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창문을 열고

2017.06.19 12:13

정용진 조회 수:16

마음의 창문을 열고

                                                       정용진 시인

 

눈은 세상을 바라다보는 창이요, 또 창은 세상을 바라다보는 눈이다. 우리 모두는 눈을 통하여 모든 사물을 바라보는데 눈을 통하여 보는 세계는 사물의 외부 세계요, 마음의 눈으로 보는 세계는 인식의 세계로 심안(心眼) 혹은 영안(靈眼)이라 부른다.

마음의 창이 넓을 사람은 세상 사물을 멀리 그리고 깊이보고, 반대로 짧은 사람은 단견으로 세상을 얕고 가볍게 보기 때문에 매사에 침착하지 못하여 실수를 자주 범하게 된다.

한문에 보면 몸값이 1 천양이라면 눈 값이 9백양 이라고 한다.(一身千金 日月 九百量), 모든 사물을 바라보고 진위를 판단하는 눈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가르쳐주는 귀한 명언이다.

인간의 눈은 예리하여서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면 첫눈에 반하여 눈길을 보내고, 미운 사람을 보면 눈총을 보내면서 멀리하게 된다.

폭넓은 인간관을 가지려면 단견으로 조급히 세상을 보고 판단하지 말고 천리안(千里眼)으로 원대하게 조망하여 풍성한 삶을 누려야 한다.

정치가들은 당리당략에 눈이 멀어 국민 복지를 외면하고, 경제인들은 탐심에 빠져 국익을 망각한 채 자신들의 기업 살찌우기에만 몰두하여 빈익빈 부익부의 불행한 상황으로 깊이 빠져가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더구나 유명 문인들이 자신의 명문을 빛내기 위하여 남이 심혈을 기우려 창작한 작품을 표절한 것은 너무나 한심한 처사다. 근래 2백여 명의 교수들이 자기 제자나 타인들이 이미 발표한 논문을 표지만 바꿔서 자신의 작품으로 도용하여 검찰의 기소를 받은 것은 얼마나 슬픈 현상인가, 적어도 대학교수라면 지성 중에 지성인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눈이 맑아야 사물을 바로 볼 수 있고, 마음이 맑아야 사물을 사실대로 인식할 수 있다.

눈이 맑은 것은 명안(明眼)이요, 마음이 맑은 것은 명철(明哲)이며, 머리가 뛰어난 것은 명석(明晳)이고, 사리 판단이 분명한 것은 명철(明哲)이다.

역사적으로 명인들은 조국이나 사랑을 노래하였을 때에는 맑은 마음으로 밝은 달을 바라보면서 노래하였다.

 

김종서(金宗瑞, 1383-1453)는 조선 전기의 문신이며 군인이요, 정치가이로서 단종의 충신 3 상신(相臣) 중 한명이다.

자는 국경(國卿), 호는 절재(節齋), 본관은 순천(順天)으로 도총제(都摠制)를 지낸 김추(金錘)의 아들이다.

시호는 충익(忠翼)이고 양광도 공주목 출생이며 양광도 청주목 전의면전라도 순천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냈다. 그는 여진족을 몰아내고 육진을 개척하면서 이런 애국시를 남겼다.

삭풍(朔風)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明月)은 눈 속에 찬데

만리변성(萬里邊城)에 일장검(一長劍) 짚고 서서

긴파람 큰 한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 고 애국 시조를 남겼다.

  

또 명기로 유명한 황진이(黃眞伊 1506? ~ 1567?)조선 중기의 시인, 기녀, 작가, 서예가, 음악가, 무희이다. 중종· 명종 때(16세기, 중순경) 활동했던 기생으로, 다른 이름은 진랑(眞娘)이고 기생 이름인 명월(明月)로도 알려져 있다. 중종 때 개성의 황씨 성을 가진 진사의 서녀(庶女)로 태어났으며, 생부에 대해서는 전해지지 않는다. 시와 그림, 춤 외에도 성리학적 지식과 사서육경에도 해박하여 사대부, 은일사 들과도 어울렸다.

성리학과 학문적 지식이 해박하였으며 시를 잘 지었고, 그림에도 능하였다. 많은 선비들과 이런 저런 인연과 관계를 맺으면서 전국을 유람하기도 하고 그 가운데 많은 시와 그림을 작품으로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으로 대부분 실전되었고 남은 작품들도 그가 음란함의 대명사로 몰리면서 저평가되고 제대로 보존되지도 않아 대부분 인멸되었다. 너무나 아쉬운 일이다. 당시 생불이라 불리던 지족선사10년 동안의 면벽 수도에서 파계시키는가 하면, 호기로 이름을 떨치던 벽계수라는 왕족의 콧대를 꺾어놓기도 하고, 당대 최고의 은둔학자 서경덕을 유혹하기도 했다.

뛰어난 재주와 함께 출중한 용모로 더욱 유명하였다. 신분 특성상 황진이라는 이름이 정사(正史)에 등장하지는 않으며, 여러 야사(野史)들을 통해 그에 대한 내용이 전해 내려온다. 학자 화담 서경덕을 유혹하려 하였다가 실패했다고도 한다. 서경덕,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 3절로도 불렸으며, 대표작으로 만월대 회고시, 박연폭포시등이 있다. 조선시대 내내 음란함의 상징으로 여겨져 언급이 금기시되었으나 구전과 민담의 소재가 되어왔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 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라는 명 시조를 남겼고

    

이순신(李舜臣,장군(1545-1598(인종 원년-선조 31)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본관은 덕수(徳水), 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이며, 한성 출신이다. 문반 가문 출신으로 1576(선조 9)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그 관직이 동구비보 권관, 훈련원 봉사, 발포진 수군만호, 조산보 만호,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를 거쳐 정헌대부 삼도수군통제사에 이르렀다.

본인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청렴한 생활을 하고 깊은 효심을 지닌 선비의 모범으로 평가된다. 장수로서는 임진왜란 때 조선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부하들을 통솔하는 지도력, 뛰어난 지략, 그리고 탁월한 전략과 능수능란한 전술로 일본 수군과의 해전에서 연전연승하여 나라를 구한 성웅(聖雄)으로 추앙받고 있다. 노량 해전에서 전사한 뒤 선무공신 1등관에 추록되고 의정부 우의정에 추증되고 덕풍군에 추봉되었다가, 광해군 때 다시 의정부 좌의정추증되고 덕풍부원군에 추봉되었고, 정조 때에는 의정부영의정으로 가증(加贈)되었다.

고려 때 정5품 중랑장(中郎将)을 지낸 덕수 이씨의 시조 이돈수(李敦守)12대손이며, 조선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지낸 이변(李辺)[4] 의 후손이다. 외가는 초계 변씨(卞氏), 처가는 온양 방씨(方氏, 당시에는 상주 방씨)이다. 그의 묘는 충청남도 아산시에 있다. 그는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적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나의 애를 끊나니 라는

애국 시조를 남겼다.

이와 같이 명인들은

 밝은 달과 맑은 마음으로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고

그들의 삶 자체가 맑고 투명하였다.

자신들의 생각이 무잡하고 투명 하였기에

후세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귀한 본보기가 된 것이다.

이 얼마나 고귀한 삶의 본 보기 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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