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복의 남해금산 작품 감상

2017.01.17 21:10

정국희 조회 수:394

   

이성복의 남해금산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감상

 

      아무리 시의 세계가 시적 상상력에 구축되는 것이라 하더라도 한 여자가 돌 속에 묻혀있었다니 참 가당찮은 말이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다 시가 되고, 입으로 생긴 말들도 또한 다 시가 된다고 하지만 가끔씩은 이런 엉뚱한 상상이 시가 되는 것을 보고 깜짝 깜짝 놀랄 때가 있다. 사실 여자가 돌 속에 있다 해도 누구하나 반대하고 나설자는 없다. 바로 시인이 쓴 시이기 때문이다. 이런 발랄한 상상력이 우리들을 웃음 짓게 만든다면 이 또한 얼마나 멋진 일인가. 나는 오늘 이런 유치찬란하고 근거 없는 거짓말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시인이 된 내가 느닷없이 좋다.

 

      『남해금산은 현란한 언어로 난무하게 기교를 부린 시가 아니다. 어떻게 보면 이 시는 시 같지 않으면서도 시같다. 물론, 언어를 능숙하게 엮어서 내용을 다 보여주는 것도 좋지만 이 시처럼 보이지 않게 안으로 다스리는 솜씨가 오히려 더 믿음의 확신을 줄 때가 많다. 시는, 쓴 사람이나 읽는 사람에게 정확한 답을 내는 것이 아니므로 읽는 사람마다 모두 달리 해석될 수 있는 게 좋은 점이라 할 수 있겠다. 얼마 전 골든벨프로에서 마지막 글자의 받침 하나로 골든벨을 울리지 못한 학생을 보면서, 시는 수학 공식처럼 딱딱 맞아 떨어지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시 속에는 참 다양한 세계가 그려져 있다. 돌 속에 여자가 묻혀있다거나 떠나가는 그 여자를 해와 달이 끌어주었다는 것도 명백한 거짓말이지만 그것을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문학적 진실로서 음미해볼만 하다. 우리의 문학적 이해는 과학이 아닌 공감과 울림을 주는 관점에서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상상력이라는 것의 한 극단에 환상이 있다. 이미지에 또 다른 이미지를 넣어 문학적 상상력이 극도로 낯선 것을 제시하더라도, 이따금 그것이 예상 가능한 테두리를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환상은 만들어진다.

 

      『남해금산은 남녀 간의 만남과 이별의 시다. 이별의 아픔을 주저리주저리 말하지 않고 있지만 그 근원에는 사랑의 강렬함이 놓여있다. 만나고 떠나는 일이 결코 쉽지 않는 일이므로 차라리 이렇게 무덤덤하게 표현하므로서 그 의미를 더욱 깊게 만들려는 작가의 깊은 뜻이 숨어 있다. 이를 테면, 사랑의 아픔은 숨겨놓고 작가는 반어적 표현을 심심하게 그려내므로서 시의 묘미를 한층 업그레이드 시켰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사랑의 아픔은 그 어떤 것으로도 대신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굳이 따지고 보면 남해금산이라는 지역명도 사실 남녀의 사랑에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러나 이성복 시인은 지역명을 넣음으로서 구체적 지시대상으로 하여 남녀의 사랑을 더 함축시켰다고 하겠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남해 금산 푸른 물속에 혼자 잠겨있다는 뜻은 애초부터 물속에 있는 돌을 보고 실제적인 의미로 옮겼다는 것이 문맥 속에서 드러나 보인다.

 

      사실 나는 이성복 시인의 시는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 그의 시집<숨길 수 없는 노래(3권이 들어있음)><, 입이 없는 것들> 이 내 책장에 꽂혀있어서 그의 시집들을 다시 읽어보게 되었다. 읽은 소감은 한 마디로 무슨 소리인지 어렵고 알썽달쏭하다이다. 한편으론, 이런 시들이 사람에게 질적으로 끼치는 영향은 어느 정도나 될까하는 질문도 스스로 해보았다. 왜냐하면 수백 편이 되는 시들이 정작 어떤 느낌이나 감동을 주는 건 고작 서너 편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하긴 한 권의 시집에 한 편만이라도 감동이 스며온다면 성공이라는 말도 있다. 반대로 말한다면 좋은 시가 한 편도 없는 시집도 있다는 뜻이 되겠다. 그렇다면 시가 대중가요의 노랫말처럼 쉬워야 하는 걸까? 그것도 아니다. 노랫말과 시는 다르다고 한다. 노랫말의 논리가 시의 논리와 같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성복이나 황지우 같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한국문학을 이끈 우리나라 문학역사의 보물 같은 존재들이다. 또한 그들은 모두 후배 문인들을 양성하면서 시론이나 시작법을 쓴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시 중에서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모르는 시들이 태반이라면 이건 어떻게 해석 돼야 하는 걸까. 이분들은 분명 아무렇게나 끄적거려논 글이 절대로 아닐 텐데 말이다. 물론 내게 시적 안목이 없다 치자, 그렇다면 과연 독자들은 얼마나 깊은 시적 지식을 가지고 있는 걸까. 아니면 아는 만큼 느끼면 되니까 독자의 안목은 접어 두고 자신의 수준에 맞춰서 취향대로 쓰면 되는 걸까?

 

      그러고 보면, 이성복과 황지우는 둘 다 같은 해에 태어났고 그리고, 같은 학교 출신이면서 양쪽 다 교수이시다. 두 사람은 1980년대 정치 상황에 대해, 정치권력이 주는 압력에 지적으로 접근한다. 각자의 시세계는 다르지만 묘한 비유법으로 추구하는 이념은 같았다. 다만 정치적 상황에서 문학적으로 싸우면서 고통에 대처한 점은 조금 달랐다. 황지우는 표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인지하고 시적인 것을 보이지 않는 문맥 속에서 드러냈다. 다시 말하면, 정치권력의 외부에서 싸우면서 시적인 것의 발견과 형식의 파괴로서 낭만주의에서 풍자로바꾸게 되었고,

 

      이성복은 내면적 태도로 고통에서 오는 뿌리가 무엇인지를 성찰하여 사랑의 발견을 통해 극복했다. 예를 들면, 비속어나 또는 이미지에 또 다른 이미지를 불어넣어 불규칙한 계열의 시를 일부러 무질서하게 드러내었다. 그러면서 내부에서 오는 생동 에너지와 탄력의 시학으로 그의 시는 변용과 무질서의 형식으로 바뀐다. , 고통의 실체에 대한 탐구는 사랑의 발견을 통해 극복하려 하였다. 바로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그날> 의 마지막 부분처럼, 그렇게 인지하지 못해서 생기는 습관으로 마비된 근복적인 고통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유곽에서 허용된 고통이라 나중에는 나도 모르게 적응되어서 고통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처럼 남해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잠겨 있는 돌도 언제 잠이 깰지 모를 일이다. 남해금산에 꼭 한 번 가서 물속에 잠겨 있는 돌들을 오래 바라봤으면 좋겠다. 그리고 돌 하나 꺼내어 탱글탱글한 햇빛 아래 놓아두고 돌아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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