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녕의 소설 <천지간>

2016.05.04 06:41

정국희 조회 수:779

  

윤대녕의 소설 <천지간>

      

 

 

       소설이란 작가가 만들어낸 스토리 속으로 들어가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간접 체험을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난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마치 내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천지간의 현실 속에 직접 들어 있었다. 왜냐하면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 바로 이 소설의 무대인 전라남도 완도군 완도읍 정도리 바로 그 옆 마을이였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주인공이 외숙모의 문상을 가다 생면부지의 여자를 만나는 광주 종합 터미널에서부터 이미 눈에 익은 길을 따라 내가 먼저 달려가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아마도 나는 이 소설이 주는 감동보다는 어쩌면 장소에서 풍기는 현실감 때문에 이 소설이 더 흥미로웠는지도 모르겠다.

 

      <천지간>19964월에 발표되어 그해에 이상 문학상을 받은 작품이다. 윤대녕의 작품을 처음으로 접하게 된 이 소설의 소감은 수상작품이라는 거대한 제목과는 달리 딱히 그렇게 감동이 될 만한 구절은 없었다. 다만 도입부부터 나오는 죽음을 보는 작가의 섬뜩한 스토리 전개가 예사롭지 않아서 눈길을 끌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도 그럴 것이 몇 편의 소설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작가는 절에 있는 암자에서 한 일 년 동안 생활하였다. 아무래도 그때 터득한 자기만의 불교적 사고의 세계관과 윤회사상의 관심이 그토록 치밀하게 죽음의 암시를 표현하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소설의 주인공인 나는 외숙모의 부음을 받고 광주로 문상을 가는 길에 바바리코트를 입은 낯선 한 여인을 만난다. 그리고 그 여인을 바닷가 민박집까지 따라가게 된다. 그 이유는 그 여자의 얼굴에 죽음이 드리워져 있기 때문이다. 물론 죽음의 그림자를 걷어내기 위한 주인공의 어떤 운명적 논리로 해석될 수 있겠지만 종국에는 하룻밤 정을 나누고 헤어지는 말하자면 그 옛날 십대 때 읽었던 약간은 통속적인 그런 소설류라 하겠다.

 

      이렇듯 한 여인을 만나 하룻밤 정사를 나누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각자 일상으로 돌아가는 뻔한 스토리인데도 좋은 평을 받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물론 작품성이 뛰어나고 플롯이 탄탄하게 잘 짜여진 장점도 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주인공이 어릴 때 죽을 뻔한 경험에서 얻은 삶의 존재 양상을 다른 차원에서 이끌어낸 게 특이한 점이라 하겠다. 다시 말하면, 죽음에 대한 상징적인 요소들을 곳곳에서 공통점으로 찾아내고 있다는 점들이다. 예를 들면,


      첫째로,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나는 9개월 전 암 선고를 받은 뒤 외숙모의 얼굴에 드리워져 있던 차디찬 죽음의 그림자를 엿보았다. 그리 길지도 않는 사이에 그녀의 얼굴에 뒤덮이던 적막한 체념의 그림자 그것은 이미 죽음을 받아들인 자의 모습이라고 해도 좋았다.” (천지간 27) 여기에서 작가는 한 여자의 얼굴에서 산 죽음을 본다. 그리고 그 얼굴에 있는 죽음의 그림자를 걷어내려고 한다. 과거의 시간이 현재의 시간을 뒤흔드는 불길한 그림자의 정체를 쫒아가는 주인공은 계속적으로 죽음의 모티브를 형상화한 시뮬라크르를 잘 보여주고 있다.


      둘째로, “하필이면 나는 검은 양복을 입고 서 있다가 우연찮게도 죽음을 뒤집어 쓴 여자를 보게 되었다. 그것도 문상을 가는 길에”. (천지간 28) 이 대목은 어쩌면 검은 양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생긴 일인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다. 검은 양복이 슬픔을 알아보는 것은 마치 죽음이 죽음을 서로 알아본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문상을 가다 말고 행로를 바꾸어 죽음을 뒤집어 쓴 얼굴을 따라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말하자면 현상적 사고를 넘어서 주술적 측면에서 본 기이한 한 편의 장면이다.

