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은 파도처럼

2009.07.26 13:31

정해정 조회 수:1248 추천:166

                                      세월은 파도처럼

                                          정해정


   아침 설거지를 막 끝내고 커피 한잔을 타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다.
   “ 얘! 나야. 그 동안 별 일 없었니?”
   “으응. 그래그래. 오랜만이다. 왜 그렇게 소식이 없었어?”
   “나- 서울 갔다 며칠 전에 왔어. 우리 한번 만나자. 서울 소식도 전하고...”
   오랜만에 여고 동창생 셋이 날을 잡았다.

   정신의학자 ‘프로이드’는 사람이 중년이 되면 누구나 연령거부현상이 일어난다고 했다던가? 어느새 초로에 접어든 친구들을 만나면 쏜살같이 가는 세월에 나이만은 ‘마흔 아홉 살’로 영원히 못 박아 놓고 싶다고 하면서 웃는다.

   아침부터 모든 일을 재치고 코리아타운에 있는 데니스로 서둘러 나갔다. 타운 내에 사는 내가 제일 먼저 도착했다. 조금 있으니 글렌데일에 사는 친구가 미안미안 하면서 들어온다. 뒤이어 어떤 여자가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문을 밀고 들어선다. 우리 쪽으로 웃으면서 온다. 낯이 익은 얼굴인데 잘 모르겠다.
   “야! 잘 있었어?”
   선글라스를 벗는데 우리 둘은 동시에 와~~ 하고 말았다. 눈하고 눈썹 사이를 찝은 것이 시뻘겋게 부어있고, 볼은 통통하다.
   “서울에 간 김에 예전에 했던 쌍커풀 다시 손 좀 보고, 볼톡스 좀 맞고 왔지”
   “그거 볼톡스는 몇 개월만에 다시 맞아야 된다면서?”
   “하긴 그래. 여기도 시술하는 병원이 많이 있으니 걱정 없어.”
   낯설다. 목소리가 아니라면 영 모르는 사람이다. 그래도 우리는 곧바로 얘기로 봇물이 터졌다. 세월이 빨리 감을 한탄하며, 주로 늙음을 인정하지 않고 싶다는 얘기에, 볼톡스는 그렇게 예뻐하며 키웠던 손주가 자기를 몰라보더라고 낄낄낄. 글렌데일 친구는 요즘 라인댄스에 푸욱 빠져 생활이 활기차다고 했다.
   “근데 언제 이렇게 원하지도 않은 나이를 먹었을까? 후유 억울해”
   내가 말했다.
   “그래도 한국보다 더 났지. 한 살이 줄잖아? 나 같은 경우는 두 살을 덜 먹었어”.
   볼톡스가 말했다.
   “얘들아 .우리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 복잡한 데니스에서 죽치고 있는거 아깝지 않니? 어디 분위기 좋은 데로 옮기면 어때?”
   라인댄스가 받는다.
   “그래, 그게 좋겠다 내가 분위기 끝내주는 데 내가 알아”‘분위기 끝내주는데’란 산타모니카 바닷가에 있는 카페란다.
   우리는 계산을 마치고 자동차를 탔다. 평일이라 그런지 산타모니카 비치는 한산했다.

   이민 초기에 친지로부터 이곳 산타모니카 비치에 안내 된 적이 있었다. 친지는 수평선을 가리키며 말했다.
   “절루 똑바로 가면 한국이 나온대요. 켈리포니아는 바다를 끼고 있어 수많은 비치가 있어요. 그런데도 우리 동포들은 답답하고 괴로울 때 제일 많이 찾는 곳이 이 비치죠. 만만한가 봐요”
   나는 엘에이에 살면서 산타모니카 비치를 고맙게 생각하고 자주 드나들었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에 목적한 카페에 도착했다.

   파도가 철석이는 바닷가의 카페는 짙은 커피 색깔 나무로 된 건사한 곳이다. 어둑 컴컴한 실내는 커피 냄새와 ‘엘칸도팟사’(철새는 날아가고) 가 카페 안을 가득 메우고 있어 우리들의 가슴도 바다처럼 일렁인다. 시간이 어중떠서인지 손님은 없었다. 덕분에 우리는 파도가 보이는 창가로 자리를 잡았다. 라인댄스가 말한다.
   “우리 나이에 차 한 잔을 마시더라도 이정도 분위기에서 마셔야지...”
   다시 얘기는 나이 들고 싶지 않다는 주제로 계속 됐다.

   카페 안에는 손님이 우리 세 사람 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어쩌다 고개를 돌리니저 쪽 구석에 동양여자 셋이 앉아 있다. 한 사람은 짙은 선 글라스를 꼈다. 얼핏 보니 후줄근한 노인네들로, 뭐가 그렇게 좋은지 낄낄대는 꼴이라니...... 우리가 고개를 돌리면 그 쪽도 돌리고 우리가 웃으면 그 쪽도 웃는다.
   “저런 노인네들도 분위기 찾는다고 이런 델 왔나봐, 젠장 어울리지도 않구먼.” 볼톡스의 말에 다시 돌아봤다.

   아뿔싸!!! ‘어울리지 않은’ 그 여인들은 바로 우리 셋이 아닌가... 어둑컴컴한 카페 한 쪽 벽면이 거울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왔다.

   바닷바람은 우리들의 머리카락을 날리고 물결은 주름지며 다가와 부서진다. 우리는 말을 잃고 수평선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라인댄스가 느닷없이 노래를 시작한다.
   “가~는~세월~ 그~ 누우~구가~~ 막을 수~가~ 이 있나요~~“
   가수 ‘서유석’의 특유한 콧소리를 흉내 내어 우리는 똑 같이 웃었다.
   볼톡스의 짙은 선글라스 안에서 눈과 눈썹사이를 찝은 빨간 흉터가 실룩거렸다.

   세 초로의 여인들의 웃음 소리는 파도 소리에 섞이는가 했더니 다시 하얗게 젊음을 토해 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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