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이 시로쓴 자화상/정용진 시인

2016.01.18 16:14

정용진 조회 수:411

시인들의 시로 쓴 자화상

 

우리 현대시사에서 시인들이 스스로의 모습을 그린 자화상은 어떤 것이 있을까. 문학사적으로 시인들이 그린 자화상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이번 특집은 <시인들의 자화상, 시로 쓴 자화상>이다. 자상自像         여기는어느나라의데드마스크다.

데드마스크는도적盜賊맞았다는소문도있다.

풀이극북極北에서파과破瓜하지않던이수염은절망絶望을알아차리고생식生殖하지않는다.

천고千古로창천蒼天이허방빠져있는함정陷穽에유언遺言이석비石碑처럼은근히침몰沈沒되어있다.

그러면이곁을생소生疎한손짓발짓의신호信號가지나가면서무사無事히스스로와한다. 점잖던내용內容이이래저래구기기시작이다.

<조선일보(1936)  자화상自畵像 37         장미薔薇를 얻었다가 장미를 잃은 해   저기서 포성砲聲이 나고 여기서 방울이 돈다.   힘도 아니요 절망도 아닌 것이 나의 하늘을 흐리우던 날   나는 화폄을 치는 추근한 산호珊瑚였다. *아침에 나간 청춘이 저녁에 청춘을 잃고 돌아올 줄은 믿지 못한 일이었다.   의사는 칼슘을 권했고 동무는 술잔을 따랐다. 드디어 우수憂愁를 노래하여 익사溺死 이전의 감정을 얻었다.   초라한 붓을 들어 흰 조희에 니힐의 꽃을 담뿍 그렸다.     ―― 《동경(1938) 자화상         515푼 키에 2촌이 부족한 불만이 있다.

부얼부얼한 맛은 전혀 잊어버린 얼굴이다.

몹시 차 보여서 좀체로 가까이하기 어려워한다.그린 듯 숱한 눈썹도 큼직한 눈에는 어울리는 듯도 싶다마는……전시대前時代 같으면 환영을 받았을 삼단 같은 머리는 클럼지한 손에 예술품답지 않게 얹혀져 가냘픈 몸에 무게를 준다.

조고마한 거리낌에도 밤잠을 못 자고 괴로워하는 성격은 살이 머물지 못하게 학대를 했을 게다.꼭 다문 입은 괴로움을 내뿜기보다 흔히는 혼자 삼켜버리는 서글픈 버릇이 있다. 삼 온스