 

      셋째로, 9살 땐가 열 살 때,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마침 자기를 구하고 죽은 친구가 있었다. 그때 죽어가는 그 친구의 얼굴에서 주인공은 흰빛을 언뜻 본다. 또한 주인공이 군에 있었을 때 죽을 뻔한 상황에서 예의 그 흰색과 또 만난다. 이처럼 약간 몽환적이고 샤머니즘적인 환상이나 환영이 소설에 나타나 있는 걸 다른 작품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를테면, 정월 대보름날 흰옷을 입은 노파가 동백 숲으로 봉황을 보러갔다가 죽는 장면이 나온다. (천지간 44) 이렇듯 작가에겐 흰색이 자기만의 어떤 죽음에 대한 연결 고리로 자리를 잡게 된다

 

      그의 다른 단편소설 <말발굽소리를 듣는다>에서 보면 조모가 죽기 전날 밤 봉황을 보았다던 곳이 있다. (1996년도 이상문학상 75) 작가에 있어서 봉황은 흰빛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나타내는 또 다른 의미로 각인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작가가 죽음에 대한 암시나 상징적인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장면은 또 있다. 현대문학상 수상후보작에 발표된 <가족사진첩>에서 소설의 주인공이 몇 번인가 죽을 뻔한 일이 있었다. ”그때마다 아버지가 저의 옆을 스쳐지나가곤 하는 환상을 보곤 했어요. 아버지가 죽음처럼 보였거든요. 일찍 가시려고 그랬는지 몰라두요“(96년도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 321) 이런 식의 형태의 글들은 윤대녕 소설에서 마치 신화적이고 불교적인 각도로 미묘한 형상들을 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형태의 예를 들면, 윤대녕 작가는 죽음이란 단어를 여러 작품에서 친숙하게 다루고 있다. <은어낚시통신>에서도 보면 박무현의 일기체 수기에서 죽음에 대한 말이 또 언급된다. “죽음 밖에 서 있다가 뒤미처 제 죽음을 따라온 웬 사내, 무엇이 그를 산 죽음이 되게 했을까 또 무엇으로 하여금 제 죽음을 뒤따라오게 했을까라든가, 또한 그 전 페이지에는 삼촌이 은어가 들어 있다는 우물 속에 빠져죽는 장면도 나온다. 이렇게 죽음을 여러 소설에서 언급하고 있는 건 아마도 자라면서 그런 상황을 많이 접해서 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그는 조부와 백부 그리고 부친의 영향이 자기의 문학에 짙게 배어있다고 인터뷰에서 말하고 있다. <1996년 문학동네 겨울호> 어쩌면 그의 스토리의 토대가 어른들의 동양적 사상에서 나온 가문의 뿌리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윤대녕 소설은 소외된 개인들과의 만남과 이별, 그리고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는 사람들께 삶의 숭고함을 일깨워 주는 글이라고 하겠다. 또한 어떤 사물을 주요사건과 일치시켜 그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치밀한 구성력을 가지고 있다. 우연한 만남에서 불가항력적인 인연을 강조하면서 마치 영험 있는 당골네가 점을 보듯 죽음의 그림자를 표현하는 수법이 참 특이하고 미묘하다. 다시 말하면, 죽음의 상황으로부터 살아있음을 드러내는 그리고 죽음의 현실과 삶의 절묘한 심층의 속성을 잘 살려내는 표현이 유독 인상적이었음을 나의 비평적 소감으로 끝을 맺는다.

 

참고자료 윤대녕의  <천지간>, <은어낚시통신>, <>, <말발굽소리를 듣다>, <가족사진첩>, <그를 만나는 깊은 봄날 저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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