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희시집 <응> 에 대한 감상문

2015.06.18 12:12

정국희 조회 수:610

문정희 시집  < >

 

 

                                                                                   

1).

 

 

 

                                                                                              

어머니가 죽자 성욕이 살아났다.

불쌍한 어머니! 울다울다

태양아래 섰다

태어난 날부터 나를 핥던 짐승이 사라진 자리

오소소 냉기가 자리 잡았다

 

 

드디어 딸을 벗어 버렸다

고려야 조선아 누대의 여자들아, 잘가거라

신성을 넘어 독성처럼 질긴 거미줄에 얽혀

눈도 귀도 없이 늪에 사는 물귀신들아

끝없이 간섭하던 기도 속의

현모야, 양처야, 정숙아,

잘 가거라. 자신을 통째로 죽인 희생을 채찍으로

우리를 제압하던 당신을 배반할 수 없어

물 밑에서 숨 쉬던 모반과 죄책감까지

브레지어 풀듯이 풀어 버렸다

 

                    

어머니 장례 날, 여자와 잠을 자고 해변을 걷는 사내여

말하라. 이것이 햇살인가 허공인가

나는 허공의 자유, 먼지의 고독이다

불쌍한 어머니, 그녀가 죽자 성욕이 살아났다나는

다시 어머니를 낳을 것이다.

 

 

 

          

 

           어머니가 죽자 성욕이 살아났다너무 부끄럽고 현란한 이 표현이 눈을 사로 잡았다. 서양문명을 일찌기 받아들여 성에 자유분방한 일본사람이라면 모를까 동방예의지국인 우리나라에서 어머니 죽음을 앞에 놓고 성욕 운운하다니 이 무슨 해괴망칙한 말인가. 이거야 말로 뺨을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강한 문장이었다 어쩌면 이런 문구를 이렇게 자연스럽게 쓸 수 있는지 그 태연함이 부러워서 더욱 놀랐는지도 모르겠다. 


        십여년 전쯤 김기택교수님이 엘에이에서 강의 하실 때 나를 강력하게 사로잡은 말씀이 있었다. 그때 교수님께서는 첫 행은 뺨을 때리는 것처럼 강하게 쓰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은 그당시 시를 막 배우려는 나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었다. 그런데 이 첫 줄이 바로 딱 그런 말이다. 다시 말하면, 이 표현은 간단하면서도 함축성 있는 의미를 진실되고 확실하게 팍  쏟아놓아 눈길을 끌게 했다.


       문정희시인은 아마도 <>의 소재를 까뮈가 쓴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에 의해 힌트를 얻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마지막 연에 어머니 장례 날 , “여자와 잠을 자고 해변을 걷는 사내여라는 말은 이방인의 뫼르소를 두고 한 말이라는 인용이 있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워낙에 내성적인데다 담담한 사람이다 보니 마치 어머니를 모르는 사람인냥 슬픔없이 장례를 치른다. 그리고 그 다음날 좋아하는 여자와 해변을 거닐고 정사를 나눈다. 따지고 보면 뫼르소의 행동은 도덕적인 결함은 있을 뿐 그렇게 흉이 될 만큼 잘못한 건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이방인 하면 뫼르소가 어머니 죽음 뒤에 여자와 잠을 잤다는 것이 큰 이슈인 것처럼 평가되어 있다. 성적 충동과 슬픔은 전혀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부모의 장례식에 갔다가 정사를 나누는 영화를 여러 편 봤던 기억이 나기 때문이다 문정희시집을 읽으면서 느낀 점은 어느 유명한 작품의 한 문장들을 시적 대상으로 뽑아 스토리텔링으로 한 시가 많다는 걸 깨달았다


         만약 나에게 에즈라 파운드가 <지하철 정거장에서>란 장시를 단 몇 줄로 퇴고한 것처럼, <>의 작품을 몇 줄로 줄이라고 한다면, <어머니가 죽자 성욕이 되살아 났다 / 불쌍한 어머니! 울다울다 / 태양아래 섰다 / 나는 다시 어머니를 낳을 것이다.> 나는 이처럼 첫 연의 세 행과 마지막 연의 한 행을 넣어서 네 행으로 줄이겠다 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 안에 모든 말들이 다 포함되어 있어 더 이상의 구구절절한 사연이 필요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는 시 제목과 내용이 전혀 상반되지 않아서 왜 강이라고 하었을까 곰곰 생각해 보았다. 결론은 태초의 물이 양수이고 양수는 또한 몸안에서 생명을 키우는 물이다. 그래서 아마도 강이라는 제목을 붙히지 않았나 하는 그런 생각을 해봤다.                 

