탯줄

2007.03.24 14:34

정해정 조회 수:365 추천:28

  이제는 이 땅에 탯줄을 묻고 살아야 한다.
그런데 문화권이 다른 이 곳에서 아이들을 키우면서 가슴이 철렁 할때가 종종 있다.
이럴때는 나와 내 아이 사이에 보이지 않은 탯줄이 끊기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민 초기. 초여름 어느 날이었다. 나는 모처럼 집에서 쉬고 있었다. 7학년에 다니는 막내 녀석이 학교에서 친구하나와 함께 왔다. 아주 귀여운 백인 소년 이었다. 그 아이의 머리는 금색 명주실 같았고, 호수같은 파랑눈 밑에 주근께가 몇알 박혀 있었다.
두 아이들은 함께 뒤범벅이 돼서 낄낄 거리며 책도 보고, 아파트 마당에서 공 놀이도 했다. 정신없이 딩구는 동안에 어느새 날이 저물어 버렸다.

나는 그아이를 집에 바래다 주려고 자동차 열쇠를 챙겼다. 주소를 받고 계속 쫑알 거리며 후다닷 거리는 녀석들을 뒷 자리에 태우고 상큼한 밤 냄새를 가르며 얼마나 달렸을까. 드디어 단정하고 조용한 어느 주택가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친구녀석이 나에게 오른손을 내밀며 대뜸 말한다.

“탱큐! 미세스 정. 훳츄어 퍼스트 내임?”
허어 요녀석 보소, 쬐끄만 놈이 감히 내 이름을 묻다니… 그러면서  도 나는 얼떨김에
“로사-“
하고 대답하고 있었다.
“씨유- 로사. 굿나잇!  싸이몬 빠이__”
이 소리를 듣는 순간,  아찔한 그 무엇이 나와 내 아들사이에 이어진 탯줄을 끊는 소리가 되어 내 가슴에 와 닿는것은 왠 일일까.

  밤 안개가 자욱히 깔려있는 프리웨이를 타고 돌아오는길. 까마득한 내 유년시절이 생각 났다.  

피난지였던 전라도 섬 에서의 일이었다. 학교가 파하고 읍내를 중심으로 우리집과 반대쪽에 사는 친구집에 놀러 갔었다. 책가방을 내려놓고 뒷 동산에서 매미를 잡다가 날이 어두어져 버렸다.
갯벌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신 친구 엄마가 내가 아직도 집에 가지않고 놀고 있는 광경을 보시고 깜짝 놀라셨다. 시오리나 되는 우리집 까지 데려다 주시마고 한다. 친구엄마는 뻘이 묻은 잠방이를 갈아입을 틈도 없이 내 책가방을 모자처럼 머리에 이고 두팔은 그냥 활개치며 지름길인 논둑길로 들어서신다.

  “아가. 손 잡으믄 더 위험 허겄다. 길이 좁은께 엎으러 질라. 헛발 짚지말고 조심히 따라온나 잉!”
어둠속으로, 어둠 속으로 부지런히 걸어 가시는 친구엄마 뒤를 따라 가면서. 가방은 머리에 올려놓고  활개 치시는 양팔이 엉덩이 쪽으로 잽싸게 왔다갔다 하는모습이 웃음이 나왔지만, 한편으로는 어찌나 송구 스럽던지 나는 콧등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배어났다. 우리집 대문 앞에서
“고맙습니다.안녕히 가십시오” 해야 하는데  그 소리는 속으로 들어가 나오지도 않고 무턱대고 절만 꾸벅꾸벅 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일을 생각하니 그 밤에 논에서 갈갈갈 요란스럽게 울어대던 개구리 들의 울음 소리가 크게 내 귓전을 때린다. 그 친구와 엄마는 지금 어느하늘 아래서 살고 있는지. 아니면 어느 하늘 위에서 살고 있는지…


이런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다시 내아이 친구모습으로 돌아왔다. 금빛머리를 찰랑거리며 한쪽 팔을 번쩍들고 어둠속으로 뛰어간 녀석의 뒷퉁수가 보이고, 변성기가 안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생생히 귀에 멤돌았다.
  그런데 아까 그 녀석이 건방지게 내 이름을 물었을때 왜 세례명을 댓는지 하는 일종의 뉘우침이 쓰디쓴 입맛으로 남아 쉽게 가셔지지가 않는다.
  옆 자리에서 묵묵히 차창밖만 보고있는 우리 아이의 솜털이 보송한 옆 얼굴이 문득 낯설어 보인다.
  오래도록 잊고 살아왔던 나와 내 엄마와의 질긴 탯줄이 새삼스럽게 몹시 그리워진다.
  동양과 서양 사이에도 문화적인 탯줄이 있는걸까. 아니면 그런 탯줄은 무의미 해졌을까.
  가슴 밑바닥 에서부터 점점 아려오는 쓸쓸 함으로 켈리포니아의 초여름밤에 오싹 한기를 느낀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41 섬섬옥수 정해정 2007.03.26 598
40 황홀한 그 작은 공간 정해정 2007.03.26 312
39 그날. 그 무서움 정해정 2007.03.24 426
38 국화에 어린 추억 정해정 2007.03.24 422
» 탯줄 정해정 2007.03.24 365
36 한줄기 빛 (부활 시) 정해정 2007.03.20 414
35 메이플 애비뉴의 비둘기들 정해정 2007.03.18 1230
34 아버지의 눈 정해정 2007.03.05 631
33 깨져버린 거울 정해정 2007.02.21 1099
32 사순절에 드리는 기도 정해정 2007.02.19 475
31 수국 옆에서 정해정 2007.02.15 793
30 엘 카피탄 케년의 밤 정해정 2007.02.09 462
29 기다림 정해정 2007.02.09 476
28 구름은 정해정 2007.02.09 351
27 도라지 꽃 정해정 2007.02.09 502
26 물의 노래 정해정 2007.02.09 297
25 오하우 섬 정해정 2007.02.09 267
24 인디언 묘지 정해정 2007.02.09 241
23 바람개비 정해정 2007.02.09 231
22 달빛 소리 정해정 2007.02.09 487

회원:
1
새 글:
0
등록일:
2015.06.19

오늘:
0
어제:
0
전체:
34,4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