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천국> 에 나타난 시 창작법의 특징

 

 

 

2011년에 <저녁은 모든 희망을>로 황순원문학상을 받은 이영광시인은 분명 시를 잘 쓴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의 시는 마음의 고통을 치유해준다는 어느 평론가의 말엔 동감을 할 수 없지만 좌우지간 그의 시에는 힘이 있긴 있다. 그는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시를 썼다고 한다. 그 이후로 계속 시를 썼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시를 만난 건 아마도 30년이 넘은 것 같다. 강산이 세 번 변하는 기간이었으니 시가 오죽이나 깊어졌을까 싶다. 그러고 보니 이번 시집에서 화자가 서 있는 자리는 세상을 향한 열망의 강도가 아주 깊다.

 

이 시집은 자신의 소시민적인 일상사에서 오는 자잘한 사건들을 시공간에 대입했다고 하겠다. 특히 자신의 삶의 굴곡과 어두운 사회적 그늘이 그로 하여금 성실한 시를 쓰게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번 세 번째 시집 속에 내재해 있는 작가의 정신적 세계는 맑고 깨끗하기보다는 새로운 새로움을 추구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를테면 주변 일상사에 대한 소박한 표현과 상상력이 원심력이 되었다고나 할까. 아무튼 그의 시편 대부분은 부조리하고 불공평한 세상을 극복할 수 있는 어떤 것을 찾고자 하는 노력이 느껴졌다

 

글을 쓰는 사람마다 스타일이 다 다르고 읽는 사람마다 느낌 또한 다 다르다. 그래서 딱 이거다 하고 꼭 집어서 말을 할 수는 없지만 그에게는 내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특별한 시적 상상력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와 연루된 어떤 감수성과 예술적인 면도 다른 사람과는 구별될 것이란 생각이 든다. 단지 내가 너무나 박식하고 시적감정이 풍부한 시인을 과소평가 하지는 않나 하는 생각이 듦은 물론 아직 시를 감상하는 지식의 층이 부족함을 느낄 따름이다. 내가 <아픈천국>을 읽으면서 발견한 이영광 시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그의 시정신은 우선 성실함에 있다. 그의 작품 속에 내재해 있는 시적 정신은 부단히 도전적이면서 또한 진실성이 엿보인다. 성실함이란 억지로 꾸민다고 해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타고난 성품이기 때문이다. 그런 성정을 엿볼 수 있는 것은 시가 자신의 내면을 통해서 나오기 때문에 독자는 쉽게 알아낼 수가 있는 것이다. “녹색이라는 시편은 세상은 불안하지만 번영의 미래를 부추기고 재생산하기도 한다. 시에서 반사된 자신의 시정신은 성실함에서 오는 안온함이 바탕이면서 실상은 부정적인 요소들이 강하게 나타나는데 이런 진솔한 표현은 사회적인 보편성에서 오지 않나 싶다. 그렇게 보면 이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아픈 천국은 희망과 꿈이 없어져가고 있는 시대를 반영한 그래서 평화와 안식처를 마련하지 못한 현 시대를 그렸는지도 모르겠다. <실직과 가출, 취중 난동에 풍비박산의 세월이 와서는 물러갈 줄 모르는 땅, 살 것도 못 살 것도 같은 통증의 세계관 가지고 저 팽팽한 창밖 걸어가면 닿을까> 라고 하는 것은 시인 자신이 그 굴레로부터 벗어나고픈 욕망이 더 크다고 보여 지고 있다.

 

