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인숙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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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




설 휴가를 도고온천과 추사고택 그리고 안면도에서



                                     함동진




▶도고를 향하여

제1일(2월8일), 난생 처음으로 모든 것을 훌훌 털고  휴가 겸 설을 외유로 보내기는 처음이다.
70줄을 바라다보는 친지 세 쌍 부부가 함께 동행하여 여행을 떠났다.  25인승 중형버스를 소유한 N씨가 친히 손수 운전하여 차량을 제공함으로 우리들은 더할 나위 없이 친목이 돈독함을 확인하면서 즐겁고 유쾌한 2박3일의 여행을 하게 되었다. 행복한 휴가다.
부인들은 음식이며 간식을 넉넉히 준비하여 알뜰함마저 갖춘 실속 있는 경제적 여행이다.
우리들은 오전 9:30분에 수원을 출발하여 화성, 오산, 평택, 반복하여 가든 길을 되 오르내리면서, 또는 남부경기지역을 가로로 세로로 누비면서 드라이브여행도 겸하였다.  
도고와는 반대쪽인 아산방조제로 들어가 제방 위에 올라서서 호수와 바다를 번갈아 보며 모처럼 탁 트인 자연으로부터 불어오는 신선한 산소를 마음 것 들여 마셨다.  청둥오리를 비롯한 철새들의 재롱스런 물놀이와 자맥질을 바라다보면서 환희에 젖어들기도 하였다.
아산방조제의 북쪽으로 끝까지 들어갔다가 남쪽으로 되돌려 나와 도고로 향하였다. 다시 천안 아산 등지를 가로로 세로로 누비며 드라이브하였다.
도중 추사 김 선생의 고택에 들러 옛 선비의 소중한 역사고적을 음미하는 뜻 깊은 시간도 가졌다.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선생의 고택에서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799-2에 소재한 김정희선생 유적지는 18,308㎡의 면적를 점유하고 있으며 충청남도지정 제24호(1980. 10. 23.) 기념물로 되어있다.
  이는 추사고택(秋史故宅)을 중심으로한 문화유적이 산재한 일대를 말한다. 고택을 중심으로 오른쪽으로는 화순옹주(和順翁主)와 부군인 월성위 김한신(月城尉 金漢藎)의 합장묘가 있고 그 옆으로는 정조대왕(正祖大王)이 내린 화순옹주열녀정문(和順翁主烈女旌門)이 있다.    또 그 옆으로는 천연기념물 제106호인 예산의 백송(白松)이 있고 화순옹주 정려 뒤편으로는 추사의 고조 김흥경의 묘가 있다.  좌측으로는 추사의 묘가 있고 뒤편으로는 화암사(華巖寺)라는 사찰이 있다.  추사고택(秋史故宅)은 약 260㎡에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문간채와 사랑채로 이루어져 있는 옛 가옥으로 중부지방과 영남지방에 분포되어 있는 “대갓집”형으로 되어 있는데 사랑채는 바깥 솟을대문을 들어선 마당에 자리잡고 있는 형식의 집이다.
화암사는 추사의 수도장이었는데 추사는 불교에도 심취하였었고 헌종 12년(1846년) 제주도에서 문중에 서한을 보내어 중건을 지시한 사실도 있다.  이곳에는 추사 선생이 쓴 <무량수각(無量壽閣)>, <시경루(時境樓)> 등의 편액이 있으며 추사선생의 묘와 오석산(鳥石山) 암벽에는 친필을 새긴 석각(石刻)등이 있어,  조선왕조 후기의 사상가요, 정치가이며 예술가였던 추사고택 일대에는  김정희 선생의 자취로 가득 차 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의 고택
