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숙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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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찹쌀고추장

2010.09.05 02:00

최영숙 조회 수:1424 추천:260

찹쌀 고추장

  혼자 집에 남아 있는 적적한 오후, 나는 뭔가 속이 허전해서 주방을 기웃거렸다.
마땅한 것이 없다. 느끼한 것도 싫고 텁텁한 것도 싫다. 뭐 산뜻한 거 없을까...한숨을 쉬면서 냉장고를 뒤지고 있는데 빨간 찹쌀고추장 통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지! 바로 이것이야. 나는 서둘러 접시를 꺼내 밥 두어 숟갈을 퍼 담고, 그 위에 찹쌀고추장을 얹었다. 어느 시월의 멋진 날에...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서랍에서 젓가락을 꺼내어 밥을 비비기 시작했다.

  고추장 비빔밥을 만들기 위해서는 갓 지어 낸 쌀밥이 필요하다. 참기름이나 깨소금은 사용하지 않고 찹쌀고추장만 듬뿍 얹어서 젓가락으로 정성스럽게 비비고, 먹을 때도 젓가락으로 먹는다. 원칙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야만 밥알이 서로 붙지 않고, 내가 원하는 맛을 낼 수 있기 때문에 나름대로 고수하고 있는 방법일 뿐이다.

   나는 접시를 들고 싱크대에 기대어 섰다.
한입 먹을 때마다 밥알의 구수함과 함께 달콤하고 매콤한 고추장의 조화가 나를 행복하게 한다.
새로 지은 밥이 아닌 것이 좀 섭섭하긴 하지만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창문으로 내다보이는 길에는 우편배달차가 메일 박스에 편지를 넣고 나서 부웅 소리를 내며 떠나가고, 그 옆의 인도에는 웃옷을 벗은 채 하루에 세 번씩 동네를 걷는 남자가 변함없는 각도로 몸을 기우뚱 기울인 채 지나간다.
 뒷집에서는 마당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명랑하게 울려온다. 아이들의 엄마는 낮고 부드러운 톤으로 아이들에게 말한다. 이제 들어와라아, 나는 쿡쿡 웃는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들의 엄마는 곧 목 굵은 소리를 낸다. 빨리 이리로 오지 못해! 위협적인 그녀의 목소리가 퉁! 소리를 내며 우리 집 뒤뜰의 나무둥치에 부딪쳐 온다. 나는 순간 밥 먹기를 멈췄다. 갑자기 들고 있는 접시 위에서 시간이 거꾸로 지나가고, 생각 속의 나는 어느 새 중학교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한창 자라갈 나이에 나는 편식이 심해서 자주 혓바늘이 돋아있었다. 심할 때는 살점이 떨어져 나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빼놓지 않던 반찬이 고추장이었다. 그것도 외할머니 댁 찹쌀고추장을 무척 좋아했다. 어머니는 보리쌀을 띄워서 고추장을 만들었는데 그것은 맵고 짜기만 했지 전혀 단맛이 없었다. 외할머니는 어머니와는 달리 달고 매콤한 찹쌀고추장을 작은 단지에 따로 담그고는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마 독자였던 외삼촌을 위해서 따로 담근 맛 고추장이었을 것이다. 방학이 되어 평택에 있던 외갓집을 놀러 가면 나는 고추장 벌레라는 별명을 등에 업고 고추장단지를 푹 비워놓고 오곤 했다. 할머니는 고추장을 종지에 담아서 밥상위에 놓아 주었고 눈치 없던 나는 언제나 두 번 세 번을 더 요구하면서 듬뿍 퍼주지 않던 할머니를 야속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찹쌀고추장에서 시작된 연상은 계속 되었다. 골마지도 끼지 않던 할머니의 찹쌀고추장 단지를 밀어젖히고 그 뒤에 나타난 것은 이상하게도 중학교 동창이었던 Y의 모습이었다.

그 친구와는 한 번도 같은 교실에서 공부한 적이 없었다. 단지 군 체육대회가 있을 때에 친구는 핸드볼 팀에서 나는 배구팀에서 연습을 하느라고 운동장에서 만났을 뿐이었다. Y는 이름이 남자 같았고 말투와 행동도 그랬다. 더군다나 한 번 공을 잡으면 어떻게든지 골과 연결시켜내는 악착같은 면이 있는데다가 따라 붙는 상대방 선수에게 욕을 해대며 몸싸움도 마다하지 않는 아이였다.

탄탄한 종아리며 잘 발달 된 어깨, 말할 때는 어깨를 비틀며 슬쩍 턱을 치켜들고, 기분이 안 좋을 때는 한 쪽 다리를 탈탈 흔들어 대던 Y는 짓궂기도 했다. 나는 그런 Y를 될 수 있는 한 피해 다녔다. 어쩌다 마주치게 되면 Y가 반색을 했지만 나는 애꿎은 욕을 먹거나 머리통이라도 쥐어 박힐 까봐 서둘러 자리를 떠나곤 했다.