 

 

 

 

 

 

2. 첫사랑의 납골당

 

 

 

 

건너편 아파트에 내 첫사랑 살고 있다

그의 아내가 유난히 예쁘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베란다에 세워 둔 유모차도 보았지만

내가 딴 데 시집가서 아이가 열 명이 되더라도

나를 기다리겠다고 한 약속 잊지 않고 있다

 

흐리거나 비오는 날이면

목소리 가다듬고 가끔 건너편 아파트를 쳐다본다

나 아직 아이가 둘뿐이라고 소리쳐 줄까

그러다가 멈칫 앞마당을 내려다본다

웬 여자가 아이 둘을 양손에 잡고

내 남편의 방 쪽을 올려다보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창문을 드르륵 닫는다

밤바람이 사뭇 상큼하다

 

사랑이 식은 재가 칸칸이 담긴 탓일까

건너편 아파트 불빛이 납골당처럼 교교하다

 

 

 

 

 

 

          이 시는 읽기가 편해서 생각하고 말 것도 없이 쉽게 이해가 된다. 너무 쉬운 시는 시가 아니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다. 그래서 시를 좀 어렵게 써야겠다고 생각해본 적도 있다. 며칠 전 신문에서머리에 딱 들어와야 좋은시라고 신경림 시인이 인터뷰에서 말한 걸 읽었다. 윤동주시인은 시가 쉽게 쓰여지는 게 부끄러운 일이라고도 했지만 아무래도 나는 신경림 편에 더 가까운 사람이다는 걸 이번에 확실히 깨달았다. 하긴 시가 너무 구체적으로 묘사가 되어 있으면 산문 같은 느낌이 들어 무슨 시가 이래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도통 무슨 소린지 알 수 없는 아리송한 언어가 시 전체에 남발해 있는 건 읽기에 불편하다. 마치 <시적 표현의 이해>에서 지적한 것처럼 추상어나 철학적 언어를 써서 지식이 많은냥 잘난체 하는 것 같아서다. 나는 <첫사랑의 납골당>의 시처럼 단순하고 편안하게 읽히는 시가 좋다. 그러면서도 뭔가 이야기가 가만히 내재해 있는, 혹은 누구나 그런 정도의 사연쯤은 마음 한 구석에 담고 있을, 그래서 고개가 저절로 끄떡여 지는 다시 말해서 작가의 감정이 독자에게 잘 전달되는 이런시라고 할 수 있겠다.

 

           내 나이 스물서너 살 적 소박을 열 번을 맞아도 돌아오면 받아준다는 사람이 나에게도 있었다. 이런 말은 연애시절 청춘이라면 누구나가 한 번쯤 말하고 들었을 법한 경험들이다. 통속적이면서도 너무나 간절한 이 말들은 때마다 우리를 지켜주기도 하고 용기도 주는 작은 불빛이기도 했다. 어쩌면 이런 게 바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한 시대이고 또 살아갈 미래이지 않나 싶다. 사는 게 답답할 때, 이리 저리 둘러봐도 숨통 트일데가 없을 때 여자들은 가끔 그때를 쳐다보며 소리쳐 주고 싶을 때가 있다. 나 아직 그 말 기억하고 있다고….

 

<그러다가 멈칫 앞마당을 내려다본다

웬 여자가 아이 둘을 양손에 잡고

내 남편의 방 쪽을 올려다보고 있는 것 같다>.

 

           이 무슨 아이러니인가.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한 어느 남편의 아내가 아예 아이를 데리고 와서 집 앞에 먼저 당도해 있다. 사람의 생각이란 거의 누구나가 다 똑같다는 것을 화자는 무참히 느낀다. 삶이란 어차피 남을 보면서 비젼을 가지기도 하고 나 자신을 다잡기도 하는 것처럼 화자는 다시 현실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하나의 생생한 이미지를 보고 만다.

 

<나는 창문을 드르륵 닫는다 / 바람이 사뭇 상큼하다>

내가 가진 것에 다시 만족하며 바람이 상큼함을 느끼는 화자. 지난 과거는 기억에서만 소중할 뿐 현실은 이미 납골당과 같은 것이라는 걸 깨닫는다.

 

 

 

 

 

3.

