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인숙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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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에세이
2003.04.23 15:17

아버지의 아침

조회 수 841 추천 수 129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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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아침 / 홍인숙(Grace)




아버지의 아침 


                    홍인숙(Grace)



자명종보다 먼저 달려온 파릇한 미명이
소롯이 잠에 덮인 세상을 열면
녹슨 계단 아래로 서둘러 어둠 지우는 발길

바지 자락에 찰랑이는 이슬을 머금고
꽃향기 화사한 공원묘지에서
얼굴 없는 사람들과 반가운 인사를 나눈다

굳은 허리를 펴 높이 솟은 하늘을 바라고
시큰거리는 무릎을 추슬러
아슴한 기억이 드러누운 대지를 한주먹에 담는다.

하나, 둘
하나, 둘
둘, 둘, 셋, 넷

밤새 비워낸 가슴을 다시 말갛게 헹구어
하얗게 뜨거운 입김으로 새벽 하늘을 가르는 외침
새파란 미명을 향해 쏟아내는 팔순의 싱그러움이여.



미국은 대부분의 공동묘지가 도심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다.
넓고 시야가 탁 트인 대지가득 펼쳐진 초록의 잔디에 봉분 없는 말쑥한 비석들과, 각양각색의 꽃다발들이 화사한 얼굴로 공원묘지를 찾는 사람들을 반겨준다.
처음 미국에 와서 주택가에 공동묘지가 있는 것을 보고 꺼림직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고, 그 주변에 사는 사람들의 기분까지 염려가 되었지만, 이젠 나도 문화의 차이에서 벗어나 편안한 마음으로 말 그대로 '공원묘지'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그다지 먼 것이 아님을, 죽음은 더 이상의 두려움이 아닌 우리의 삶에 피할 수 없는 한 부분, 삶의 완성인 것을 매일매일 살아가면서 가깝게 느끼게 하려는 최초의 누군가의 의도가 내 의식에도 젖어든 것 같다. 날마다 바라보는 공원묘지에서 먼저 떠난 사람들과 무언의 교감에 익숙해지다보면, 자신의 죽음도 평화로이 바라볼 수 있게되는 마음이 열리리라.

아버지가 살고 계시는 노인 아파트 바로 앞에도 아름다운 공원묘지가 있어 많은 노인 분들이 아침 운동도 하시고, 황혼녘 산책도 즐기신다.
미국은 노인들의 생활보장이 잘 되어있어, 세금 한푼 안 낸 이민노인분들도 일정 기간이 지나 자격이 주어지면 주거비를 포함한 생활비와 각종 의료혜택을 받게된다. 많은 노인분들이 정부보조금으로 세월에 묻혔던 녹슨 자아를 찾아내 자식들의 짐이란 존재에서 벗어나 젊은 사람들 부럽지 않게 독립생활을 하고 계신다.
뿐만 아니라 알뜰하신 분들은 오히려 쓰고 남은 돈을 모아 손자, 손녀들의 손에 용돈을 쥐어주시기도 한다. 실제 많은 한국 교포 노인분들이 미국의 사회보장제도는 자식보다 낫다고 말씀하시며 틈틈이 여행을 즐기시고, 남은 여생을 위해 열심히 건강을 가꾸며 사시는 것을 볼 때, 좋은 사회보장제도가 노후에 희망을 불어넣어주며 궁극적으로 인간의 수명도 연장시킨다는 생각이 든다.

부부 사랑이 유난히 각별하셨던 아버지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몹시 흔들리시며 한동안 가벼운 치매 증상을 보이시더니, 어느 날부터 한사코 독립을 원하셨다. 그동안 모시고 사는 것만이 자식의 도리인 줄로 생각하였지만, 그것이 오히려 자유롭게 사시고 싶어하시는 아버지의 날개를 묶어두고 있는 것임을 깨닫고, 섭섭함은 속으로 접어둔 채 시설이 잘된 노인아파트로 독립을 시켜드렸다.

반생을 고위 공무원으로 자존심만 내세우고 사시던 분이 새로 맞이한 보금자리에서 홀로 식사준비, 빨래 등 손수 가사 일을 하시며 친구분들로 만나고 모임에도 다니시면서 점차 건강도 되찾으시고 삶의 보람도 느끼시는 것 같다.
새벽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공원묘지에서 운동을 하시며, 철저한 건강수칙으로 노후를 다스리시는 아버지는, 팔순도 중반인 연세에도 아직 돋보기나, 의치, 보청기에 의존하지 않으시고 건강하게 지내신다.

오늘도 공원묘지를 향한 아버지의 발걸음은 활기차고, 창공으로 부딪치는 구령은 싱그럽기만 하다. 아버지의 남은 생이 건강하고 평안하시기를 바라는 기도를 드리며 나도 이 아침을 설렘과 희망으로 맞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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