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연습에 대한 욕망의 삼각형

                                                                                                                                               정국희

                                                                                                                                                            

 

 

 

      우리는 모두 무언가를 욕망하므로 살아가고 있다. 사람이기 때문이다. 만약 욕망이 없다면 그건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라 하겠다. 그래서 모든 소설 속의 인물들은 사회구조의 조화로서 필연적으로 욕망의 구조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문학사회학의 사전적 정의를 하기에 가장 기본적이고 대표적인 두 가지 이론 중 하나가 르네지라르의 욕망의 삼각형이라고 한다. 르네지라르는 그의 소설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 이라는 책에서 현대 소설의 주인공들의 욕망 체계를 설명하였는데 그의 의하면,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부터 스탕달의 <적과 흑>,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비롯한 많은 소설에서 주인공들은 대상을 소요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 소설 속의 인물들이 대상을 직접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중개자의 암시를 통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한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 욕망의 구조를 밝혀내는 데 목적을 두었다고 하겠다. 욕망의 삼각형에는 여러 가지 유형이 있지만 두 종류로 나누어 본다면 외면적 간접화와 내면적 간접화로 나눌 수가 있다. 이를테면, 주체와 중개자 사이에 경쟁관계가 없는 경우를 외면적 간접화라고 하고 주체와 중개자 사이에 경쟁관계가 성립되는 경우를 내면적 간접화라고 지라르는 설명했다. 그 내용을 김승옥의 생명연습에 비교하여 분석하면 이렇다.

 

                이 소설에서는 욕망의 삼각형을 논하기가 좀 애매하다. 왜냐하면 지라르가 연구한 욕망의 삼각형은 주로 남녀 간의 사랑에서 비롯된 삼각관계를 예로 들었는데 생명연습은 가족 간의 갈등을 다룬 내용이기 때문이다. 하긴 꼭 욕망의 삼각형이 아니더라도 사회성의 구조변화에 따라 문학작품의 구조가 일치하는 상동성(Homology)을 찾아내는 방식으로 적용해도 되겠다. 따지고 보면 욕망의 삼각형이 들어가지 않은 소설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므로 거의 모든 것이 다 욕망에서 시작하여 욕망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은 중개자를 통한 암시를 받던가 아니면 직선적인 욕망을 받든가 또는 모방을 함으로써 어떻게든 욕망을 갖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생명연습에 나오는 주인공인 나와 어머니와 그리고 형과 누나 이 네 사람은 서로간의 욕망의 삼각형이 성립이 안 돼는 사이면서 되는 사이다. 그들은 한 가족으로서 서로가 경쟁관계의 대상은 아니다. , 서로를 매개자로 하여 얻어내야 할 아무런 명분이 없다. 모방의식이 없기 때문에 라이벌 의식의 욕망 구조는 아니지만 소설적 텍스트로서의 동질성으로 욕망의 삼각형을 분석 비교해 보면 이렇다.

 

