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하의 시 세계에서 불교적 상상력의 특성. 내용. 위상 / 정국희

                                                                                                                         

 

 

          먼저 김지하의 시 세계에서 불교적 상상력이 시의 이론에서 어떤 실체와 양상으로 드러나는지 그 특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 방법론을 직접적으로 말한다면 사실 농경공동체의 생명의식과 화엄적 상상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김지하 문학의 역정에 대하여 살펴보면 그의 시세계는 저항에서 생명으로 전환하는 게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저항에 타는 목마름에서 생명의 바다로 변하는 데 외향적으로는 큰 변화지만 그 이면에는 불연속성의 연속성의 의미를 가졌다고 하겠다.


   1969년에 <시인> 지로 등단한 김지하는 오적, 황토, 타는 목마름 등으로 지배세력에 대한 울분과 대립, 그리고 저항에 대한 공격적인 언어를 사용했다. 6.70년대 그의 시는 오랜 감옥생활로 점철되는 저항 운동의 전위로서 반역과 투쟁의 상징성을 지녔다. 이런 과정들이 반역과 투쟁으로서의 선명성을 지니면서 시대정신의 핵심으로 들어간다. 그 변화의 도정이 저항에서 생명으로 가는 과정인데 그게 바로 농경공동체의 생명의식과 연결된다. 그것은 바로 순리와 이치에 따라 거둬들이는 농사의 우주적 조화의 삶을 본래대로 다시 환원하고자 하는 데 집중된 것이다. 말하자면 김지하의 본래의 삶을 추구하는 농공공동체의 세계관이 표면적으로는 다른 세계 같지만 궁극적으로는 같은 차원인 불교적 특성이라 하겠다.


       1970년대의 쓴 그의 시집 황토에서는 굳은 신념과 확신에 근거한 투쟁의 시 세계를 보여주었지만 1980년대 이후에 발표된 애린(마디절로 이루어져있다)은 이전과 달리 생명사상이라고 하는 새로운 대안적 사유를 보여준다. 다시 말하면 저항에서 표용으로 변화되어 가는 불교적 세계관을 보여줌으로서 수렴, 청정, 조화의 표용적인 언어를 통한 생명적 세계로 변화된다. , 그의 시적 삶의 원적을 이루는 농공공동체의 생명의식은 <애린> 을 통해 숨은 차원의 질서에서 드러난 차원의 질서로 외화 되고 더 나아가서는 화엄적 상상력으로 승화되는 면모를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애린2> 에서는 시집전체가 불교적 상상력을 근거로 해서 연작의 골격을 유지하며 애린으로 상징된 생명본성의 탐구에 집중되어 있다. 이처럼 불교적 상상력은 김지하의 시에서 생명사상을 개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러한 상황은 특별히 불교적 세계관인 심우도(송나라의 확암스님이 그린 그림으로 불성을 소에 비유하여 소를 찾아가는 열개의 그림) 와의 병치 관계를 통해 화엄적 자아의 탐구를 실천하면서 변모의 사상적 토대가 되었다. 따라서 진정한 존재의 회복에 도달할 수 있는 논리에 대한 대안으로서 김지하의 시세계는 불교적 상상력의 특성을 지녔다고 본다.

 

        김지하의 첫 시집 <황토>에서 보면 처음부터 치열하고 비장하게 절박한 정조를 드러내고 있다. 그의 시는 죽임의 현실과 대지적 생명력으로 삶의 절대 절명의 당위적 과제 속에서 생성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죽임의 상황으로부터 살아있음을 드러내는 증거이며 항변의 언어로서 시적 출발점이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데뷔작 중의 한편인 <녹두꽃>을 보면 이러한 사정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빈손 가득히 움켜쥔/햇살에 살아/벽에도 쇠창살에도/노을로 붉게살아/타네/불타네/깊은 밤 넋 속의 깊고/ 깊은 상처에 살아/모질수록 매질 아래 날이 갈수록/흡뜨는 거역의 눈동자에 핏발로 살아/ 열쇠 소리 사라져 버린 밤은 끝없고/끝없이 혀는 짤리어 굳고 굳고/굳은 벽 속의 마지막/통곡으로 살아/타네/불타네/녹두꽃 타네/별 푸른 시구문 아래 목 베어 횃불 아래/횃불이여 그슬러라/하늘을 온 세상을/번뜩이는 총검아래 비웃음 아래/너희, 나를 육시토록/끝끝내 살아이토록 팽팽한 죽임과 생의 의지의 대결은 생의 의지가 우위로 나타나면서 어떠한 죽임의 세력에도 결코 굴복되지 않는 불멸성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초기 시에는 리듬을 타고 가면서 절묘한 심층의 마음을 밑바닥에서부터 끌어올리는 깊은 울림의 속성을 살려낸다. 그것은 들녘이라는 시에서도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무엇이 여기서 무너지고 있느냐/무엇이 저렇게 소리치고 있느냐/ 아름다운 바람이 저 흰 물결은 밀려와/뜨거운 흙을 적시는 한탄리 들녘/무엇이 조금씩 조금씩 무너지고 있느냐) 이렇게 시작되는 들녘은 대지적 생명력이 죽임의 세력에 압도당하고 있는 형국을 나타내고 있다. 다시 말하면, 붕괴되어가는 재래적인 삶의 터전과 도시화, 공업화, 산업화를 내세운 개발독재 이데올로기로 연관된다고 하겠다