   김정희선생 고택은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799-2에 소재하며  충남도지정 유형문화재 제43호(1976. 1. 8.)로 지정되어 있다.
이 고택은  원래는 서울 장동(壯洞현=재 통의동)에 위치하였으나 집이 너무 크다하여 월성궁 간신들이 영조 대왕께 상소하여 현재의 신암으로 장동에 있던 집을 추사의 증조부이신 월성위 김한신께서 뜯어다가 53칸(80.5평의 규모)의 집으로 건립한 것이다.  이는 조선후기의 대표적 실학자이며 서예가이도한 추사 김정희(1786-1856)선생의 고택으로,  안채, 사랑채, 문간채가 있다. 안채에는 6간 대청과 2간통의 안방과 건넌방이 있고, 부엌과 안대문 협문광 등을 갖춘 口자형 가옥이다. 안방과 건넌방에는 각각 툇마루가 있고 부엌 천장은 다락으로 되어 있으며 안방과 건넌방 사이의 대청은 그리 흔하지 않은 규모이다. 이러한 口자형 가옥은 중부지방과 영남지방에 분포되어 있는 이른바「대갓집」형의 가옥이다.
  사랑채는 남쪽에 한 칸, 동쪽에 두 칸의 온돌방이 있고 나머지는 모두 대청과 마루로 되어 있다. 원래 안채와 사랑채는 엄격히 구분되어야 하는 것이 조선시대 가옥 관념이었다. 이는 유교적 윤리관념에 근거한 것이다. 사랑채의 댓돌 앞에는 석년(石年)이라 각자된 석주가 있다. 이 석주는 그림자를 이용하여 시간을 측정하는 해시계로 추사가 직접 제작하였다고 한다.
* 추사 고택의 특징
  이 가옥은 동쪽에 사랑채, 서쪽에는 안채를 배치하되 안채 대청의 방향은 다른 고택과 달리 동향을 하였고 사랑채는 남향을 하고 있으며 사랑채는 ㄱ자로 되어있어 별당채와 같은 성격을 띄고 있으며 각방의 전면에는 툇마루가 있고, 지붕은 긴 홑처마에 팔각지붕으로 지형에 따라 기단의 높낮이가 생긴 곳에서는 맞배지붕으로 층을 지게 처리하였다. 사랑채의 함실 부분에도 맞배지붕에 이어 붙인 지붕으로 기능적으로 처리하였다.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6.3.-1856.10.10.)
    추사 김정희 선생은 1786년 6월 3일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서 영조의 부마인 월성위 김한신(月城尉 金漢藎)의 증손이며 김노경(金魯敬)의 아들로 출생하여 백부인 김노영에게 입양되었다.
    추사는 조선왕조 후기의 실학자로서 대표적 서예가이며 병조참판과 성균관 대사성 벼슬에 올랐으나 당쟁에 휘말려 제주도와 함경도 북창에서 10여년간 유배생활을 지내다 말년에 생부 노경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과천에서 71세를 일기로 1856(철종7)년 10월 10일에 작고하였다.
   추사는 단순한 예술가에 그치지 않고 시대사조에 따른 구문화체계를 벗어나 신지식의 선구자로서 새로운 학문과 사상을 체득하여 신문화전개에 앞장선 실학의 선각자였다.
   추사는 북학파의 거벽(巨擘)으로 청조의 고증학풍(淸朝 考證學風)을 받아들여 경학(經學), 금석학(金石學), 문자학(文字學), 사학(史學), 지리학(地理學), 천문학(天文學) 등에 이르기까지 박통(博通)하였다.
이로서 북한산 기슭의 비석이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新羅振興王巡狩碑)임을 고증하였다.
  저서로는 완당집(阮堂集), 예당금석과안록(禮堂金石過眼綠),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 완당척독(阮堂尺牘), 담연재시집(覃 齋詩集) 등이 있다.
  서도로는 추사체라는 독자일문(獨者一門)을 열어 서예사상 지고의 경지를 이룩하였고, 묵란도(墨蘭圖), 묵죽도(墨竹圖)와 국보로 지정된 세한도(歲寒圖) 등의 작품들을 남겼다.
        