 

 

 

딸아 딸아

내 따라

다라관음

눈물에서 태어난 보석아

 

눈에 도로 넣어도 아프지 않을

영원한 소녀

버들잎 방울방울 초록의 아픔으로

남몰래 떨어지는

눈물방울아

 

기쁨으로 꽃을 피우고

슬픔과 고통으로 씨앗을 맺는

 

딸아 딸아

내 딸아

마른 땅을 적시는

영롱한 강물아

 

 

 

 

 

 

            딸이라는 말. , 하고 입을 달싹만 해도 눈이 맑아지는 말. 세상 어느 말이 이 말만큼 울림이 있을까. 이 땅 위에 가장 애틋한 정이 고여 있는 존재. 엄마라는 말보다 더 심중을 울리는 존재. 내 피를 받아 태어난 몸이라서 내 살보다 천배 만배 더 귀한 존재가 딸이 아닐까. 다른 여늬 엄마들처럼 나에게도 딸이 셋 있다. 내 삶을, 내 인생을 통째로 끌고온 내딸들, 그애들이 있어 나의 생이 많이 따뜻했고 아름다웠다고 감히 말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딸은 여전히 눈물이고 보석이다.

 

 <딸아 딸아 / 내 따라/ 눈물에서 태어난 보석아 / 버들잎 방울방울 초록의 아픔으로 / 남몰래 떨어지는 / 눈물방울아 / 마른 땅을 적시는 / 영원한 강물아>

 

       이 시는 딸가진 엄마라면 누구라도 똑같은 심정일 수 밖에 없는 엄마의 마음이 눈물겹게 나타나 있다. 왜 딸이라는 단어 앞에서는 눈물이 고이는 걸까. 이 사회가 남성을 위한 사회라서가 아니다. 뭔가 더 해주고 싶은데 더 못 해주었기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사랑일 수도 있고 물질일 수도 있고 또한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무엇보다 여자에 대해 여자만이 느끼는 여자의 삶이 못내 못 미더운 무엇이 있기 때문일 게다.

 

           이 시는 4연으로 짧게, 그리고 간략하게 씌어 있다. 말의 절제와 비움을 일부러 노력한 흔적도 없다. 시적 화자의 대상이 딸이라는 의미로 쓰여진만큼 감상으로 깊이 파고들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던 거다. 한 마디로 말한다면 그 어느 단어로라도 딸이라는 그 아름답고 깊은 존재의 의미를 나타낼 수가 없을 것이다.  이 시는 어느 대목이 특별히 인상이 깊은 곳은 없지만 전체적인 흐름이 그냥 단순하고 깊고 눈결겹다.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엽기적인 혹은 환상성의 이미지가 전혀 없이 서정적이고 감성적으로 모성의 근원적인 면을 드러낸 작품이라서 아마도 많은 엄마들의 공감을 샀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든다.

 

 

 

 

 

 

 

4. 퇴근시간

 

 

 

 

저녁 현관문이 열리고 결혼이 들어온다

추위와 무더위 속에서도 굳건한 고려와 조선과

일렬횡대의 전주 이씨 족보가

든든한 서방님이 들아오신다

신사임당이 어우동에게

숨기고 나가 있으라 눈짓한다

신사임당이 소매를 걷고 부엌으로 들어간다

풋고추 도마 위에 난도질하여 찌개를 끓인다

우리의 하늘이 전쟁터에서

오늘도 무사히 돌아오셨다

몇 가지 전리품을 챙겨 넣었는지

그의 어깨가 유난히 무거워 보인다

조요로운 가화만사성 속에

찌개가 요동을 치면 끓어 넘친다

신사임당의 행복이 청국장처럼 보글보글 끓는다

어우동이 저만치

코를 막고 물러서 있다

 

 

 

 

 



               대단히 한국적인, 한국의 가부장적인 집안의 내력과 아내의 역할을 잘 그려낸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남편의 밥을 책임지고 있는 아내라는 역할, 돈벌이를 하는 남편은 말 할 것도 없고 가만히 서만 있어도 다북다북 끼니를 챙겨서 올려야 하는 건 대한민국의 아내라는 이름에 해당하는 자는 무조건으로 해야할 일이다. 온전히 남편 밑에서만 지탱되었던 아내들. 우리의 아내들은 피말리는 경쟁의 전쟁터에서 오늘도 무사히 돌아온 남편을 잘 챙겨 먹이고 잘 재워서 다음날 아침 전쟁터로 다시 내보내야 할 의무와 책임을 가지고 이땅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요즘은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가 많아지면서 남성중심의 사회가 조금씩 달라져 가고 있다. 고학력 워킹맘이 증가하면서 여성의 가치가 올라가고 능력에 따라 위치가 달라지자 대신 남성이 밥상을 차리는 현상이 늘어나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한국문화는 뿌리 깊게 남아 있어서 아니, 남자와 여자는 그 역활이 뚜렷하게 달라서 태초의 그 기원의 역사을 거스리기는 어려울 것 같다