살만 더 있어도 무척 생색나게 내 얼굴에 쓸 데가 있는 것을 잘 알건만 무디지 못한 성격과는 타협하기가 어렵다.처신을 하는 데는 산도야지처럼 대담하지 못하고 조고만 유언비어에도 비겁하게 삼간다 대[]처럼 꺾어는 질지언정구리[]처럼 휘어지며 꾸부러지기가 어려운 성격은 가끔 자신을 괴롭힌다.   산호림(1938) 자화상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기퍼도 오지않었다.파뿌리같이 늙은할머니와 대추꽃이 한주 서 있을뿐이었다.어매는 달을두고 풋살구가 꼭하나만 먹고 싶다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밑에손톱이 깜한 에미의아들.갑오년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하는 외할아버지의 숯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눈이 나는 닮었다한다.스물세햇동안 나를 키운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하드라.어떤이는 내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가고어떤이는 내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가나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찬란히 티워오는 어느아침에도이마우에 언친 시의 이슬에는몇방울의 피가 언제나 서꺼있어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느러트린병든 숫개만양 헐덕어리며 나는 왔다.     ―― 『화사집(1941) 자화상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 『하늘과 별과 바람과 시(1946) 자화상         한번도 웃어본 일이 없다한번도 울어본 일이 없다.웃음도 울음도 아닌 슬픔그러한 슬픔에 굳어버린 나의 얼굴.도대체 웃음이란 얼마나가볍게 스쳐가는 시장끼냐.도대체 울음이란 얼마나짓궂게 왔다가는 포만증飽滿症이냐.한때 나의 푸른 이마 밑검은 눈썹 언저리에 매워본 덧없음을 이어오늘 꼭 가야 할 아무데도 없는 낯선 이 길머리에쩔룸 쩔룸 다섯 자보다 좀더 큰 키로 나는 섰다.어쩌면 나의 키가 끄으는 나의 그림자는이렇게도 우득히 웬 땅을 덮는 것이냐.지나는 거리마다 쇼윈도 유리창마다얼른 얼른 내가 나를 알아볼 수 없는 나의 얼굴.     ―― 『한하운시초(1949) 자화상          내 목이 가늘어 회의懷疑에 기울기 좋고,혈액은 철분鐵分이 셋에 눈물이 일곱이기포효咆哮보담 술을 마시는 나이팅게일……마흔이 넘은 그보다도뺨이 쪼들어연애엔 아조 실망이고,눈이 커서 눈이 서러워모질고 사특하진 않으나,신앙과 이웃들에 자못 길들기 어려운 나――사랑이고 원수고 모라쳐 허허 웃어버리는비만肥滿한 모가지일 수 없는 나――내가 죽는 날단테의 연옥煉獄에선 어느 비문扉門이 열리려나?     ―― 『김현승시초(1957) 자화상         한 오라기 지풀일레아이들이 놀다 간모래성무덤을쓰을고 쓰는강둑의 버들꽃버들꽃 사이누비는햇제비입에 문한 오라기 지풀일레새알,흙으로빚은 경단에묻은 지풀일레창을 내린하행열차곳간에 실린한 마리 눈[] 속 양일레.     ―― 『강아지풀(1975) 자화상         돌과 돌들이 굴러가다가 나를 두들기고,모래와 모래가 쓸려가다가 나를 두들기고,물결과 물결이 굽이쳐가다가 나를 두들기고,너무도 기나긴 억겁의 세월,햇살과 햇살이 나를 두들기고,달빛이 나를 두들기고,깜깜한 밤들이 나를 두들기고,별빛과 별빛이 나를 두들기고,, 훌훌한 낙화가꽃잎이 나를 두들기고,바람이 나를 두들기고,가랑비 소낙비 진눈깨비가 나를 두들기고,싸락눈 함박눈 눈보라가 나를 두들기고,우박이 나를 두들기고,그 분노가 나를 두들기고,회의와 불안,고독이 나를 두들기고,절망이 나를 두들기고,아니, 사랑이 나를 두들기고,끝없는 뉘우침끝없는 기다림갈망이 나를 두들기고   양심과 정의, 지성이 나를 두들기고,진리와 평화자유가 나를 두들기고,겨레가 나를 두들기고,끝없는 아름다움예술이 나를 두들기고,나사렛 예수주 그리스도와 하느님,말씀이 나를 두들기고    ―― 『()수석열전(水石列傳)(1976) 자화상         내가 부른 노래내가 부르지 못한 노래들이우르르불 켜들고 내달려오는 나일 줄이야이 찬란한 후회가 나일 줄이야     ―― 『어느 기념비(1997)

 

고은(高銀, 본명: 고은태(高銀泰), 1933 81 ~ )전북 옥구에서 태어난 대한민국의 대표적 참여시인이자 소설가이다.

군산중학교 4학년에 다닐 무렵 한국 전쟁이 발발하여 학교를 그만두었다. 이후 그 어떤 교육기관에도 적을 두지 않았다. 1952 입산하여 일초(一超)라는 법명을 받고 불교 승려가 되었다. 이후 10년간 참선과 방랑을 거듭하며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나의 자화상        