이와 같이 몇 편의 시에서는 여린 마음이 곳곳에 나타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남자다운 혁명적인 기질이 엿보인 면도 더러더러 있었다. “시인들이란 제목에서는 어느 아픈 여류시인에 대한 삶의 연민이 내재해 있는 것을 보면서 작가의 인품과 성정이 대개는 순수하다는 것도 깨달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온유하고 돈독함이 이 시집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둘째, 그의 시는 부정적인 면이 곳곳에 잠재해 있다. 처음 시를 읽으면서 죽음이란 단어가 참 많구나 라고 생각했다. 죽음이란 단어가 시집 반 권 분량(60 페이지 까지)에서 도합 60번 정도가 나왔는데 <유령2>, <죽도록>, <사람이 잘 안 죽는 이유> 라는 시들에서는 한 편에 각각 17, 12, 11번이 나왔다. 죽음의 뜻이 굳이 부정적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지만 긍정적이지도 않다. 다만 죽음이란 삶의 반대말로써 어둠을 나타내고 있다고 하겠다. 어둠은 원형적 이미지로 오랜 역사 속에서 부정적이고 악마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관습적 상징으로 일단 밝지 않는 것은 숨어 있는 부정적인 의미가 있다고 봐야한다. 시인은 간밤 꿈에 그가 날 웃으며 죽였다. 죽이고 죽이고 또 죽였다. 나도 그를 꿈속에서 별안간 죽였다. 죽이고 죽이고 또 죽였다가 반복된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라고 시작되는 까뮈의 <이방인>은 통념상 큰 슬픔을 자아낼 것 같지만 내성적인 화자인 뫼르소는 슬퍼하는 기색이 없음으로 인해 냉정한 인간으로 오해를 받는다. ”아픈천국에서 보여주는 죽음도 그런 냉정한 부류에 속하므로 순진성을 상실했다고 봐야겠다. <사람이 잘 안죽는 이유>(p32) 에서는 마지막 행에 사람은 정말 잘 안 죽는다 그 이유는 모른다라고 끝을 맺고 있는데 이 대목에서는 시가 너무 무의미하고 장난 같다. 누군가는 인간을 우주의 영광이라고도 했는데 시가 아무리 은유라 하지만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사람의 목숨에다 너무 가벼운 장난을 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인간의 목숨은 그 무엇보다 숭고하기 때문이다. 아니 세상 무엇보다도 소중한 게 목숨이고 전 생애에 오직 한개 밖에 없는 게 생명이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특히 가족이 죽으면 누구나가 몸부림을 치면서 운다. 바로 재생될 수 없는 한번뿐인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가, 이 시집에 나오는 많은 죽음들은 너무나 가볍다. 시인은 아마도 너무 무거운 죽음이기에 차라리 가볍게 처리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개인적인 죽음의 상징으로써 직선적인 의미라고도 할 수 있겠다. 작가가 쓰는 모든 낱말에는 자기만의 가치관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마도 계획적으로 시의 긴장감을 높이기 위함일 수도 있을 것이다. 탈무드에는 글자 한 자의 빠짐이나 더함이 전 세계의 파멸을 의미할 수 있다고 쓰여 있다. 그런 만큼 글을 쓰는 사람은 더 신중해야 할 것 같다. 비록 그게 짧은 시일지라도 말이다.

 

셋째, 그의 시는 첫 번 읽었을 때보다는 읽을수록 감동이 있다. 다시 말하면 시가 표면적으로 별 깊이가 없어 보이지만 작품을 두세 번 읽고 나면 처음 읽을 때보다는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간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시가 난잡하여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헛소리 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언뜻, 무슨 뜻이지? 하는 의문이 생기는 부분이 많았다. 시의 형태가 주지시보다는 주정시에 가깝다고 할 수 있지만 전체의 흐름에서 딱히 시선을 고정시키는 특별한 부분은 발견하지 못했다는 뜻도 있다. 19세기 영국 평론가 메슈 아널드는 시는 인간의 가장 완벽한 발언이라고 했다. 그 뜻은 시를 알지 못하고서는 말을 안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시는 누가 읽어도 뜻을 알아야 하고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누군가가 시는 한번 읽어서 이해가 되는 것보다는 몇 번 읽어서 이해가 되는 시가 더 좋은 시라고 했다. 나는 꼭 그렇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안 그렀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시인은 기쁨과 슬픔을 포착하여 특별한 감각과 예리한 눈으로 삶을 노래하는 사람이다. 하여 그것을 다른 사람도 느끼고 파악할 수 있도록 잘 써야 하고 똑같이 그 감정을 느낄 수 있도록 잘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려면 물론 시는 서정적이어야 하고 어렵지 않아야 한다. 요즘처럼 복잡한 현대 사회를 사는 사람들은 복잡한 걸 싫어한다. 사는 일도 복잡한데 머리 식히려고 읽는 시까지 무슨 소리인지 헷갈린다면 더 이상 시를 안 읽게 된다.

<높새바람 같이는> 은 전체의 시적 흐름이 부드러우며 시가 물 흐르듯이 차르르 흐른다. 대체로 이런 스타일을 나는 좋아한다. 뭔가 어수선 하지 않고 그러면서 잔잔한 무언가가 가슴으로 스르르 옮겨오는 것 같은 이런 시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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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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