  공부를 마치고 결혼을 한 다음, 내 아이들이 커서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까지도 나는 Y를 만나지 못했다. 그저 친구들을 통해 간간이 소식을 전해 들었을 뿐이었다. 그 왈패가 살림을 그렇게 잘한다는 소문이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내가 살던 아파트의 상가 안에서 Y를 마주쳤다. Y는 여전히 걸쭉한 욕으로 나를 반겼다. 알고 보니 바로 옆의 아파트 단지에서 살고 있었다. Y가 대뜸 자기 집으로 나를 끌고 갔다. 집안은 소문대로 환하고 말끔했으며, 커다란 수조 속에서는 열대어들이 기운차게 움직이고 있었다. 수조 속에서 방울방울 올라오는 물소리가 기분 좋게 들려왔다.

집에 있던 Y의 막내딸이 턱을 치켜들면서 문방구에 가야된다고 칭얼거렸다. “너 닮았다!”하고 내가 말하자 Y는 “이게 물건이다. 누구한테 지고는 못살거든.”하면서 아이의 등짝을 탁탁 두드렸다. 아직 점심 전이었던 나는 Y가 금방 버무려 준 부추 오이무침이 있는 식탁으로 가서 앉았다.
“야! 지지배야, 너 이렇게 맛있게 할 줄 아냐?”
Y가 삐딱하게 서서 부추 무침이 담긴 접시를 가리키며 턱을 치켜들었다.
내가 대답대신 소리 내어 웃자 Y는 신이 나서 말했다.    
“나 못하는 반찬 없다. 얼큰한 탕은 더 잘해. 너, 내가 이런 거 못할 줄 알았지?”  
서서 한쪽 다리를 탈탈 흔들어대던 버릇만은 어떻게 고친 모양이었다.

점심을 끝낸 Y는 내 앞에서 두툼한 손으로 찬찬히 빨래를 개키고, 그것들을 식구들 별로 서랍장에 집어넣었다.
“정말 너 이러는 거, 내 눈으로 안 봤으면 믿지 못하겠다. 근데 너, 말투는 여전하다. 완전 깡패잖아....후훗! 난 옛날에 니가 무서웠어.”
내 말에 Y는 우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오빠들 속에서 자라서 그렇지, 내 속은 박속이다, 박속! 야 년아, 그러지 마. 나도 고치려고 애쓰고 있어, 애들이 배울까봐.”

우리는 이러구러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그러다가 이사를 하고 연락을 드문드문 하다가 미국으로 오면서 십오 년여를 소식이 끊어져버렸다. 어느 날, Y에게서 전화가 왔다.

“우라질 년! 미국 가니까 그렇게도 좋으냐? 말도 없이 가서 연락도 없고, 응? 간신히 니 전화번호 알아냈다, 이 나쁜 지지배야!”
대뜸 욕질이었다. 나는 무릎에서 힘이 빠질 정도로 Y의 욕설이 반가웠다. Y의 이야기는 한없이 이어졌다. 우리 아이들이 자란 만큼 Y의 아이들도 자라서 제가끔 자리를 잡은 이야기와 큰 딸이 결혼까지 한 그간의 풀 스토리를 단번에 들을 수 있었다. “너 참 장하다.... 잘 키워낼 줄 알았어.”나는 감격해서 같은 소리를 연신해댔다.

  그러다가 몇 년 뒤 한국에 나갔을 때 Y를 만나게 되었다. 약속 장소에 가보니 평범한 산 속에 겉보기에도 분위기 좋은 식당들이 여러 곳 있었다. 왜 이런 곳에 식당들이 있는 걸까... 주거 지역도 아니고 관광지도 아닌 곳이었다. 아무튼 내가 먼저 도착해 Y를 기다렸다. 들어간 한정식 식당은 천정이 높고 갈색의 목재로 장식이 되어 있었다.

친구는 제법 시간이 지나가도 나타나지 않았다. 젊은이들 두어 쌍이 들어오고 난 뒤에 중년의 커플이 들어오고, 그 뒤를 따라 하얀 린넨 수트를 입은 여인이 하느적 거리며 걸어오는 모습이 창문 밖에 보였다. 그녀가 내 눈에 띈 것은 내가 좋아하는 청색의 블라우스를 안에 받쳐 입었기 때문이었다. 흰색과 청색의 조화가 보기 좋았다. 고개를 길게 빼고 Y의 모습을 찾느라고 여전히 밖을 살피고 있는데, 누군가가 내 앞에서 멈춰 섰다.

