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2007.04.09 12:13

정해정 조회 수:547 추천:45

   보스톤에 사는 친구하고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사계절이 없는 밋밋한 LA에서 사는 재미가 어떠냐?”
   “나이가 들수록 춥지도 덥지도 않은 온화한 날씨에, 사철 꽃이 만발한 곳이 LA 말고 또 어딨냐?”
   “얘! 그런 말 마. 나이가 들수록 추운 겨울이 있어야 봄의 희망이 있고, 향기 없는 꽃은 만발해 봤자 별볼일 없어.”

    친구의 말대로 켈리포니아에서 사철 피고지는 꽃에는 향기가 없는 꽃이 많다. 꽃에 따르기 마련인 나비와 꿀벌도 보기 힘들다. 그것도 그럴 것이 어느 한 철만 꽃이 핀다면 꽃피는 계절에 희망을 걸고 향기를 저장하고 꿀을 모을 텐데 일년 내내 꽃이 피어 있어 힘들게 일을 할 필요가 없으니 나비와 꿀벌들은 어디서 뭘 하는 걸까.낮잠이라도 자는 걸까.

    며칠 전 일이다. 타운에서 문을 연 후배의 커피 전문점에 들른 적이 있다. 낮 시간이어서 그런지 손님은 없었고 내가 들어서니 후배는 반갑게 맞아준다. 종업원인듯 한국 아가씨 하나가 나를 멍하니 쳐다본다. 날씬한 몸매에 잘생긴 얼굴이다. 그런데 표정이 없다. 향기 없는 꽃처럼 보인다. 주인의 지시대로 부시시 일어나 우리 테이블과 카운터 사이를 마지못해 게으른 걸음으로 왔다갔다할 뿐이다.
    “젊은애가 왜 저렇게 맥이 없냐?”
    “한국서 온 유학생인데 요즘 저런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사는게 통 재미가 없대나, 옷 치장도, 맛있는 것도, 남자친구도, 나이트 클럽까지도 흥미조차 없대쟎아요. 그냥 시간만 때우면서 지내는 거래요.” 후배는 작은 소리로 다시 말한다.
    “심심해서 못살겠다는 저런 애들보다,사실은 무턱대고 외국유학을 보내놓고 맘이 안 놓이니까 좋은 차 사주고, 넘치도록 돈을 대주는 어른들이 문제지요.” 나는 그 아이를 다시 봤다.
    
    “공부에는 취미가 없지.노력하지 않아도 편히 살 수 있는 처지에 호기심 나는 것은 다 해봤지, 그래서 목표는 상실되고 생활이 권태로워지는 자연현상이야. 사회복지가 잘된 나라일수록 자살자가 많다지 않디?” 그 아이는 카운터에서 머리를 박고 졸고 있다.
    “유학생이라고 다 저럴까만 피나게 공부하는 많은 유학생들과, 여기서 자란 건전한 아이들한테 나쁜 영향을 주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흔한 속담으로 ‘젊어서 고생은 금을 주고 산다’는 말이 있다. 인생이 얼마나 힘들며 반면 얼마나 값진 것인가 하는 사실을 체험으로 깨닫게 해주고 싶어서 생긴 말일 것이다.
    록펠러 가문이 대대로 부를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자녀들이 7살만 되면 신문배달, 세차, 베이비 시터 등을 시켜 제 용돈과 학비를 스스로 해결하도록 했기 때문이라는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옛날 우리 조상도 아이가 철이 들 무렵 위탁양육을 시키는 관습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미국에서도 애들에게 자립심을 길러주는 교육인지 초등학생이 되면 초콜릿을 팔게 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마켓 앞이나 길거리에 어린애들이 초콜릿 상자를 들고 땀을 뻘뻘 흘리며 뛰어다니는 것을 종종 본다. 나는 그럴 때마다 한국아이들을 찾아보려하나 한번도 본 적이 없다. 자식들을 지극히 사랑하는 나머지 학부모들이 직장에서, 교회에서, 본인 주머니에서 다 해결해 주기 때문이다.

    폭풍우가 휘몰아친 뒤의 날은 더 맑게 개이고, 아름다운 새벽을 위해 밤은 더 어둡 듯이 인생살이의 향기를 내기 위해서는 추운 겨울을 견뎌야 하는 것인가 보다.

    보스톤 친구에게 보낼 예쁜 카드를 그려야겠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리라.
   <올 겨울은 보스톤에 가서 너랑같이 봄을 기다려 보고 싶은데 어떻겠니?>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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