  ▷화순옹주(和順翁主)와 부군인 월성위 김한신(月城尉 金漢藎)의 합장묘
    영조의 차녀인 화순옹주 묘는 추사의 증조부이며 옹주의 부군이 되는 월성위 김한신 묘에 부좌합장( 左合葬)되어 잇는데 추사고택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다.

  ▷화순옹주열녀정문(和順翁主烈女旌門)
    순옹주와 부군인 월성위 김한신의 합장묘 옆에 정조대왕(正祖大王)이 내린 화순옹주열녀정문(和順翁主烈女旌門)이 있다. 정려문은 영조의 차녀이며 추사 김정희의 증조모가 되는 화순옹주의 정절을 기리고자 정조가 명정(命旌)한 열녀문이다.  화순옹주는 조선왕조에서 나온 유일한 열녀라고 전해지고 있다.  
    화순옹주는 부군 월성위 김한신(月城尉 金漢藎,1720∼1758)이 38세의 젊은 나이로 작고함으로 그때부터 식음을 전폐하고 부왕 영조(英祖)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부군을 따르고 말았다.  영조는 화순옹주의 정절을 기리면서도 부왕의 뜻을 저버린 데에 대한 아쉬움 때문에 열녀정문(烈女旌門)을 내리지 않았으나 후에 정조(正祖)가 명정하였다.    

  ▷예산의 백송(禮山白松)
    중국 북부지방이 원산지인 백송은 우리나라에는 몇 그루 없는 희귀수종(稀貴樹種)이다.
    이곳의 백송은 수령이 약 200년 되었고 높이가 약 10m이다.  추사가 25세 때에 청나라 연경(燕京)으로부터 귀국할 때에 가지고 와 고조부 김흥경의 묘 입구에 심었던 것으로 원래는 밑으로부터 세가지로 갈린 수형(樹型)이었으나  제일 큰 가지가 고사하였다고 전해진다.

  ▷추사의 묘(秋史墓)
     추사고댁의 좌측 평평한 구릉에 추사의 묘가 있다. 원래는 용궁리 왕자지(旺子池) 위에 있었는데 1937년 초배부인(初配夫人) 한산이씨 묘, 그리고 홍주 노은동의 계배부인(繼配夫人) 예안이씨 묘와 함께 이장하여 합장한 것이다.

  ▷화암사(華巖寺)
    화암사는 추사고댁의 뒤편에 위치한 사찰이다.  화암사의 창건 연대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삼국시대의 고찰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이곳은 추사의 증조부인 월성위 김한신이 조선 영조의 부마가 되었을 때에 별사전(別賜田)으로 분급된 일대의 전토(田土)에  포함되어 있어 그 일문(一門)에 세습되었다.
   1752(영조28)년에 월성위가 중하였으나 그 후 대웅전(大雄殿)은 소실되고 요사체(療舍體)만 남게 되었다.  
   추사는 이곳 오석산(烏石山) 화암사에서 불교에 정심(精深)하였고,  1846(헌종12)년에는 제주 적소(謫所)에서 문중에 서한을 보내어 화암사 중건을 지시한 사실이 전해진다.
   이곳 화암사에 추사의 친필인 [무량수각 無量壽閣], [시경 詩境樓] 편액(扁額)이 있으며, 화암사뒤편 오석산 암벽에 친필각자(親筆刻字) 한 [시경詩境], [소봉래小蓬萊], [천축고선생댁天竺古先生宅] 등의 유적이 있다.  