“야아! 이 지지배야!”
하얀 린넨 수트를 입은 그 여인이었다. 믿을 수 없지만 Y였다. 나는 엉거주춤하게 일어섰다. Y는 화장을 곱게 하고 머리도 단발로 기르고 있었다.
“뭐야? 너 이거? 순 반칙이다, 응?....몰라 봤잖아!”
나는 Y의 어깨를 팡팡 때렸다. Y는 눈이 감기도록 웃었다.
“지지배야, 근데 넌 머리가 그게 뭐냐? 염색 좀 하지.... 미국에서는 다들 그러고 사냐?  하긴 뭐, 거긴 은발 머리가 많지? 야, 금발이 나이 들면 그것도 은발 되냐?”  
원초적인 대화를 해도 전혀 마음에 걸리지 않는 Y 앞에서 나는 그 날, 마음껏 웃고 떠들었다.

어느 새 해가 기울어 갔다. 섭섭하지만 이제는 마무리를 하고 일어서려고 할 즈음이었다.
“야, 말이야....”
Y가 접시에 남은 녹차 빈대떡을 집었다 놓았다하면서 말꼬리를 흐렸다.
“나.... 요새 바람났다.”
나는 웬일, 하면서 숨을 멈추고 Y를 쳐다보았다.

어린 시절부터 한동네에 살던 오빠였는데 Y는 예전에 몰래 짝사랑을 했다는 말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그 때는 말 한마디도 못 건네 보고 헤어졌다가 얼마 전에 우연히 만났다고 했다.

“그 오빠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그 때 내가 조금만 더 예뻤어도 결혼 신청했을 거라는 거야....덜 거칠고 덜 남자 같았더라면 그랬을 거라는 거지....나한테 혼날까봐 못했대네.... 정말 환장할 일 아니냐....이제 와서 뭘 어쩌겠냐만....지금은 안보면 못 살 것 같다...야, 나 어떡하면 좋겠냐?”
되돌릴 수 없는 시간 앞에서 Y가 울었다.


  나는 접시를 싱크대 속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물을 틀었다. 고추장을 너무 먹어서 고추장 벌레라는 별명이 붙어 있던 내 시간들 속에 참으로 여러 사람들이 등장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람들도 있고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나름대로 나의 인생에 이런저런 무늬를 만들어 주고 지나간 사람들이다.

맛나당 빵집 아저씨, 우리 학교로 출근하다시피 하던 사진사 아저씨. 기미 슨 얼굴을 보고 아줌마가 속썩이나보다고 수군댔지... 눈이 주욱 찢어져서 성질 나쁠 거라고 흉보았던 소사 아저씨, 착하기만 했는데.....수사반장 시리즈의 조경환, 토요일 저녁 쇼쇼쇼의 후라이보이, 얼굴이 귀공자처럼 하얗던 극장 집 아들, 뇌염 걸려서 멍청이가 되어버린 만화집의 잘생겼던 남자아이, 국밥집 큰아들을 맘에 두고 애태우던 쌀집의 통통한 언니, 그 오빠는 누구였든가 다른  언니를 좋아했다지...눕히면 눈을 감는 커다란 인형을 갖고 있던 서울에서 이사 온 아이. 히스크리프, 히스크리프... 폭풍의 언덕 중의 대사를 읊으며 냇가 둑을 걷던 영어 선생님. 그때 나랑 그 대사를 들으며 같이 둑길을 걸어갔던 친구. 그 아이는 왜 자살 했을까...국어시간에 책을 읽으라면 부들부들 떨면서 읽던 친구, 그렇게 소심했던 아이가 조폭을 만나 인생은 무척 극적으로 살아갔지....

끝도 없이 이어지는 연상이었다. 연상을 따라, 나 없이도 이십년을 아무렇지 않게 살아온 중학교 친구들 얼굴이 떠올랐다. 나쁜 지지배들....그러다가 같은 이십 년을 친구들과 연락을 끊고 살고 있는 나도 잘한 것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나도 쎄임쎄임이다. 되돌릴 수 없는 시간들이 한숨을 가득 담고 수도꼭지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소리와 함께 싱크대 속으로 사라져갔다.

  Y는 그 시절이 그리웠던 것은 아니었을까....모든 것이 가능하고 모든 것이 희망이었던 시절, 머리 아프다고 뇌신을 찾는 어른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젊고도 젊은 날들이 필시 그리웠던 것일 게다. 그 그리움을 모두 쏟아 부을 수 있던 대상이 어린 시절 짝사랑이었다는 것이 Y에게는 행복이면서 고통이었겠지....

사람들에게 첫사랑이나 짝사랑, 그래서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이란 그리움의 총화인 모양이다. 살아갈 날들보다 살아 온 날들이 길어질수록 우리는 추억을 먹고 산다.

생각해보면 지나간 일들 모두가 그리움이다. 부끄럽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하고 후회스럽기도 한 내 인생의 저 쪽들이 아픔으로 다가온다. 할머니 집 마루 밑에서 조용히 죽어간 누렁개에게까지도 그리움을 느끼는 하루가 애꿎은 찹쌀고추장 단지에서 피어올랐다.
나는 먹고 난 접시와 젓가락을 부득부득 씻었다. 말갛게 씻어 물기를 닦아내고 그것들을 제자리에 집어넣은 다음 천천히 주방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