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인숙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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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집 여인 < S.F 문학 2호 >

2004.08.25 08:55

그레이스 조회 수:357 추천:38


가게집 여인


             홍인숙(Grace)



(1)

유리 속 조그만 세상
사람들이 드나든다
바람이 드나든다

물건을 판다
손님들은 정가보다 더 싸게 지불하고
덤으로 여인의 자존심까지 챙기고 떠난다

바람불어 휴지가 날리는 날
바겐세일 바지자락이 너풀거린다
여인의 빈 가슴이 너풀거린다



(2)

만국기로 걸려있는 색깔들
새소리로 날아드는 언어들
피부색이 다른 얼굴, 얼굴
작은 우주
올림픽 한 마당이 벌어지고 있다

마이클 볼턴의 허스키가 경기를 알리면
색깔이 돌고, 언어가 돌고, 사람들이 돈다

햇살 하나 댕그렁 부딪힌 유리가게 안
동양에서 온 가게집 여인만이
박제된 동물처럼 서 있을 뿐이다
간 밤, 설친 눈을 껌벅이며 서 있을 뿐이다



(3)

늙어 간다는 것은 쓸쓸한 일이다
젊음의 뒤켠으로 소리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 파란 눈의 노파. 이십 불을 내고 오십 불을 냈노라 고집하던 날
                그녀의 늙음이 애처로워 가게집 여인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봄볕이 하얗게 노파의 모습을 사위어 갈 즈음 다시 찾아온 그녀.
                그 날 자기 방에서 오십 불짜리 지폐를 찾았노라며 덥석 손을 잡고
                눈물을 글썽인다. "I am sorry" "I am sorry"
                미안함이 검버섯 가득 얼굴 위로 자글자글 번져난다.
                금세 손끝에 따스함이 강물로 흐른다.


늙어 간다는 것은 더 이상 감출 것이 없어 좋은 것이다
젊음의 뒤켠으로 홀로 늙어 간다는 것
가슴 가득 진주를 쌓아놓고 하나, 둘 나누어 주다
어느 한 날 텅 빈손을 흔들며 작별하는 것

가게집 여인은 또 몇 밤을 지새우리라
사는 게 허무한 것만은 아니라고
눈물을 글썽이며--


( 1997년 샌프란시스코 문학 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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