(여든을 넘긴 아이)나는 어머니의 얼굴을 모른다.정확히 생후 26개월 만에 어머니가스물셋 젊은 나이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그 뒤 어머니 대신 나를 보살핀 것은증조부, 증조모, 그리고 청상과부였던 조모.그분들의 지극정성으로 나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그분들이 돌아가신 지 어언 6,70,나는 그분들보다도 더 오래 살아여든을 넘긴 지도 몇 해가 된다.그러나 아직도 그분들은 마음 졸이며 지켜보신다.아직도 나는 막 걸음마를 뗀 어린아이.아니면 옛집 사랑방 큰할아버지 옆에서벼루에 먹을 갈아 글씨도 써보고 그림도 그려보는 아이.그리고 내 등 뒤에서는 아직도 대견스러운 눈빛으로나를 지켜보고 계시는 세 분 어른들!김종길   1926년 경북 안동 출생. 1947경향신문신춘문예로 등단. 한국시인협회장 역임. 현재 고려대학교 영문과 명예교수,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인촌문학상, 대한민국예술원상 등 수상. 주요 시집으로 성탄제』 『하회에서』 『해가 많이 짧아졌다』 『해거름 이삭줍기등이 있음. 자화상         고향에 돌아 못가는 슬픔이화석으로 남아몸과 마음 함께 차다작은 키가 불편하나나폴레옹이 등소평이 키가 작았다는 말은근히 위안이 되었다재봐야 34킬로밖에 안 나가는몸무게는바람부는 날이 겁난다코가 조금 큰 편이고 거기다 인중이 길어목숨이 질기겠다고70년 전 함경도 칠보산 관상쟁이가 말했다죽은 듯이 붙어 있는 자그마한 귀는전쟁 때 한강 모래밭에 쏟아지던전투기의 기총소사와 폭탄소리 간직하고 있고밭이랑 같은 이마의 주름살은어려운 항해 아로새겨진 지도회한과 추억의 소낙비 퍼붓는다점점 작아지는 침침한 눈은눈물이 약간 고여양떼 몰고 가는 사막의 검은 옷 입은 여인을 그리워한다꽉 닫혀 있어다오 입아많이 지껄인 날은 부끄러워 못 참고지껄이지 않은 날은 편안히 단잠 잔다흰 눈 날리는 머리아내가 염색을 해주고 싶어 못 견뎌하지만백발이면 어떠냐 그냥 내버려둔다꿈을 많이 꾼다쉬르리얼리스트의 꿈이 대부분이지만때로 꿈속의 울음이 깨어서도 이어진다어린 시절 공부 못하는 장난꾸러기였던 나는85살 되어서도온갖 장난이 하고 싶어 사방 두리번거리는 도깨비다.김규동   1925년 함경북도 경성 출생. 1948예술조선신춘문예로 등단. 1955한국일보, 조선일보신춘문예 당선. 주요 시집으로 나비와 광장』 『깨끗한 희망』 『느릅나무에게등이 있음.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민족문학작가회의 고문 등 역임. 자유문인협회상, 만해문학상 등 수상. 처음 써 보는 자화상         거울 속엔 언제나 이 한 사람눈을 감았다 떠도 거듭 이 사람이다숙명적 권태와 이 낯설음을라고 이름하는가나는 식민지의 아이였고조국광복 그 천지개벽의 날에오래 정들인 절망취미와 결별했다항상 누군가를 연모하는 지병과별달리 명성을 선망하는 허영심그 한심한 열정의 터널을 지나왔다남보다 늦은 사십대에야감성이 일시에 만발하여내가 달다 내가 지금 몹시 달다고소리 없이 절규했고삶의 고통과 삶의 황홀을한 잔에 혼합해 마시면서양분을 섭취했다내면의 확충이 한껏 부풀어다급한 민감성과 하나로 엮일 땐도저히 감당이 어려웠고그저 좀 심각하게세상이 아름다울 때조차감동의 위세에 시달렸다막달라 마리아의 주님을나의 주님으로 본받아 섬기면서그녀의 심연이 웅대하고 너무나도 거인적이어서내가 많이 초라했다동시에 그것이 내 정신의 항구한 수원지이기를 희구했다나의 미약한 신앙은 그나마도내 안의 최고 가치인가 싶다바라보면서 몰입하는 눈의 행복이내 감관 으뜸의 환희였다나의 감수성 이 하나가쇠퇴 없이 오늘에 이르렀고내일에 이어간다면얼마동안은 더 영광스럽게도내가 시인의 반열에 머물리라김남조   1927년 대구 출생. 1950연합신문에 작품을 발표하며 등단. 한국시인협회 회장, 한국여성문학인협회 회장 등 역임.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주요 시집으로 목숨』 『나아드의 향유』 『사랑초서』 『바람세례』 『귀중한 오늘등이 있음. 자유문인협회상, 한국시협상, 대한민국예술원상 등 수상. 모든 사진에는 내가 보이지 않는다         나는 나를 實寫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나를 內色할 수도 없으며