              첫째, 형은 어머니를 죽여야 되겠다는 욕망을 품는다. 그것은 자연발생적으로 볼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욕망을 가지기 이전에 이미 어머니에 대한 부도덕한 면을 보았고 거기에서 오는 모멸감 내지는 분노가 어머니를 죽이는 일만이 가치 있는 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어머니의 문란한 남자관계에서 나온 결과이기 때문에 이런 현상은 매개된 욕망이긴 하지만 경쟁상대가 아니고 오히려 분노의 대상이라고 하는 게 옳다. 그렇다면 주체자인 형과 경쟁자인 남자는 원수 같은 관계다. 내면적 간접화가 성립 되었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형에게 남자들은 어머니를 죽이게 하는 마음을 품게 하는 매개자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중개자를 통해서 어떤 암시를 받게 되는 형태다. 또 다른 한편으로 보자면, 이 관계는 이성과의 관계에 속하는 삼각관계도 아니고 타인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는 것도 아니며 골드만이 주장한 숨은 신에 의한 화폐의 가치로도 나눌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이런 경우는 본질적인 본능을 거부하므로 형이상학적 욕망으로 표현해야 한다. 형이상학적 욕망은 타인과 자신과의 어떤 관계를 삼각형의 욕망구조에 편입시켜놓고 본질적인 것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둘째, 어머니의 입장에서 보면 또 다른 형태의 욕망의 삼각형이 나타난다. 즉 어머니는 아버지가 그리워서 아버지를 닮은 남자를 욕망하게 된다. 이를테면 어머니는 주체자가 되어 대상으로 아버지를 욕망한다. 그래서 아버지를 느끼기 위해 아버지와 닮은 남자들을 욕망의 대상으로 삼아 아버지께 다가가는 도구, 즉 중개자로 이용한다. 수직적 초월은 될 수가 없다. 아버지는 세상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매개자는 전혀 라이벌 의식이 없는 관계다. 이런 경우는 경쟁적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은 외면적 간접화가 된다. 이를테면 대상으로 가기위해 매개자를 이용하는 욕망의 관계라고 해야 옳을 것 같다. 그래서 주체자가 대상을 직접적으로 욕망하는 것이 진정한 욕망이라면 이것은 지라르가 생각하는 근대 이전의 욕망이다. 주체자가 중개자를 통해 대상을 간접적으로 욕망하게 되는 것을 욕망 혹은 가짜 욕망이라 한다. 이런 식으로 따지자면 근대에 행해지고 있는 거의 모든 욕망은, 이를테면 욕망의 근원이라고 하는 것들은 전부 가짜다 라고 하는 골드만의 논의 속에 들어가는 이야기가 되겠다.

 

             셋째, 우리(나와 누나)와 형 그리고 어머니는 다시 삼각관계로 나누어질 수가 있다. 어머니를 죽이고자 하는 형을 우리는 또 죽이고자 했다. 우리는 형보다 어머니가 더 가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형을 먼저 죽여야겠다고 생각한다. 여기서는 중개자를 통해 암시를 받고 갖게 되는 경우에 속한다. 물론 스스로 죽었지만 대상을 지키기 위해 경쟁자를 없애려고 하는 또 다른 모순된 삼각형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한교수와 정순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을 꼭 욕망의 삼각형 이론에 대입시킨다면 또한 이런 구조로 나올 수 있다. 둘이는 서로 사랑했지만 런던 유학을 계획하고 있는 한 교수한테는 정순이가 풀기 힘든 하나의 굴레로 압박해 온다. 동갑인 정순은 결혼 하고픈 상대였지만 결혼은 할 수가 없었다. 학업을 끝내고 올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정순의 부모는 바로 결혼을 시키고 싶어 했으며 외국엔 더 이상 나가 있는 것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교수는 고민 끝에 저절로 정순을 싫증나게 할 수 있는 도모를 꾸민다. 자기가 욕망하는 욕망으로 가기 위해서는 걸림돌이 되는 매개자를 제거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는 대상인 그녀를 싸구려로 느껴지게 하여 더 이상 매혹되거나 사랑하고픈 욕망이 사라져 버리도록 천하게 만들어 버리는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이렇게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에서는 모든 구조가 삼각관계에 성립이 되도록 되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다못해 나 혼자 살아간다 해도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혼자서 해결하면서 살지 못하게 사회구조가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내가 개인적으로 생각했을 때는 별로 가치가 없어도 남들 모두가 가치 있다고 하면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가치는 화폐로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근본에는 반드시 가치가 있는 대상이 있고 그 가치에 따라 결정해야할 순서가 있는 것이다.

 

 

 

 

 

 

                                                          무진기행에 대한 욕망의 삼각형 분석

 

 

 

 

           주인공 나는 어머니 무덤이 있고 젊은 날의 추억이 있는 고향, 무진에 온다. 나는 나의 삶이 뭔가 안 풀린다든가 혹은 새 출발이 필요할 때면 일탈의 공간으로 무진으로 내려오곤 한다. 이번에는 아내와 장인의 권유로 잠시 바람을 쏘이러 왔다. 처가에서 운영하는 회사의 주주총회에서 나를 승진시키기 위해 아내와 장인이 베푼 배려다. 후배인 박이 내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다음 날, 나는 세무서장이 된 동창생 조의 집에 초대된다. 거기에서 후배인 박을 만나고 그리고, 무진중학교 음악선생인 하인숙을 처음 만난다. 내 후배인 박은 하인숙을 좋아하여 연애편지를 보내기도 하지만 하인숙은 그 편지를 세무서장에게 보여주며 관심 없음을 표시한다.

