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그 무서움

2007.03.24 14:36

정해정 조회 수:426 추천:52

생각해보니 벌서 서른해가 훨씬 넘었다.
서울의 변두리에서 살았던 어느해 여름이었다. 우리식구들이 단골로 다니는 조그만 병원이 있었다.

  그 병원 의사는 풍채가 좋고 유독 피부가 하얀 노인이었다. 이북 사투리가 심했다. 북에 처 자식을 두고 혼자 서울에 와서 가난한 환자를 돌보는것을 낙으로 삼고 오래도록 독신으로 살았다고 했다. 그러다가 지금은 젊고 아름다운 부인을 얻어 제대로 숨도 못쉬는 공처가로 살고 있다는 얘기를 자주 병원에 드나들다 친해진 간호사가 내게 살짝 해주었다.

  그 의사는 하얀 까운 속에 분홍색이나 하늘색 와이셔쓰를 즐겨 입어 피부에 그 색깔이 번지는 것 처럼 보였다. 대머리가 항상 빤질빤질해서 나는 병원에 갈때마다 와이셔쓰 색깔이 묻어 난것같은 그 대머리를 바라보는것을 재미있어 하기도 했다.

  나는 세째 아이를 낳기위해 그 병원에 달랑 하나  뿐인 입원실에 입원을 했다. 밤새도록 진통을 하고 새벽녁에 잠깐 잠이 들었다가  주변이 술렁거리는 느낌에 정신을 차렸다. 입원실 구석에 있는 조그만 라디오 에서, 분단 이후 처음으로 북한에서 형제들이 서울에 몰려 온다고 세상이 온통 북새통 난리였다. 밤새 나를 돌보던 의사도 금방 몸을 풀 산모를 내 팽개치고, 수술장갑을 벗어 던지고 와이셔쓰 단추도 못 잠근채 판문점으로 뛰어갔다고 했다. 면허증이 없는 간호원은 내 앞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나는 진통이 오는 배를 움켜쥐고 엉뚱하게도 그 의사가 단추도 못채우고간 와이셔츠가  분홍색 이었을까. 하늘색 이었을까…

  그때 번개처럼 퍼뜩였던 불안하고 허전한 그 무엇이 나를 덮쳐와 깊고 깊은 낭떨어지로 떨어지던 무서운 기억이 삼십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어제일처럼 생생하다.

  그날 그 무서운 기억이 LA의 불볓 더위를 더 뜨겁게 해준다.
주변에 해결돼지 못한 잡다한 일들이 더위에 겹쳐 불쾌지수가 높은 날이었다. 같이 글을 쓰는 친구 로라 한테서 전화가 왔다. 오늘밤에 윌셔 이벨 극장에서 공연하는 ‘가곡의 밤’ 초대권이 두장이 생겨 나를 초대 한다는 것이다. 짜증이 들끓어 폭발 하려던 참에 잘 됐다 싶어 서둘러 준비를 하고 극장에갔다.

  세월이 약이라고 누가 했던가.
  그러기는 커녕 살아갈수록 고향에의 그리움은 더 해가는가 보다. 이 공연이 우리의 마음을 풀어주기 보다는 그리움을 더 안아다 주면서 1부의 막이 내렸다. 우리는 1부에서 연주한 성악가들의 얘기며 그동안 못만났던 소식을 작은 소리로 나누며 2부 막이 오르기를 기다렸다.

  그 때 갑자기 스피커 에서 다급한 급보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했다. 북한 김일성 주석의 사망 소식이었다. 더 놀란것은 극장을 가득메운 청중들의 박수와 만세…
  나는 순간 오싹 소름이 닭살로 쫘악 돋고, 깊고 깊은 낭떨어지로 한없이 떨어지는 무서움이 나를 사로 잡았다.
  늦게나마 우리들의 숙원이 이루어 질지도 모르는 Y.S 와 주석의 평양 회담이 이루어 질지도 모르는 한가닥 희망을 걸어오지 않았던가. 자연분만이던, 제왕절개던 통일 이라는 생명이 탄생하기를 가슴조리며 기대해보는 산실이었다.

  김일성 사망 소식은 옛날에 의사가 없는 서울 병실에서 진통했던 산모의 공포 같았다. 이것은 모든 색깔이 순식간에 싹 지워진 무색의 허전함이요. 다시 빠른 속도로 모든 색깔이 한꺼번에 엉켜 무너져 내리는 ‘공포’라고 표현 해야 할까

  사람에게는 의지하고 희망 했던것이 갑자기 사라지는 것이 무엇에 비길 수 없는 무서움이 되기도 하는가 보다.
  그날밤 우리의 가곡은 사라지고 한없는 무서움만 내주위를 멤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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