나를 열지도 닫을 수도 없습니다

빗장을 스스로 도둑맞은 지가 벌써 수십 년,

당신이 찍은 모든 사진에 내가 보이지 않는 까닭을 아시겠는지요

빛과 어둠을 분간 못하는 제가 이해되시는지요

그 사이에서 태어나는 實體를 도둑맞은 지가 벌써 수십 년,

내가 써온 시에서 느티나무가 나요

내가 느티나무로 운영되어 왔으니

어느 쪽에도 나는 없습니다 다시 태어나고

다시 태어나다 보니 모든 나는 없는 나가 아닌지요

모든 여자들이 나를 내소박하는 까닭이 이해가 되시는지요

한평생 나를 實査한 내 아내도 實寫를 못했습니다

오늘도 변함없습니다

千手, 허공 이파리들이여,

다만 한 이파리 이파리마다 나누어 심는 햇빛 빨판이여,

나의 잠적이여 아침마다

해 뜨는 한복판에 한 그루 느티로 다시 서는――, 변함없습니다

날마다 나는 새로 入籍하고 있습니다 入寂하고 있습니다정진규   1939년 경기도 안성 출생. 1960동아일보신춘문예로 등단. 한국시인협회 회장 역임. 한국시인협회상, 월탄문학상, 공초문학상 등 수상. 시집 마른 수수깡의 平和』 『』 『』 『本色』 『껍질등이 있음. 자화상         너는 장학사張學士의 외손자요이학자李學者의 손자라머리맡에 얘기책을 쌓아놓고 읽으시던할머니 안동김씨는애비, 에미 품에서 떼어다 키우는똥오줌 못 가리는 손자의 귀에알아듣지 못하는 말씀을 못박아주셨다내가 태어나기 전부터나라 찾는 일 하겠다고감옥을 드나들더니 광복이 되어서도집에는 못 들어오는 아버지와스승 면암勉庵의 뒤를 이어조선 유림을 이끌던 장후재張厚載 학사의셋째 딸로 시집와서지아비 옥바라지에 한숨 마를 날 없는 어머니는내가 열 살이 되었을 때겨우 할아버지 댁으로 들어왔다그제서야 처음 얼굴을 보게 된 아버지는한 해 남짓 뒤에 삼팔선이 터져바삐 떠난 후 오늘토록 소식이 끊겨 있다애비 닮지 말고 사람 좀 되라고비례물시非禮勿視하며  비례물청非禮勿聽하며  비례물언非禮勿言하며  비례물동非禮勿動하며……율곡栗谷격몽요결擊蒙要訣할아버지는 읽히셨으나나는 예 아닌 것만 보고예 아닌 것만 듣고예 아닌 것만 말하고예 아닌 짓거리만 하며 살아왔다글자를 읽을 줄도 모르고붓을 잡을 줄 모르면서지가 무슨 연벽묵치硯癖墨癡라고벼루돌의 먹때를 씻는 일 따위에나시간을 헛되이 흘려버리기도 하면서.그러나 자다가도 문득 깨우고길을 가다가도 울컥 치솟는 것은저놈은 즈이 애비를 꼭 닮았어!할아버지가 자주 하시던 그 꾸지람당신은 속 썩이는 큰아들이 미우셨겠지만아니지요 저는 애비가 까마득히 올려다보이거든요칭찬보다 오히려 고마운 꾸중을끝내 따르지 못하고 나는 오늘도종아리를 걷고 회초리를 맞는다.* 勉庵 : 崔益鉉의 호    栗谷 : 李珥의 호    硯癖墨癡 : 문방사우에 빠지는 어리석음이근배   1940년 충남 당진 출생. 1961년부터 1964년 사이에 경향, 조선, 서울, 동아, 한국 각 일간지 신춘문예에 시, 시조, 동시 등이 당선. 한국시인협회 회장 등을 역임. 가람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중앙시조대상, 편운문학상 등 수상. 시집 노래여 노래여』 『사람들이 새가 되고 싶은 까닭을 안다등이 있음. 옷에 대하여 자화상을 보며         아침에 어머니가 지어주신 옷해 지기 전까지입고 있었는데으스름 저녁에 돌아와일생의 옷을 벗으매,내 안에 마지막 남은 것이비로소 보인다구름 한 벌, 바람 한 벌,하느님 말씀 한 벌!김종해   1941년 부산 출생. 1963자유문학, 경향신문신춘문예로 등단. 한국시인협회 회장 역임. 현대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한국시협상, 공초문학상 수상. 시집으로 인간의 악기』 『항해일지』 『바람부는 날은 지하철을 타고』 『별똥별』 『등이 있음. 