 

           오늘도 우리의 하늘이 무사히 돌아오셨다는 구절이 진부한 표현 같으면서도 새롭다. 어릴 때 버스를 타면 오늘도 무사히라는 글과 함께 한 소녀가 두손 모으고 기도하고 있는 액자가 운전석 옆에 항상 걸려 있었다. 그 당시에는 버스마다 똑같은 글귀가 걸려 있어서 어린 나는 버스가 세상에서 제일 위험한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집 안이 아닌 바깥 세상은 모든 것이 다 위험투성인데 그때는 몰랐다. “오늘도 무사히 돌아오셨다는 말은 어찌보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존재해야할 우리들의 단어가 아닌가 싶다

 

.          그 옛날 열 집에서 한 서너 집은 가화만사성이 걸려있던 그 시절 나는 정숙한 아내가 되기 위해 잘 자라고 있었고 지금은 한 사람의 아내가 되어 오늘도 무사히 돌아온 남편에게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를 올려놓는 아내가 되어 있다. 굳건한 조선의 족보를 달고 근엄하게 유세하는 서방님이 아닌 현대문명에 조화를 맞춘 남편의 아내로….. 결국은 신사임당의 행복한 아내로…..

 

 

 

 

 

 

 5. 회오리 꽃

 

 

 

나는 좀 미쳤나 보다

꽃 속으로 들어가 꽃이 되고 싶다

꽃 속으로 들어가 대낮이 되었다가

순간에 격렬하게 시들고 싶다

 

방금 건져 올린 햇살 속

물고기 비늘 싱싱한 몸짓

허망을 향해 파르르 항거하는

꽃 속에서 까맣게 웃고 싶다

 

꽂 속으로 들어가 꽃이 되고 싶다

찬란한 개화가 되고 싶다

허공에 닿자마자 변질의 냄새를 풍기는

한 떨기 입술

시시각각 상처가 빛을 뿜는

가뭇없는 회오리가 되고 싶다

 

 

 

 

 

 

              회오리 꽃이 어떤 꽃인지 인터넷을 뒤져보았다. 꽃잎 끝이 약간 휘어져 올라간 선이 마치 회오리 바람처럼 생겼다. 화자는 회오리꽃이 되고 싶다고 했다. 굳이 꽃 속에 들어가고 싶다면, 나라면 쑥부쟁이나 구월초 또는 들국화 속에 들어갈 텐데 왜 하필이면 회오리 꽂 속에 들어가고 싶다고 한걸까. 그러고 보면 이 시를 쓸 즈음에 시인은 시마에게 좀 홀린 상태에 있었나 보다. 맨정신으로는 어지러워서 회오리치는 회오리 꽃 속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는 걸 알텐데도 이런 글을 썼으니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시인은 무엇보다 격렬하게 시들고 싶다고 했다. 회오리 꽃이 아니고선 격렬하게 시들수 있는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격렬하게 지고 싶은 욕망.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강렬하게 만들었을까. 단지 시들어 가는 꽃이 추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나이가 들면 문득문득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 꼭 장례식을 가지 않더라도 곳곳에서 죽음을 떠올리게 되고 죽음애 대해 생각하는 횟수가 많아진다. 아무래도 나이가 그 쪽으로 더 가까워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우리집에서 한 블락쯤 가다 보면 집 가장자리를 빙둘러 동백꽃이 심어져 있는 집을 볼 수 있다. 몇년 전 까지만 해도 댕강 떨어져 있는 꽃송이들을 보면 동백꽃이니까 하고 무심히 지나쳤다. 요즘은 죽음을 한번 만져보고 지나간다. 그러면서 나도 추하게 시들지 말고 그나마 조금은 싱싱할 때 이렇게 뚝 떨어져 버리면 좋겠다 하고 생각한다. 어쩌면 모든 나이든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시적화자는 꽃 속에 들어가 꽃이 된 후 가뭇없는 회오리가 되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 말하자면 꽃이라는 사물을 감각적인 이미지로 내세워 감정을 집어넣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시각적 이미지에 그치지 않고 꽃이 되어 결국은 만개할 때 죽고 싶다는 뜻인 것이다. 이런 문장을 보면 문정희 시는 좀 천진스러운 면도 있다. 아마 그래서 그녀의 시가 사람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가는 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순수한 천연덕스러움은 대책 없는 상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이를테면. 꽃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것은 어린아이와 같은 시적 상상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는 자기의 존재성을 상상을 통해 자기만의 어떤 공간을 확보하여 죽음을 받아들이고 싶은 아주 발랄한 상상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6, 아줌마

