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효종. 영릉과 신륵사

2009.02.09 23:25

여주안내서에서 조회 수:813 추천:62

  

서울.경기/서울근교와 도심속의 왕릉들/세종 효종의 영녕릉



세종 효종의 영녕릉



세 종 대 왕  영 릉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에 위치한 영릉(英陵)은 세종대왕과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유택(幽宅)이다. 서울에서 이천을 지나 여주를 향하다가 이포로 가는 지방도로를 따라 좀 가면 ‘세종대왕 영릉’ 이라는 안내표지가 나온다.

영릉의 정문으로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세종대왕 동상과 재실이 있고, 왼쪽에는 세종대왕의 기념관인 세종전(世宗殿)이 있으며,  그 세종전 안에는 세종의 어진(御眞)과 업적을 나타내는 그림들, 당시에 제작하고 정비했던 여러 천문기기, 악기 등이 전시되었다.

세종전 밖의 잔디밭에는 실물을 본 따 만든 해시게인 앙부일구(仰釜日咎), 그 받침대로서 조각이 아름다운 일구대(日咎臺), 올라가 하늘을 관찰하는 관천대(觀天臺), 현대의 자명종과 같이 소리를 내어 시간을 알리도록 고안된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 등이 있어 눈길을 끈다.

훈민문(訓民門)을 지나 들어가면 왼편에 묘내수(墓內水)를 흘러 들도록 한 연못이 있고, 홍살문과 그 너머에 정자각, 그리고 저 높이 능과 석물들이 보인다. 정자각 왼편에는 제물을 준비하던 수라간(水라間)이 있고, 오른편으로 능을 지키고 제기 등을 보관하던 수복방(守僕房)이 있다.

능은 병풍석을 두르지 않고 난간석만 두른 합장릉이다. 상석이 두 개 놓여 있어서 합장릉 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일반묘에는 합장묘에도 상석이 하나지만 능에는 다르다. 엄밀히 말해서 능 앞의 상석은 상석이 아니고 혼유석(魂遊石)이다.

일반묘의 상석은 제물을 진설하는 곳이지만 능에서는 그 밑의 정자각에 제물을 진설하고 제사를 올리면 능침에 묻혀 있던 영혼이 혼유석에 나와 앉아서 제사를 받는다.

병풍석을 생략한 봉분은 그 속도 석실이 아니고 회격(灰隔: 관 사이를 회로 메우는 것)을 했다고 한다. 그것은 예종이 자기 조부인 세종의 능을 천장(遷葬)하면서 부왕인 세조가 능에 석실과 병풍석을 쓰지 말도록 하라는 유언을 따랐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이후 능역이 많이 간소화 했고 능을 조성하는데 동원되는 인원이 6,000명에서 3,000명으로 줄었다고 한다.

효심이 지극했던 세종은 부왕인 태종의 헌릉(獻陵: 내곡동) 곁에 자신의 능 자리를 잡아 놓았고, 부인 소헌왕후가 죽자 지관들은 그 자리가 길지(吉地)가 못 된다고 반대하였으나 세종은 “다른 곳이 좋은들 선영 곁에 묻히는 것만 하겠는가.”하고 그 곳에 소헌왕후의 능을 썼을 뿐 아니라 곁에 빈 석실을 하나 만들어 두었다가 후일 자신이 묻힘으로써 왕조 최초의 합장릉이 되었다.

그러나 그 자리가 과연 길지가 못되었던지 자주 천장문제가 거론되었으나 세조 때 강직하였던 문신 서거정(徐居正)이 “천장 코자 함은 복을 구함인데 왕자(王者)가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라며 반대하여 세조도 이에 따랐다.

세조가 죽은 후 다시 천장문제가 거론되어 예종1년(1469)에 이곳으로 옮기었으며, 전에 있던 능의 석물들은 그 자리에 파 묻었었는데 1973년 세종기념사업을 전개하면서 발굴하여 청량리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이 자리는 모란반개형(牡丹半開形)의 천하명당 이어서 지관들 사이에서는 이 영릉 덕분으로 조선왕조의 국운이 100년은 더 연장 됐다고 한단다. 이러한 명당을 얻게 된 것은 지관과 재상들이 능 자리를 구하려고 영릉의 주산인 북성산에 이르렀을 때 소나기가 퍼 부어 비 피할 곳을 찾는데 연기가 피어 오르는 곳이 있어서 가보니 그곳이 바로 명당이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효 종 대 왕  녕 릉

세종대왕의 덕망이 워낙 크다 보니 세종대왕의 영릉만 알고, 바로 500m 즘 떨어진 곳에 있는 효종대왕의 녕릉(寧陵)은 잘 모르거나 알아도 잘 가지 않는다. 그러나 이곳은 같은 능역 안에 세종릉과 효종릉이 함께 있어서 그냥 영릉이 아니고 영년릉(英寧陵)이다.

