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에세이

원로시인의 아리랑

by 홍인숙 posted Mar 03,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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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시인의 아리랑 / 홍인숙(Grace)




아리랑

                    高銀


1937년 어느날 연해주 고려사람들
당장 화물차에 실려
시베리아 철도에 실려
바이칼 호수 끼고
열흘이고 보름이고 가다가
5천 여명 하나하나 죽어서
그 송장 내버리며 가다가
이게 어디란 말인가
알마아타 황야에 이르러
너희들 까레스끼 여기서 살아라
하고 다 내버리고
밤 화물차 떠나버렸다

멀리 남쪽으로 천산산맥 하얀 눈 쌓였다
앞과 뒤 맨땅 풀밭
여기서 움막 짓고 솥단지 걸어
죽어가며 살기 시작했다
그런 세월 모진 60년 지나
2세 3세
어린이 김 나딸리아
박 일리이치
그 가운데 아나똘리 강
나이 열 한 살
발랄라이까 잘 뜯어
거기다가 아리랑 악보 주었더니
한번 훑어보고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그 곡을 뜯어 노래하는데

놀라워라 그 아이의 노래
이제까지 이런 슬픔 없었다

처음 부르는 아리랑인데
그 노래 가운데
조상 대대의 온갖 슬픔 다 들어
그것과 동떨어질 수 없는
이 어린아이의 눈물이여

이것이 피인가 노래인가 무엇인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 * *


지난 해 10월 말,
U.C. Santa Cruz에서 모국의 원로시인 高銀 선생님의 시낭송회가 있었다.
이 대학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세계각국의 학생들이
먼 나라, 한국에서 온 원로 시인의 시낭송에 열심히 귀 기울이는 모습이
보기만 해도 감동적이었다.

한 시간에 걸쳐 30편의 자작시를 혼신을 다하여 낭송한 선생님은
"아리랑"으로 휘날레를 장식하셨다.

아무런 반주도 없이 온몸으로 절규하듯
간장이 절절 녹아들게 구슬피 부르신 아리랑.

"아-리-랑, 아-리-라---ㅇ, 아라-아-아-리--이--이-이요."

그 분의 아리랑은 지금까지 듣던 그 어느 아리랑보다 처연했다.
강의실은 숙연해졌고 바라보는 나의 눈에서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올랐다.

고국을 떠나 온지 27년이 되었다.
철없던 시절을 보낸 고국에서의 생활보다 더 긴 타국생활이지만
아직 한번도 나 자신이 한국인임을 잊어본 적이 없다.

늦가을, California의 Santa Cruz 숲 속을 메아리 친
高銀 선생님의 아리랑을 따라 가슴 뜨겁게 차오르던 형용할 수 없던 그것이
또 한번 내 모습을 비쳐준 눈부신 거울인 것을 곧 알 수 있었다.

2002.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