    급격한 농촌 공동체의 와해로 인해 떠밀리듯이 서울로 몸 팔러 가는 길을 나타낸 <서울길>이란 시는 고향마을의 불모성과 고단한 인생행로를 애견하는 비극성을 그리고 있다. (간다/울지마라 간다/흰고개 검은 고개 목마른 고개 넘어/팍팍한 서울길/몸팔러 간다/언제야 돌아오리라/언제야 웃음으로 돌아오리란/댕기풀 안쓰러운 약속도 없이/ 간다 /울지마라 간다) 이러한 시적 배경은 1960,70년대 당시 시대적 상황과 직접 연관되면서 한국 전래의 공동체적 살림의 터전은 급속도로 화해되기 시작한다.

 

       공격성이 점차 약화되고 여성적 수렴과 포용성으로 선화하는 모습을 드러낸 <애린> 에서 소를 논함으로 구분된 소노래는 각수마다 4행으로 되어 있으며 짤막하게 풍자적으로 쓰여 있다. 불법을 알기 쉽게 대중에게 전도하고자 도모한 심우도는 즉, 소를 찾아나서는 장면에서 부터 소를 찾아서, 그리고 길들여서, 소를 타고 집에 돌아와 급기야는 사람도 소도 없는 상태에 이르면서, 마지막엔 자유분방하게 속인들을 교화하는 모습이 열개의 공간 안에 그려진 그림이다.


    <우거진 풀 헤치며 아득히 찾아가니/ 물은 넓고 산은 멀어 갈수록 험하구나/ 몸은 고달프고 마음은 지쳐도 찾을 길 없는데/ 저문 날 단풍숲에서 매미울음 들려오네.> (소노래 첫째) 여기에서 동자승이 소를 찾는 것은 자기 자신을 찾는 것이다. 나의 본래 면목은 실재하는 자성이면서 동시에 부재하는 무자성이고 는 나이면서 가 아닌 것이다. <소 등에 걸터앉아 내 집에 돌아오니/ 피리소리 한가한데 저녁노을 붉게 탄다/ 흥에 겨워 박수치며 부르는 노래/ 이 소식 알 이 없어 홀로 즐기네.> (소노래 여섯째) 여기에서 동자승은 소를 타고 본래의 고향으로 돌아오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맨가슴 벗은 발에 흙먼지 덮어쓰고/ 웃음 가득 띠우고 마을 찾아 들어온다/ 신선의 비결 따위 쓰지 않아도/ 마른 나무에 봄이 오면 꽃이 피듯 하리라.> (소노래 열 번째)는 사립문을 열고 거리로 나와 자유분방하게 속인들을 교화하는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그 소, 애린> 연작의 마지막에서 그동안 부단히 찾았던 애린과 대면하는 국면을 맞이한다. 그렇게 찾아 헤매던 애린의 정체가 곧 자신을 찾는 과정이었음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애린 연작은 우주생명의 주체로서 생명의 큰 이치를 몸과 마음에 익히며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 김지하의 시세계에 불교적 상상력의 내용으로 적용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김지하의 시 세계에서 불교적 상상력의 위상은 법계연기론에서 나타나고 있다. 법계연기란 세상의 모든 것이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종횡무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서 하나의 사물에는 삼라만상이 그물처럼 상호의존적인 관계를 맺고 있음을 가리킨다. 즉 모든 사물의 존재는 상호의존적이므로 불생불멸하고 부증불감하며 공에 해당하는 비실체성이므로 순환성, 상관성, 항상성을 지닌다. 이런 현상은 표면적 수준을 넘어서서 서구의 주체중심주의의 이원론적 세계관에 대한 부정과 더불어 무자성의 공, 연기, 자비를 바탕으로 집착과 분별을 제어한다.

 

         불교에서 연기설은 4법인을 기초로 구성되는 데 첫째는, 제행무상諸行無常(모든 것은 무심, 영원하지 않다) 둘째는, 제법무아諸法無我(모든 법은 관계성의 실체, 실체가 없다) 셋째는, 일체개고一切揩苦 ( 윤회 속에 있고, 모든 것은 다 고뇌다). 넷째는 열반적정涅槃寂靜 (성자의 상태, 연기로부터 벗어난다)이다. 따라서 법계연기에서 개채생명은 역사적 전승 과정의 한 계기로서 죽어도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태어나도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며, 영원히 변치 않고 남아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연기설에서 생명현상은 일즉일절(하나가 전체이고), 일절즉일(전체가 곧 하나이다)의 속성을 지닌다. 즉 나락 한 알 속에도 온 우주가 들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농경공동체의 생활문화인 것임을 말해준다. 바로 이러한 법계연기론과 생태적 상상이 김지하의 시 세계에서 불교적 위상에 속한다고 하겠다.

 

       마지막으로, 김지하의 애린 연작을 통해서 본 전체적인 흐름은 불교의 법계연기론의 원리에 입각한 생태주의적 상상력과 농경공동체의 생명의식과 화엄적 상상을 통한 감각으로 정리되었다고 하겠다. 따라서 김지하의 시 세계의 시적 삶의 근원은 결국 불교적 상상력의 위상에서 고양되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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