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인숙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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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의 선택 < 크리스챤 타임즈 >

2004.08.23 02:24

홍인숙(Grace) 조회 수:403 추천:51



                                 최선의 선택


                                                                                                      홍인숙(Grace)
                                
  

갓 삼십이 넘은 나이에 거의 매일 죽음을 생각한 적이 있었다.
따스한 햇살이 봄을 속삭여도 슬프기만 하였고 도란도란 두 아이의 노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생각은 쉴새
없이 생과 사를 넘나들고 있었다.

결혼 후, 급격한 변화에 채 적응되기도 전에 미국 행 비행기를 탔다. 70년대의 이민생활이 다 그렇듯 고
국에서도 안 해보던 직장 생활, 그것도 단순노동을 하면서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막무가내 흐르는 인생에
당황해 하며 결혼생활, 이민생활의 꿈을 하나, 둘 잃어갔다.
이민 온지 얼마 안되어 받은 큰 수술과, 수술 후 채 회복되기도 전에 한 두 번의 임신, 아이들을 키우면
서 기쁨을 느낄 사이도 없이 난 지독한 요통에 시달려야 했고, 그때부터 수년을 그 고통 사이에서 지내면
서 몸과 마음이 점점 황폐해져 갔다.
단절된 생활. 내 몸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괴로움. 그뿐인가. 시댁 분들에 대한 죄송함, 남편에게로
향하는 눈치보기,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엄마 노릇도 못하는 무력함 등이 더 집요하게 나를 절망의 늪으로
몰아 붙이고 있었다. 그만 쉬고 싶었다.

남편이 출근을 하자마자 욕조 가득 더운물을 받았다, 허리 통증을 완화시키려 자주 좌욕을 하던 터라 집
에와 계시던 친정어머니도 별로 신경을 안 쓰실 것을 이미 계산해 둔 터였다. 금세 욕탕은 수증기로 가득
찼고 생각대로 더운물에 불운 팔목에는 굵게 혈관이 돌출 되어있었다. 잠시 후면 끝난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평온해졌다.
그때 갑자기 망막 위로 울부짖는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그것은 남편의 얼굴도 아니었고, 사랑하는 아이
들의 얼굴도 아니었다.
외동딸을 곱게 길러 출가시켜 미국으로 떠나 보낸 뒤, 딸이 좋아하던 음식들은 상에도 못 올리게 하시고
눈물로 지새셨다 던 어머니, 그 딸이 타국에서 몸을 못쓰고 있다는 소식에 남은 가족들을 제쳐 두고 달려
와 긴 세월 딸 간호하고, 어린 손자 시중들다 그만 불법 체류 자가 되어 버린 어머니.
딸의 고통 앞에서 마음 놓고 고국의 남편과 아들을 그리워하지도 못한 불쌍한 나의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이역 만리까지 오셔서 자식을 앞세워 보내고 통곡할 어머니를 생각하니 갑자기 뜨거운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다.

"하나님 어찌하면 좋을까요.  오! 하나님. 도와주세요".
하나님은 그분의 섭리를 어기려했던 나의 어리석음을 탓하지 않으시고 참으로 다정히 나를 감싸주시며 나
의 절박한 마음을 당신에게 맡기는 선택을 요구하셨다.
난 주저 없이 그분에게 남은 생을 맡기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날부터 거르지 않고 가정예배를 드리며 감
사함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생각해보니 내게도 감사할 조건이 참으로 많이 있었다.
긴 병상의 아내를 한 번도 불평 없이 대해주던 남편, 건강하게 자라 준 두 아이들, 몸이 부실한 며느리를
무던히도 걱정해 주시고 사랑으로 대해 주신 시어머님과 시댁 분들.
내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싹트고 감사가 넘치면서 나는 조금씩 밝아지고 건강해질 수 있었다.

그 때의 어린아이들이 이제 대학생과 고등학생이 된 오늘, 난 크게 무리하지 않으면 거의 정상적인 생활
을 할 수 있게까지 되었다.
이미 고인이 되시어 이 땅에 묻히신 나의 어머니, 그분은 아시리라. 그 때의 나의 선택이 최선의 선택이
었다는 것을.
사랑하는 어머니.


                (1999년 크리스챤 타임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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