實事求是

2009.05.06 10:02

wjddirdyd 조회 수:291 추천:55

re: 다산 정약용선생이 말한 실사구시와 애민정신은 무엇입니까? tnwls4943@em.. 프로필 보기
쪽지 보내기
질문 리스트 보기
답변 리스트 보기
| 08.09.22 20:29 3답변 내용
다산 정약용의 애민정신 愛民情神
시나 산문의 주제로 관리들의 횡포를 고발하는 내용을 여러 작품 접한 적이 있다 일제에 대한 대항의 정신이 담겨있는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이 주제는 계급과 권력이란 것이 존재하는 한 끝없이 논의되어질 문제라고 생각했다 조선후기에 나타난 사설시조나 봉산탈춤 양주 별산대 놀이 등의 작품을 통해서 억압에 눌린 하층 신분에 있는 사람들의 감정표출을 접했다 풍자 라는 미의식은 내가 알고 느낀 다른 주제들보다도 강렬한 메시지와 신념을 담고 있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작품으로 그 영역을 제한한 것은 수업 교재로 사용된 프린터 물에서 「饑民詩 굶주리는 백성들 」를 접하고 나서다
狗 棄不顧 개 돼지도 버리고 돌아보지 않을 음식
乃人甘如飴 굶주린 사람 입엔 엿처럼 달구나
非鳥莫啄蟲 새가 아니어서 벌레 쪼아먹지 못하고
非魚莫泳池 물고기 아니어서 헤엄 칠 수도 없네
生靈在塗炭 살아 있는 영혼들이 도탄에 빠졌으니
拯拔非公誰 이들을 구할 자 관리가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다산은 이 시에서 농민들의 삶과 지배층의 삶을 대비하며 농민들의 희생을 극대화시키고 있다 당시 백성들이 겪는 참상을 매우 사실적이며 절박하게 묘사하면서 그리하여 농민들의 굶주림에 대해 당시의 지배층이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음을 지적하고 있다 다산은 위 구절에 이들을 구할 자 관리가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라고 명시함으로써 백성들을 돌아볼 줄 모르고 출세길이나 허세에 빠져 살며 가렴주구를 일삼는 관리들에게 따끔하게 질타하였다
정약용은 자를 미용 美庸 호를 다산 茶山 또는 여유당 與猶堂 이라 하였다 그는 실학파 시문학의 대표적인 사실주의 시인이고 실학을 집대성한 실학자였으며 사상가였다 다산의 창작과정을 세 개의 단계로 구분해 보면 첫 번째가 관직에 있다가 1801년에 천주교사건으로 유배를 떠나기 이전의 젊은 시절 요직에 있던 시기이고 두 번째는 유배생활을 한 18년간의 시기이며 세 번째는 1818년에 유배가 풀리고 고향 마현리로 돌아가고 나서부터의 시기를 말한다
정조의 총애를 받아 동부승지 병조참의 형조참의 등의 요직에 올랐던 다산은 1801년 신유사옥의 검거 선풍에 걸려 유배를 가게 되었으나 유배생활은 그의 창작에서 일대 변화를 가져왔다



우리나라에서 실사구시란 말의 의미가 어떻게 쓰이는가 보면은, 대체로 실사구시라 하면 실학, 즉 실학과 동의어로써 쓰이는 것이 하나 있고, 또 하나는 실학의 한 유파로서 실사구시 학파, 주로 추사를 중심으로 하는 학풍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 두 가지 뜻과 함께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의미를 말하자면 학문이나 실천의 자세로서 실사구시, 그런 뜻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실학과 실사구시가 거의 동의어로 쓰인다 했는데,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실학은 역사적으로 한정된 개념, 지금 그대로 실학이라는 의미가 역사적 의미로 쓰이지 현재적 의미를 갖지 않습니다. 반면에 실사구시는 역사를 넘어서 현재적 의미를 아주 중요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이런 주제를 잡게 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실사구시의 원 유래는 지금으로부터 거의 2000년이 넘는 긴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이 말이 중요하게 쓰이게 된 것은 대체로 중국에서는 청대에 고증학적인 실증주의적인 학문자세를 갖게 되면서, 실사구시라는 말이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됐습니다. 그런 것과 관련해서 우리나라에서도 실사구시 이 말을 가지고 문제제기를 하고 그것이 학술사 또 경제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됐습니다. 그래서 저는 실사구시로 문제제기를 한, 그래서 그것이 실천적인 학문으로서 나타난 이것이 바로 실학의 역사와 같다, 동궤도를 걸어왔다 이렇게 보는데, 그래서 실사구시의 개념의 역사, 개념의 발전의 역사를 대체로 4단계로 나눠서 볼 수 있다고 봤습니다.

  제1단계는 ‘구시폐(救時弊)의 실사구시’ 이렇게 의미를 붙였고, 제2단계가 ‘고고(考古)의 실사구시’, 3단계 ‘격치(格致)의 실사구시’, 4단계는 ‘개화(開化)의 실사구시’ 이렇게 그 역사적 의미가 단계적으로 변형 내지 발전해 왔다 이렇게 보았습니다. 각각에 대해서 긴 말씀을 드리기는 어렵고 요점만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상에서 실사구시라는 개념으로 문제제기를 했던 최초의 인물은 양득중이라는 분입니다. 그 시기는 18세기인데, 그럼 왜 실사구시로 문제제기를 하게 됐느냐 하면은, 우리가 다 알고 있다시피 17세기 이래 북벌론, 당시 노론 집권층은 북벌이라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제시해 가지고서, 그것을 하나의 체제유지 내지 통치의 하나의 방안으로써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대의리고 대의리에 대해서는 누구도 의의를 제기할 수 없는, 그 결과 여러 가지 사회의 난맥상 그리고 국가발전에 큰 차질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우리가 20세기 후반기에 살았던 반공 이데올로기와 북벌 이데올로기는 매우 상통하는 바가 있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거기에 대해서 양득중은 ‘실사구시를 해야 한다. 허황하고 현실성 없는 이념을 가지고 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주목해야 될 것은 그럼 실사구시를 하는데 실천방법이 뭐냐, 그것은 무엇보다 반계 유형원의 『반계수록』을 현실에 적용해야 한다, 그것이 지금의 문제를 해결하는 중요한 단서다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회원:
2
새 글:
0
등록일:
2015.02.14

오늘:
0
어제:
33
전체:
291,5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