인조의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이었던 효종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가 8년 동안이나 온갖 고초를 겪었고, 같이 인질로 가 있던 형 소현세자가 먼저 귀국하였으나 귀국 후 두 달 만에 급서함으로써 다음달에 귀국하여 세자가 되었으며, 그 후 왕위에 올라 청나라에서 받은 수모를 절치부심(切齒腐心) 설욕하려고 비밀리에 북벌계획을 추진하였으나 아깝게도 재위 10년, 보령 41세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 효종의 능도 처음에는 구리시에 있는 동구릉의 건원릉 서쪽 산줄기에 안장되었었으나 14년이 지난 현종 14년에 물이 스며든다는 이유로 영릉 곁인 이곳으로 천장 되었으며, 천장한 다음해에 인선왕후가 승하하자 이곳에 안장하면서 쌍릉으로 조영하였다.

그러나 쌍릉이되 좌우로 나란히 쌍릉이 아니고 앞뒤로 쌍릉이다. 그것은 풍수지리 적인 이유에서라는데 좌우로 나란히 쓸 경우 정혈(正穴)을 비키게 됨으로 두 능을 모두 정혈에 쓰기 위해서 앞뒤로 쓰게 됐다고 한다.

그래서 위에 쓴 왕릉은 곡장(曲墻)을 두르고 밑에 있는 왕비릉은 곡장을 두르지 않음으로써 쌍릉임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형태는 석관동 전 중앙정보부 자리에 있는 경종과 그의 계비 선의왕후의 의릉(懿陵)에서도 볼 수 있다.

좌우간 21세기를 코 앞에 맞으면서도 풍수지리설의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오늘의 현실을 보면서 그 시절 왕실에서까지 묘 자리에 이토록 집착했으니 사가에서야 오죽했겠느냐는 생각이 든다.  이 영녕릉은 사적 제195호이다.



신     륵     사

여주로 다시 나와서 문막쪽으로 4km 즘 가면 남한강 상류인 여강(驪江)이 흐르는 강가의 봉미산(鳳尾山) 남쪽 기슭에 영릉의 원찰(願刹)이었던 신륵사(神勒寺)가 있다.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오는 사찰이다.

영릉을 여주로 옮긴 후 불심이 두터웠던 세종을 위하여 원찰을 세우기로 하고  한명회 등이 터를 물색하였으나 적당한 장소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가까운 곳에 있는 고찰 신륵사를 중수하여 대가람의 면모를 갖추게 하고 보은사(報恩寺)라고 명명하여 원찰로 삼았다.

그 뒤 이 나라에 성리학이 뿌리 내리면서 왕릉의 원찰 제도가 없어지는 풍토가 조성되었고, 신륵사는 유서 깊은 옛이름을 다시 찾았다는데 신륵사라는 절 이름에는 하나의 설화가 얽혀 있다.

고려 고종 때 건너편 마을에 자주 용마가 나타났는데 매우 사나워서 누구도 다룰 수 없었다. 그때 이 절의 인당대사(印塘大師, 일설에는 나옹선사라고도 함)가 신력(神力)으로 고삐를 잡으니 말이 순해 졌다고 한다. 륵(勒)자가 말을 다스린다는 뜻도 가지고 있으며, 이곳 지명이 지금도 여주(驪州)이고 예전 이름도 황려현(黃驪縣)이었다고 하니 말과 관련이 있었던 것은 사실인가 보다.

탑 전체를 벽돌로 쌓아올린 다층전탑(多層塼塔)을 비롯하여 보물 7점과 유형문화재 1점을 보유하고 있는 고색창연한 이 절은 앞으로 흐르는 여강과 그 건너편으로 펼쳐진 넓은 들판으로 조망 되는 경관이 시원하다.

특히 여강의 한 허리를 밀고 나간 너럭바위 위에 위태롭게 세운 정자 강월헌(江月軒)이 나그네의 발길을 움켜 잡는다. 강월헌은 이곳에서 열반한 고려 말의 고승 나옹선사(懶翁禪師)의 호에서 따온 이름이다.

나옹선사는 양주의 회암사를 중수하고 회향법회를 열다가 갑자기 왕명을 받고 밀양의 형원사(瑩源寺)로 가던 중에 병을 얻어 더 가지 못하고 이곳에 와서 열반 했는데 그때 하늘에선 오색 구름이 산 마루를 뒤덮고 용이 호상하는 등 신이(神異)한 일이 벌어졌다고 한다.

그로 해서 쓰러져 가던 신륵사가 대대적인 중창불사를 일으킬 수 있었고, 그 후 조선왕조의 억불정책으로 위축되어 가다가 영릉의 원찰이 되면서 다시 중수 되었으며, 임진왜란 때는 승군 500명을 조직해 싸웠고, 이때 불탄 것을 현종 12년(1671)무렵부터 다시 일으켜온 것이 오늘의 신륵사이다.

강월헌에 올라 여강을 굽어보며 나옹선사의 선시 한 수를 조용히 마음속으로 음미해 본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 없이 살라 하고     靑山見我 無言以生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蒼空見我 無塵以生
    
       성 냄도 벗어 놓고 탐욕도 벗어 놓고     解脫嗔怒 解脫貪慾
       물 같이 바람 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如山如水 生涯以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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