 

           여기에서 조와 박과 그리고 하인숙 이렇게 세명은 삼각형 구조 속에 들어와 있는 형태다. 박은 주체자로서 원하는 대상이 하인숙이다. 그러나 그 옆에는 막강한 경쟁자 조가 버티고 있다. 박은 타인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는 경우가 되겠다. 이 대립은 극복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주체자가 중개자를 통해 대상을 간접적으로 욕망하게 되는 것을 간접화된 욕망 혹은 가짜 욕망이라고 한다면 근대에 행해지고 있는 모든 욕망들은 골드만의 삼각형 이론을 통한 삼각형의 욕망구조에 성립된다.

 

           또 한편으로 조의 입장에서 비교해 본다면 조는 자신이 고시에 합격했으므로 하인숙보다는 경제적으로 더 여유 있는 배우자를 원한다. 하인숙은 똑똑하지만 집안이 너무 가난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조는 대상을 직접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세무서장이라는 직책을 매개로 하여 좋은 집안의 여자를 대상으로 세우는 간접화된 욕망이라 하겠다. 우리는 어떤 대상을 자발적으로 욕망한다고 믿고 있지만 그것은 낭만적 거짓에 불과하다는 이론이다.

 

           하인숙과 나의 관계는 경쟁관계가 성립되지 않는 외면적 간접화로서 서로 욕망하는 일대일의 관계다. 이를테면 우리 둘은 서로가 가지고 싶다는 욕망이 자연스럽게 생겨나서 진행이 된 자연발생적인 욕망이다. 나는 하인숙의 모습에서 과거의 고뇌하던 나의모습을 본다, 다시 말하면, 미칠 것 같았던 무진에서의 옛날 나의 모습과 현재의 그녀의 모습이 너무 닮아서 이끌리게 된다. 우리 둘은 마치 서로가 간절히 원하고 있었던 것처럼 바닷가 어느 어둑한 방에서 사랑을 나누게 되고 하인숙은 나에게 자기를 서울로 데려가 달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하인숙은 불가능하다는 걸 또한 스스로 깨닫는다. 나에게 아내가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체자가 대상을 직접적으로 욕망하는 것이 진정한 욕망이라면 이것은 지라르가 생각하는 근대 이전의 욕망이이라고 하겠다.

 

           나는 하인숙에게 서울에서 함께 살면 행복할 것이라고 편지에 썼지만 아내의 전보를 받는 즉시 편지를 찢어버린다. 그리고 나는 몽환에서 빠져나오듯 서울을 향해 도망치듯 무진을 빠져나온다. 이를테면 현실을 받아들이며 나의 정체성을 깨닫고 안정된 삶을 선택한 것이다. 여기에서 욕망의 삼각관계로 분석하게 된다면, 하인숙은 나를 통해서 서울을 오려고 한다. 나를 매개자로 삼아 대상인 서울로 와서 살기를 원한다. 여기서 매개자인 나는 그녀와 경쟁관계가 아닌 본질적으로 사랑하는 관계였다. 그리고 매개되어 있지 않은 욕망의 경우에는 내가 겪어보지도 못했고 보지도 못해서 심지어 어떤 것들이 눈앞에 나타난다 해도 무슨 현상인지 알아볼 수 없게 되어있다.

 

           지라르에 따르면 삼각형의 욕망이란 우리 모두가 앓고 있는 형이상학적 질환에 속한다고 했다. 이 증상은 자각증세가 없기 때문에 우리가 형이상학적 질환에서 치유될 희망이 보이지 않아서 지라르는 낭만적 진실을 폭로하고 삼각형의 소설적 진실을 드러내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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