서럽고 서러운         서럽고 서러운유년의 한때아빠는 도망다니고엄마는 아빠를 찾아전국을 헤매고나는고향을 좋아하고마당의작은 꽃을 좋아하던나는끌려다니며끝없는 멀미에 시달리고그래돌아갔으면 좋겠다고고향으로돌아가거기그냥그렇게 살았으면 좋겠다고그랬지그러나 나의 여로는끝이 없었지할머니가 한때나랑 함께 살자해도그럴 수는 없었고끝없이 끝없이터지는 데모에끊임없이 끊임없이누르는 테러에한도 끝도 없이들어가는 경찰서에서아빠는 맞아들려 나오고엄마는되레외가로 달아나버리고나 혼자빈 마당에서새를 그렸다그림바람과 눈물나는 그림 없이는살 수 없었다그 그림을 못 그리게그림 그리면 배고프다고못 그리게내 손을이어서 숯을 끼고 그리는내 발가락까지 노끈으로 묶어놔버렸다버리고 나서 사십 년이제껏 포기했었다지난해엄마 돌아가신 뒤어느날 밤잠은 오지 않고밤새도록 내 마음은울부짖었다그림을그리자그림을 그림을 그림을그리자꽃을 새를 바람을눈물을그리자그리자나는 살아나기 시작했으니그 사십 년을 나는죽어 있었으니이젠누가 와당신 체포합니다소리 해도조금도 겁나지 않는다그림만곁에 있다면나는불사다내 아이들 둘 다 그림 그리고내 아내도그림 그리고우리는 다아 그린다이제더 이상 바랄 게 없다아마도 내 마지막 꿈은늙어서꼬부라져 늙어서이 세상에서가장 가장 거룩한춘화도한 잎그리다 가는 것이 세상에서가장 가장 더러운 씹그림을이 세상에서가장 가장 숭고하고 심오하게그리다 그리다가숨져 가는 것가며빙긋미소짓는 것아홉 살 때새 그림 회벽에발가락 사이 숯을 끼고엄마 몰래 그리고 나서혼자 웃던 그 미소를손은느을노끈에 묶여 있었으니까바람은 내 머리 위 불고눈물은 내 뺨을흐르고하늘은저 머얼리서푸르고푸르고새푸르르고그리고.김지하   1941년 전남 목포 출생. 1969시인지에 황톳길등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 이산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만해문학상, 대산문학상 등 수상. 시집 황토』『타는 목마름으로』 『오적』 『이 가문 날의 비구름등이 있음.  창녀와 천사 - 최근의 자화상          나 요즘 창녀에 실패하고 있는 것 같다 천사이며 창녀인 눈부신 시인이 되고 싶었지만어느 때 치마를 벗을지를 몰라어느 벌판 혹은 어느 강줄기를 따라가야 술집과 벼락이 있는 줄을 몰라 여름 날 동안 누가 주인인지를 몰라 문 밖에서 매양 서성이고 말았다폭풍을 먹어치우고 구름 속에 자수정 눈물을 흘리는 천사도 아니었다별들이 내려와 어깨를 어루만지면     부드럽고 아름다운 굴절광 하나를 낳고 싶었지만    쥐라기 시대 파충류 같은 신비한 시구 하나를 허공에다 점점이 키우고 싶었지만 밤낮 짐승의 몸으로 쫓기며진눈깨비처럼 빈 들에서 울다가  제자리에 현기증처럼 스러질 뿐이었다   문정희   1969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 남자를 위하여』 『오라, 거짓 사랑아』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 『나는 문이다등이 있음. 현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등 수상.           거창 신씨 종가 맏며느리로 시집 온 어머니 젤 우선 할 일은 아들 낳는 것이었는데어쩌나 딸 여섯을 연이어 쭉 낳으며 어머니 생은 발바닥이 되었는데그 여섯째 딸인 날 두고 어머니 무서운 생각 작심하였는데 세상 나오자마자 그 비린 걸 발길로 걷어차고는 어머니는 생으로 굶기 시작했다는데질긴 목숨이라 두 모녀가 살기는 살아났다고는 하나…… 어머니 손끝에서 버릴까 말까뉘를 고르다 꼭 나를 손끝 벼랑에 놓고는 망설였는데이것이 똘똘한 쌀알들 사이에 끼어 살아내기는 살아낼 것인지세상 나오자마자 걷어차인 엉덩이 어머니 상처의 유적지를 더듬거리다손 쑥 집어넣고 부식한 한의 화석 하나 골라내는데  안쓰러워라조금은 금가고 귀 깨어져 모양 거칠지만 제대로 살아라서서히 어긋나는 머리통을 쓰다듬는데거긴 쓰라리다!어머니 온몸으로 막았던 소금밭을 맨발로 줄행랑쳐염전밭 통째로 등에 지고 살다겨우 이제 따뜻한 밥알이 되기도 하는.    신달자   1943년 경남 거창 출생. 1964여상, 1972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봉헌문자』 『아가』 『아버지의 빛』 『오래 말하는 사이』 『열애등이 있음. 대한민국문학상, 시와시학상, 한국시인협회상 등을 수상. 현재 명지전문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자화상(自畵像) 정용진

