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잔 밑

2007.03.29 02:48

정해정 조회 수:506 추천:18

‘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말이 있다.

  불과 두어달 전 일이다. 달러 환율이 9백원 대에서 1천원대로 올라가고 있을 때 나는 한국에 있었다. 바로 등잔 밑에 있었던 샘이다.

막연한 불안감을 느끼며 출국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몇달 머물렀기 때문에 미국 친지 들에게 예쁜 스카프나 선물할까 하는데 마침 백화점 세일을 한다고 해서 나갔다.

  와아! 이렇게 많은 인파들을 어떻게 설명 해야할지… 어렵사리 백화점 문을 열고 들어섰다. 여느 백화점과 마찬가지로 1층에는 화장품 품목이다. 둘러보니 국산화장품은 어느 구석에 있는지 보이지도 않고 세계 유명 상표들만 화려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그 중간중간 스카프와 낵타이를 높이 들고 젊은 점원들이 소리 지른다. 외제상품 이름을 알리는 것이다. 손님들 떠드는 소리와 섞여 그야말로 난장판이다.

  밀리는 인파로 내가 원하는 장소로 도저히 갈 수가 없었다. 2층으로 올라가고, 내려오는 에스컬레이터는 사람들이 꽉 차서 마치 옥수수알이 빼곡히 박힌것처럼 보인다.
밀려밀려 4층까지 올라갔다.
그곳은 화려한 수입품 모피 들이 매장을 고급스럽고 멋있게 진열되어 있었다. 가격표를 보니 달러로 환산 하기조차 복잡한 비싼 금액이다. 꼭대기층 식당가에도, 지하 식품부에도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특히 사치품 수입 코너와 먹는것 파는곳이 더더욱 인산인해인것 같다.

  며칠 전 이었다. 열살아래 남자 조카와 성묘길에 나섰다. 성묘도 성묘지만 아름다운 고향의 가을 속으로 들어간다 생각하니 마음이 들떴다. 도심을 벗어나니 화려하고 고급스런 유럽풍 건물이 즐비해 꼭 남의나라를 온것같은 착각이 든다. 서양부자의 사치스런 파티복을 빌려입은 형상이라 할까. 아름다운 숲 속에는 속칭 ‘러브 호텔’이라는 간판들이 우뚝우뚝 서있다. 길 거리에는 식당천지다. 식당마다 메뉴가 커다랗게 적혀있다.

오리탕. 사철탕. 토끼탕. 영양탕. 등등… 이런것들이 다 정력탕이라고 조카가 일러주며 시골 벽촌에도 다 이렇다고 한다. 그 식당들 중에 나의 가슴을 아프게한 집이있다. <기러기탕> 집이다. 물론 기러기를 식용으로 사육 했겠지만 ‘기러기 수육’ ‘기러기 샤브샤브’ 기러기솥뚜껑 구이’ ‘기러기 육회’ 까지 있다.
나는 갑자기 파아란 하늘에 < 모양으로 질서정연하게 날아가는 기러기 들이 퍼뜩 떠올라 오싹 한기가 돈다. 조카는 한국이 외식하는데 쓰는돈이 세계1위라 한다.

그러고 보니 도심지에도 식당이 천지고, 먹자골목은 어딜가나 있다. 나라가 썩어간다고, 정치가들은 서로 <네 탓>이라고 악을 쓰지만 등잔밑의 국민들은 감각이 전혀 없음을 피부로 느끼며 LA행 비행기에 올랐다.
  정말 한국은 망할 것인가 곰곰히 생각하다 <아니다>라는 대답을 맘속으로 해본다. 자기분야에서 정말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도 만났다. 나의 친구 약사는 사람에게 해롭다고 생각되는 약은 절대로 팔지 않는다. 조제약도 두봉지이상은 사절하고 자기약국 손님들의 건강을 자기가족 건강처럼 돌본다. 또 친지인 내과 의사는 행려환자. 무의탁 환자를 돌보느라 결혼까지포기했다. 봉사회를 만들어 손자 손녀 돌잔치를 사직공원에서 외로운 노인네 들과 함께하는 선배. 술. 담배. 마약으로 거리를 헤메는 자기 또래의 청소년들을 집으로 데려와 선도하는 대녀의 아들 등등…

  작게는 지하철 층계를 오르내릴 때 휴지를 줍거나. 가로수 에서 떨어진 송충이를 누가 보거나 말거나 잡고있는 친구도 있다. 내가 한국사람을 만나면 한결같이 외제선호 사치를 버리고 국산품을 애용해야 나라가 산다고 한다.
  IMF 발표가 난지도 몇달이 됐다.
  LA에서 살면서 라디오 광고중 서울에사는 언니가 LA 사는 동생에게
”너 서울 올때 이태리제 무스탕 꼭 사와 여기서 대 유행이야…” 이 원고를 쓰고 있는데 라디오 에서 광고가 또 흘러나온다.
“갈때 올때 비행기 값 남겨주고,용돈도 푸짐하게 쓸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밀수를 하라는 얘기다.

  이순간 머리가 혼미해 진다. 무엇엔가에 의해 다시 등잔 밑으로 들어가고 있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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