여겼다.

아버지는 엄마를 위해 여원, 주부생활을 정기 구독해 주고, 암굴 왕이니 하는 소설들을 사다 읽히고는 했다. 엄마도 책을 읽으며 나름대로 노력을 많이 했지만, 아버지 직장의 능력 있는 여자분들 하고 비교하면서 자신은 무식하다며 고민을 많이 했던 듯싶다.
어쩌다 다툴 일이 생기면 아버지의 논리 정연한 말을 이겨내질 못하고 꾹꾹 참다가 그래, 나는 무식해! 하면서 분심의 눈물을 훔쳐내는 엄마를 자주 보았던 것이다.

엄마가 치매 초기라는 말을 남동생에게 듣고는 설마 했지만 증상은 예외 없이 착착 진행되어갔다. 그래도 엄마가 자식을 알아보고 반가워하다가 들려주는 스토리는 주로 아버지를 혼내줬다는 것이다.

엄마의 상처는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스스로가 갖고 있던 열등의식이었다. 자식들 앞에서도 엄마는 뜬금없이 날 무시한다고 울먹거리는 일이 있었다. 우리도 엄마의 상처를 헤아리지 못했지만 그런 면에서는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이제 서서히 무너져 가는 엄마의 기억 속에서 아버지가 자신을 무시했다는 생각만 오롯이 남게 되는 일이 나는 슬프다. 그래서 엄마가 매일같이 그 기억과 싸우는 일이 무섭다. 아버지와 지낸 좋은 날이 더 많았는데 왜 하필 그 생각만 남았을까....

양노원에서 일을 하는 분이 말하기를 치매 걸린 분들의 공통점이 있다고 한다. 하나같이 욕을 잘하고, 부정적인 말을 입에 달고 산다는 말이었다.
자식들은 자기들끼리만 맛있는 거 사먹고, 며느리는 밥도 안 해 줄뿐만 아니라 당신의 물건을 훔쳐간다 하고, 남편들은 하나같이 바람둥이라 하고, 혹시 누군가가 말로라도 남편 편을 들면 소리 지르며 달려든다고 한다.

나는 멕시코 선교지에 있을 때, 양로원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곳 건물 앞에서 분홍색 정장을 입은 백인 부인을 만났는데, 한 쪽 팔에는 꽃무늬 핸드백을 들고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그녀가 고운 얼굴에 화사한 미소를 띠고 나를 향해 “올라!”하고 손을 흔들었다.

나도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부인은 날씬한 뒷모습을 보이며 토닥토닥 구두소리와 함께 건물 모퉁이로 사라져 갔다. 오 분이나 지났을까, 갔던 길을 되돌아 나오던 나는 그 부인과 다시 마주쳤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올라!”하고 인사를 했다.

나는 그녀의 인사에 답하며 같이 웃었다. 잠시 후에 나는 내 뒤를 따라오는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다시 나를 향해 처음 보는 듯이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알고 보니 그녀의 기억은 “오 분짜리”였다. 그래서 같은 일을 반복한다는 것이었다. 늘 정장을 하고 같은 길을 오고 간다는 직원의 말이었다.

그녀는 어디로 누구를 만나러 가는 것이었을까... 차린 모습으로 보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을 지도 모른다. 즐겁고 환한 얼굴로 만나러 가고, 다시 돌아와 여전히 기대를 갖고 나간다. 그녀에게 길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이 반갑고, 세상은 분홍 색 옷만큼이나 아름다운 모양이다. 가볍게 몸을 흔들며 사분사분, 토닥토닥 걸어간다. 그녀의 오 분짜리 기억 속에는 아름다운 사람이 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담, 우리네 자식은 왜 자기들끼리만 맛있는 것을 먹을까. 며느리는 내 귀한 것을 훔쳐가는 여시이고, 나는 늘 빼앗기는 피해자이며, 왜 그렇게 남편은 나 몰래 딴 짓을 한단 말인가. 정말 그렇게 밖에 살 수 없던 것일까...

울 엄마는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여겼지만, 자신도 모르는 마음 깊은 곳에 무시당했다는 괴로움이 둥지를 틀고 있었던 것이다. 솔직히 아버지 앞에 때마다 털어놓고 풀었어야 될 일이었는데, 아버지는 그 배려를 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지금 엄마를 위해 밥 짓고 빨래하고 청소를 한다.  평생 대접 받은 만큼, 아니 그보다 더 심하게 갚고 계시다. 엄마 같이 얌전한 부인을 무시하고 다른 여자들과 놀아났다는 억울한 누명을 매일 뒤집어쓰면서 설거지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