          
  ▶도고온천 [道高溫泉] 에서
  
도고온천은 충남 아산시 도고면 기곡리에 있는 온천이다. 나는 1980년 낚시를 하러 도고저수지에 다녀온 뒤로 오랜 23년 만에 도고 땅을 밟게 되어 감회가 새롭다.  
도고에 도착하여 기곡리 261-15에 소재한 [토비스콘도미니엄]에 2박의 숙소를 정하고 여장을 풀었다.  
이곳 도고온천은 신라 때부터 약수로 이름난 약알칼리성 유황천으로 수질이 좋아서 신경통, 피부병, 위장병, 안질 등에 효능이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도고온천은 예산에서 10 km, 온양역에서 홍성 방면 21번 국도에서 약 18km의 지점에 도고산을 등지고 인접하여 있고, 대부분의 온천탕이 평지에 자리하고 있다.
도고온천은 동양의 4대 유황온천 중 하나로 손꼽히며,  전설에 의하면  "신라시대에 안질을 앓고 있는 노부(老父)를 둔 효녀가 한겨울에 길을 가던 중 이상한 광경을 보았는데 학(鶴) 한 마리가 다리를 절며 맥없이 내려앉았다가 다시 힘차게 날아 올라감을 보고 기이하게 여겨 그곳에 다가가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눈이 녹아 있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라오는 것이었다. 효녀는  서둘러 그 물로 노부의 눈을 씻겨드려 치료해 나았다"는 전설이다.   이러한 전설과 함께 오랜 세월의 내력을 지닌  효험이 있는 특별한 온천이다.
도고의 오늘날과 같은 대중적인 온천 개발은 1921년 일본인 사금업자에 의해서 개발이 되었다고 한다.  도고온천지역은 기반이 화강암(花崗岩)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개발초기인 그때에는  굴착이 힘들어 지하 12 m 정도에서 겨우 물을 퍼 올렸다고 전해진다. 현재는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온천장인 원탕(元湯)의 경우에는 지하 22∼180 m의 8개 천공(泉孔)에서 물을 얻고 있으며, 용수량(湧水量)은 약 1,500 t, 수온은 26∼30 ℃로 낮기 때문에 가열하여 사용한다고 한다.     도고온천수룰 현대과학으로 분석한 결과 약알칼리, 약식염천에 속하는 유황천으로 밝혀졌으며, 마치 삶은 달걀이 약간 변질했을 때와 같은 냄새가 풍겨 나올 정도로 유황 함유량이 높은 것이 특징이다. 이 유황 냄새는 특히 여름보다 겨울에 더 강하게 난다.  그 이유는 기온이 낮은 추운 겨울에는 김이 많이 피어오르기 때문에 김에 유황냄새가 배어 오른 탓일 것이고,  반면에 더운 하절기에는 온탕이라 할지라도 김이 피어오르는 양이 미미하기 때문에 유황냄새를 덜 느끼게 된다고 필자는 생각해 본다.
도고온천의 주요성분은 수소이온 농도가 8.7%에 이르고 그밖에 규산, 나트륨, 칼슘 마그 네슘, 황산이온 등의 성분이 함유되어 있다. 오늘날에도 피부병과 류머티즘, 동맥경화증, 당뇨병, 만성기관 지염, 변비, 외상 후유증 등에 특효가  있다고 하여 외지로부터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오고 있다.  그리고 위장병에도 특효가 있어 먹을 수 있는 식천온천(食泉溫泉)으로도 이름나 있다.
여장을 푼 우리 일행은, 숙소인 [토비스콘도미니엄] 내에도 유황온천 사우나가 있으나 전문적인 온천장에서 온천욕을 즐기고자 인근의 [도고별장 스파피아]온천장으로 옮겼다.
이 도고별장 스파피아온천장은 그의 '별장'이라는 명칭과 같이 박정희 전대통령의 별장이었던 곳으로 특별한 유래와 사연을 지니고 있다.

  ▷ 故 박정희 대통령의 별장이었던 [도고별장 스파피아]온천장에서    
     우리들은 [도고별장 스파피아]에서 낯익은 사진을 배경으로 한 포스터를 요소요에 부착한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다름 아닌 故박정희 대통령 사진을 배경으로 한 포스터다, 나는 궁금하여 카운터의 여종업원에게 물었다. "저 포스터를 보고 항의하는 자들이 없느냐?" 고...  그리하였더니 뒤편에 점잖게 서있던 분이 다가와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그분께도 "저 포스터를 보고 항의하는 자들이 없느냐? 서울 같으면 그럴 사람들이 있을 법 한데..." 하고 재차 물었더니, "우리는 우리방식대로 영업을 하는데 누가 무어라 합니까?"라는 간단한 대답이었다. 속된말로 지금 여기저기서 '박정희 때리기' 운동이 일고있지 않는가? 그러기 때문에 안부가 궁굼하였던 것이다.  그분은 [도고별장 스파피아]를 운영하는 대표이사 이상복(代表理事 李相福) 씨였다.
사업에 분주하면서도 친절한 안내에 감사를 드린다.  

