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광의 버들집 시 감상

2017.02.20 12:28

정국희 조회 수:275

이영광의 버들집

 

 

 

어쩌다 혈육이 모이면 반드시 혈압이 오르던 고향

원적지의 장터,

젓가락 장단 시들해진 버들집

아자씨 고향이 나한텐 타향이지라

술 따르는 여자들은 다 전원주 같거나 어머니 같다 황이다

나는 걷고 걸어 지구가 저물어서야 돌아왔는데,

이미 취한 여자의 정신없는 몸에 어깨나 대어준다 황이다

더운 살이 흑흑 새어들어와도

나는 안지 못하리라, 고향에서 연애하면 그건 다

근친상간이리라

파경이리라

옛날 어른이 돌아온 거 같네 얄궂어라

수양버들 두 그루가 파랗게 시드는 꿈결의 버들집

버들집은 니나놋집

나는야 삼대,

어느 길고 주린 봄날의 아버지처럼 그 어버지처럼

질기고 어리석은 고독으로서

시간이, 떠돌이 개처럼 주둥이를 대다 가도록 놔둔다 황이다

고향을 미워한 자는 길 위에 거꾸러지지 않고

돌아와 어느새 그들이 되어 있는데

수양버들 두 그루는 아득한 옛날에 베어지고 없고

그 자리, 탯줄 같은 순대를 삶고 있는 국밥집

삼거리엔 폐업한 삼거리슈퍼

보행기를 밀고 가는 석양의 늙은 여자는 어머니, 어머니,

하고 불러도, 귀먹어

돌아볼 줄 모른다

 

                                               (아픈 천국, 2010, 창비)

 

 

 

       이 시는 이영광의 시집( 아픈 천국p64)에 나와 있는 시다. 이 시집의 해설자는 이영광은 몸으로 시를 쓰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따지고 보면 시인치고 몸으로 시를 쓰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재현을 넘어선 재현으로 머리를 쥐어뜯어서 상상력을 캐내는 시인들은 누구라도 다 몸으로 시를 쓰는 사람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의 소재인 버들집은 술집이다. 오랜만에 고향에 찾아와서 술기운을 빌지 않으면 불러볼 수 없는 즐비한 이름의 낯섦과 낯익음을 극대화한다. 보행기를 밀고 가는 늙은 여자는 어머니하고 불러도 귀먹어 돌아볼 줄 모른다. 이 시는 사람의 구실을 다하고, 인생의 흉포한 바람을 다 받아낸 사람의 실루엣을 제시한다. 그리고 사는 일이 무엇이며, 사람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사람의 입에 뱉지도 삼키지도 못하는 한 움큼의 슬픔을 쳐넣어버린다.

 

       어느 고향길 삼거리마다 있을 법한 버들집은 이영광만의 코믹한 언어가 생성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전라도와 경상도가 마주보는 어느 한가한 읍내 같은 곳에서 마치 한 편의 영화가 상영되고 있는 듯한 정경이 한 눈에 펼쳐지는 시다. 어느 허름한 벽돌집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면 전원주같은 아줌마가 양재기에 막걸리를 따라주며 아자씨 고향이 나한텐 타향이지라하는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듯하다. 이렇듯 관객의 피부로 느껴지는 작가의 언어가 바로 시의 언어가 아닌가 싶다. 버들집은 거의 사실적인 진술로서 시적 의미를 심화시켰다. 바로 이영광의 특질이다. 이 화법은 실제보다 더 많은 의미를 전달하며 옛 주막 풍경의 여백과 배경을 거느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와 우리는 지금 서로 다른 세계에 있지만 같은 이미지를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이 시는 각자의 아련한 노스텔지어로 자신들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힘이 있다.

 

      며칠 전에 <Genius> 라는 영화를 보았다. 1930년대 미국 작가 토마스 울프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였다. 토마스 울프의 첫 작품 Look Homeward Angel이 편집자에게 보내왔을 때는 원고가 몇 천 장이었다. 편집자는 작가와 함께 쓸데없는 말을 줄이고 또 줄여서 한 권의 베스트셀러를 만들어 낸다는 영화다.  말하자면 영화가  쓰는 것 보다는 줄이는 것에 더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 이를테면 꼭 필요한 말만 해야 된다는 걸 확인 시켜 주는 영화라고 하겠다.


    소설도 그럴진데 특히 시는 많이 잘라낼 수록 내용이  채워지는 장르로서 버들집을 쓴 이영광 작가도 잘라내는 데 초점이 마추어졌을 것이다. 얼마나 많이 줄이고 또 고치면서 한 편의 시가 탄생했을지 눈에 뻔히 보인다.

 

       일반적인 상징의 의미보다는 그 이상의 독창성과 보편성을 넘어 상징적 표현의 능력에는 경험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이영광은 직접적으로 체험한 것을 시적 상상력으로 전환을 하였다. 이런 능력은 시인만이 이루어 낼 수 있는 재능이라고 할 수 있다. 한계가 분명한 언어를 가지고 한계를 넘어 가능과 불가능을 탐구하는 작가는 끝없는 모색이며 끝없는 사물의 대상이다. 다시 말하면, 이영광 시인의 지난한 시절의 고향은 자신의 내면에 상징적으로 솟아 있는 시적 대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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