 

 

 

허공으로 뻗친 팽나무의 힘으로

어느 노을인들 감아올리지 못하리

꼬불거리는 파마머리 둔중한 허리로 늘 뒷줄에 서서

속으로 비명을 녹이다가

할 수 없이 차지한 펑퍼짐한 그늘

염치도 예의도 교양도 버리니

고무줄 바지처럼 편하고 뻔뻔한 오후

 

 

내 손으로 다려 입힌 흰 와이셔츠와 넥타이들이 만든

문밖은 늘 전쟁터요 뻘 같은 장터여서

달팽이처럼 집과 새끼들 송두리째 머리에 이고

막무가내 두 팔 휘젖고 걸어가느니

당신이 어찌 알까

6.25 5.16….88대교 빨리빨리 건너고 건너

이 땅에는 남자와 여자 그리고 아줌마라는

또 하나의 종족이 있다는 것을

 

 

 

 

 

 

 

                   대한민국 아줌마는 위대하다. 우리나라의 경제를 책임졌던 아줌마들이 뒤에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은 이렇게 많은 것을 이뤄낼 수 있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어릴 적 울엄마는 날보고 버들강아지처럼 순한 딸이라고, 저리 물러서 어떡하나 하는 말을 귀가 닳도록 듣고 살았다. 그 순하고 물러터진 나는 딸을 셋 낳고부터 무쇠같은 아줌마로 변했다. 자식과 남편을 위해서라면 내 몸 하나쯤 부서져도 아무 상관이 없었다. 자식 입에 한 번 더 넣으려고 안 먹고, 학비 대느라 속옷 기워 입어가며 살아왔다. 하긴 얼마 전 모임에서 양말을 꿰매 신는다고 했더니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무슨 외계인 보듯 나를 쳐다 보아서 내가 더 놀란 적도 있다. 생판 모르는 미국까지 와서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맥시칸 동네에다 가게를 차려놓고 울고불고 장사도 해봤다. 몇 년 장사하면서 느낀 건 멕시코 여성들은 우리나라 여성들처럼 가족을 위해 그렇게 애타게 헌신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자식보다 항상 자신를 먼저 챙겼고 또 남편보다 먼저 유희(遊戱)를 즐겼다. 우리네처럼 자식이라면 죽을 똥 살 똥 모르고 덤비는 성정이 아니었고 우리네처럼 남편을 위해 종종걸음으로 마음 졸이는 그런 사랑이 아니었다.  툭하면 다른남자 품에 안겨 재미지게 노는 그런 류의 여성들이었다. 나는 지금 내가 대한민국의 아줌마란 걸 다시 한 번 자랑스럽게 느끼고 있다.

 

 

 

 

 

 

아줌마라 불리는 여자

                                             정국희

 

 

오랜만에 머리

늦가을 나무처럼 듬성듬성한 정수리

자존심으로 세워 놓고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이세요"하는

관에서 허가한 거짓말을

올올이 마음에 담고

하늘 밑을 활보한다

 

안에 애기를 키워 내놓은 여자

그래도 아직 예쁜여자

낭창낭창한 햇빛 끌어 당겨

스물 봄날에 정지시키고

코스모스 제철이라고 하늘대는

고색창연한 건물옆을

저도 하늘대고 걸어간다

 

오만 치다꺼리로 감나무 표피를 닮아가는

두루뭉실한

한 때는 이효리 저리가라 쎅시했다면

누가 믿을까

운명적 끌림이라면

일생을 내던질 잉걸불

아직도 가슴에 남아 있는데

누가 나를 아줌마라 하는가

 

기껏 콧대 세우고 한들한들 걸어간

고작 수산시장

식구들 저녁꺼리로 접시 급히 떠서

종종걸음 치는 집밖에는 없는 여자

반주로 쐬주 알딸딸 걸칠 여자

그래, 아줌마라 불러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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