  ▷ 故 박정희 대통령의 도고별장
    [도고별장 스파피아]는  故박정희 대통령의 별장을 인수하여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대통령이 사용하시던 양질의 유황온천수를 직접 공급하는 건강랜드로 지난 3월 6일에 개장하였다고 한다.
   [도고별장 스파피아] 바로 곁에는 [故박정희 대통령의 도고별장]이  옛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데 [도고별장 스파피아]에서 온천욕을 한 고객들에게 원한다면 이를 개방하여 관람케 하고 있다.
   이 별장 내에는 침실, 거실, 서재, 사랑방, 전용사우나실, 경호원실, 식당, 기타 유품 등이 잘 보전되어 있고,  고 박정희 대통령의 생존시 활동상황의 사진과 가족사진들도 볼 수 있어 그분의 체취가 풍겨 나오는 듯하다. 다시금 눈부신 '고도경제성장'과 '한강의 기적'이 생생하게 기억되며 돌아보게 하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였다.
<도고별장 스파피아>홈페이지에서 들어가면  시중에 널리 알려진 [박정희 전 대통령의 눈물]이라는 기사를 볼 수 있다.
   본 기행문의 필자가 알고 있기로는, [대통령의 눈물]을 작성한 필자는 예비역장성 김유복(金遺腹·79)이었으나 육군사관학교생도교육용 <육사교장의 편지>로  육군사관학교의 김충배 교장이 2003년 11월 생도 교육에 사용해 그동안 <육사교장의 편지>로 시중에 알려지고 있기도 했었던 글이기도 하다.

  ▶ 안면도에도
  제2일(2월9일 설날), 일행은 안면도를 목적지로 하고 출발하였다.  도고 근처인 안면도로 가는 길가인  아산시 도고면 봉농리 576에 소재한 [세계꽃식물원]을 관람코자 들렸으나 설날이라 개장치 않아 헛걸음이 되었다. 이곳에서는 계절별로 각양각색의 꽃들로 이벤트 전시를 한다는데 관람치 못하여 아쉬움을 남겼다.
일행은 안면도 까지 무작정 가기로 하였다. 어제처럼 가로세로로 길을 누비며 드라이브를 하였다. 예산 홍성 서산 태안 등을 거치고 안면도에 이르기까지 신설되는 도로공사가 여기저기서 진행되고 있었고 기존 도로도 옛길과는 사뭇 다르게 확장하였다. 가는 곳마다 자연환경미화를 우선하여 아름답기까지 하였기에 오래 전에 다녀온 길이었지만 낯설었다.  만리포 해변에 들러 겨울바다를 관망하고 파도소리와 어울려 풍겨오는 갯내음을 마음 것 마시면서 그동안 폐에 고인 공해찌꺼기를 씻어 내었다.  그리고 날아오를 듯한 상쾌한 기분을 안겨주었기에 휴가 목적지로 이곳에 참으로 잘 왔구나 생각하면서 만족해하였다.
  이곳 만리포 해변(백사마을)백사장 앞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불리어지고 있는 애창가요 "똑딱선 기적 소리........만리포라 내사랑"이란 내용의 [만리포사랑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만리포에 이어서 천리포 백리포 꽃지 등 여러 해변을 돌고 나서 늦은 점심으로 방포해수욕장 포구에 있는 식당에서 생선회와 해산물 음식으로 식사를 하였다. 설날인데도 영업을 하여 천만다행이었다. 식사후 잘 꾸며놓은 방포해변공원을 산책하고 숙소인 도고의 [토비스콘도미니엄]으로 돌아왔다. 저녁식사시간은 너무나 이르고 하여 기분을 더 살리기 위해 숙소지하에 있는 노래방에 들렀다.  노래를 즐기는 동안 신노심불로身老心不老임을 확인하였다.
  제3일(2월10일), 우리들은 귀가 길의 혼잡을 예상하여 서둘러 오전 9시에 숙소를 첵크아웃하고 천혜의 자연, 수천 수만의 철새 떼들이 비상 활강하는 드넓은 천수만 들과  아산만방조제를 거쳐 수원으로 향하였다. 귀가 길에 소래포구에 들러 생선회와 어패류를 구입하였다. 이것으로 차량제공에 운전까지 손수 수고를 아끼지 아니한 N씨 댁에서 작별회심겸 점심을 함께 하였다. 즐겁고 보람 있는 여행이었다.      



2005. 2. 11.
깊은산골(장산)
함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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