 

너는가장 고요한 시각에네 영혼의 소리에귀 기울이라그리고네 삶의 지침을 바로 세우라.세상은 병들고썩기 쉬운 곳

언제나아름다운 너 자신은고독한 시간에만생성되느니너는가장 엄숙한 순간에자화상을 그리라그리하면네 인생은늘 풍만해 지리라.

 

자화상(自畵像).2 정용진

 

피곤한 내 영혼

창을 향해 귀 기울이면

멀리서

사나운 북풍에

밀려오는

엽신(葉信)의 소리.

 

가난한 사원(思源)

마를까 두려워

새하얀 공간에

길 잃은 낱말들을

불러 모으며

 

영지(領地)를 개척하는

나는

외로운 메모광.

 

정용진

나라고하는 존재가

하잘것없는 것은

누구보다도

내가 더 잘 안다.

그래서

나는 늘

나 자신을 만날 때마다

괴로워하고 있다.

 

낮에는

세사(世事)에 쫓겨

잊고 살지만

밤이 되면

잃은 나를 찾아

꿈길을 나서는

슬픈 길손이 된다.

 

우리 모두는

이렇게 모여서

못난 자신들을

알아내기를 바라듯

내가 누구인지

그 진실을 찾기 위하여

밤마다 다시 태어난다.

 

그리고

창이 밝아오는

새벽을 두려워하며

나라고하는 존재가

하나의 고통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하여

 

저들같이

때 묻은 거리를 떠돌며

큰소리로 외쳐대기보다는

 

쪼들려 못난 나를

사랑하는 버릇에

곧 익숙해지고 만다.

 

오늘도 나는

삶의 현장에서

잃어버린 나를

찾아나서는

또 하나의 슬픈 길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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