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인숙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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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에세이
2003.06.26 14:06

시인과 열 두 송이의 노랑 장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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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 열 두 송이의 노랑 장미 / 홍인숙(Grace)


약속


               홍인숙(Grace)


내가
시를 쓰는 것은
단 한 사람 그에게
나를 알리는 것


얼굴마저
지워진 그를 위해
내가 살아 있음을
알리는 것


내가
시를 쓰는 것은
내가 나에게
나를 알리는 것


내가 살아 있음을
나에게
약속하는 것.



밤이 깊은 시간에 전화벨이 울렸다.
평소 새벽녘까지 잠을 안자고 밤시간을 즐기는 편이라
조금도 지장이 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심야의 전화벨소리는 언제나 부담스럽다.
전화선 너머로 밤늦게까지 직장에서 일하는 큰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엄마의 시집이 아직도 남았지요?"
'이 밤에 그건 왜?.."
"여기 누나가 다른 곳에서 엄마의 시집을 읽었는데
꼭 한권 받고 싶다고 해서 지금 같이 집으로 갈게요."
"어머나..얘! 지금은..."
내 말을 채 듣지 못하고 아이는 자기 말만 하곤 전화를 끊었다.

비상이다.
생면부지의 사람이, 그것도 내 시를 읽은 독자가 이 시간에 찾아온다니..
부지런히 옷매무새를 고치고, 서둘러 응접실도 대충 정리를 하였지만
평소보다 어수선하기만 했다.
많이 부담스러웠다.
평범한 사람이 아닌, 고상하고 우아한 시인의 이미지만 기대하고 찾아준다면
이런 낭패가 또 어디 있을까..

걱정할 겨를도 없었다.
금세 초인종이 울리고 문 앞에는 30대 후반의 가녀린 여인이
환한 달빛을 머리에 이고, 탐스런 노랑 장미 열 두 송이에 얼굴을 묻은채
수줍게 서 있었다.

그녀는 아름다웠다.
아는 집에서 나의 시집을 읽고 마음에 두고 있던 터에
마침 우리 아들을 만나 너무 반가워 시인의 모습이 보고싶은 마음으로
심야에 실례를 무릅쓰고 왔노라고..
수줍고 고운 목소리로 조용조용 이야기를 해주었다.
고마운 마음에 다정히 손이라도 잡아주고 싶었지만
사람들에게 잘 다가가지 못하고 쑥스러움을 못참는 나로선 언제나 마음뿐이었다.

우리는 문학 이야기, 인생 이야기를 나누며 조금씩 서로의 거북함을 지워갔다.
지금은 비록 밤직장을 잡아 남들은 곤히 가족 곁에서 밤의 호흡을 맞출 시간에
일을 하지만 알고보니 그녀도 소녀시절 시를 사랑하던 문학소녀였다.

뜻밖에 찾아온 그녀와 함께 문학과 시라는 공감대를 형성해가며 이야기하는 도중에
많은 사람들이 시를 좋아하고, 시인을 사랑한다는 것을 깨닫고
나 스스로를 많이 반성하게 되었다.

요즘 서로 반목하는 문인들과 문인단체를 바라보며 스스로 시인이며
문학인의 한사람이란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시심마저 잃어버려 고민하던 중이었다.

내가 만일 시인이 아니었다면 누가 이런 야심한 시간에
실례를 무릅쓰고 나를 찾아주었을까..
이런 소중한 만남이 어디에 있을 수 있겠는가..
부족한 내게 시를 쓸 수 있는 탤런트를 주시고
또 마음의 어수선함으로 시창작을 중단하고 있을 때
이렇게 오묘히 깨달음의 기회까지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가 남기고간 자리..
거실 가득 불타오르는 열 두 송이의 노란 장미꽃들을 바라보며
한번씩 시심을 잃을 때마다 나 스스로에게 좋은 시인이 되기를 다짐하는
졸시 '약속'을 다시 한번 마음에 담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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