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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숲을 거닐다

by 홍인숙(Grace) posted Apr 06,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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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필시대> 기획연재 / 미국에서 쓰는 한국문학 (7)

                        


                                글 숲을 거닐다

                                                     

                                                                        홍인숙(Grace)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산호세 코리아타운 북경반점에서 있었다. 평소 모임의 장소가 있지만 가끔은 기분전환 겸 밖에서 모이기도 한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었다. 항상 자리가 없을 정도로 북적거리는 소문난 음식점이지만 미리 넓은 방을 예약했기에 오붓하게 모임을 가질 수 있었다. 산호세 파이오니어 라이온스클럽 독서모임 이야기이다.

  독서회원들의 직업은 다양하다. 공인회계사, 사업가, 부동산 중개사, 투자금융가, 화가 등 전문 직업인이 많다. 젊은 날부터 각자 자기 분야에서 열심히 노력하고 성공한 사람들이다. 사회적으로 성취감도 크고 경제적으로도 안정된 사람들이지만, 문학적 감성 면에 아쉬움을 느끼고 지금까지의 삶의 가치관을 넘어 독서의 세계로 눈을 돌려 열심히 책을 읽고 있다. 

  이민 생활에서 한 달에 한 권씩 책을 읽고 독후감을 나누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한국처럼 서점이 많지 않아 자유롭게 책을 열람할 수 없어, 인터넷에 올라온 몇 줄 서평만으로 책을 선정하기 때문에 불편한 점이 많다.
2013년 업데이트된 실리콘밸리 개황에 따르면 북가주 9개 카운티의 인구는 약 300만 명, 그중 한인 인구는 약 140만 명이다. 지금은 훨씬 더 늘어난 추세일 것이다. 이처럼 거대한 동포사회에 한국 서점은 산호세의 자그마한 서울 문고 단 한 곳뿐이다.

그나마 독서 인구가 많지 않아 다양한 종류의 책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 운영난으로 기존 서점의 크기를 반으로 줄이면서도 폐업하지 않는 것은 사장님의 동포사회에 독서 인구를 지켜나가기 위한 사명감 때문이다. 문인과 문학동호인들을 위한 문화공간으로도 장소를 제공해주시며 외롭게 서점을 지켜나가고 있다.

  또한, 회원 중에는 1.5세들도 있어 한동안 한국책 읽기를 힘들어했다.
어려운 단어나 한자 용어, 고사성어 등은 물론, 김훈의 [남한산성], 혼마 야스코의 [덕혜옹주],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 등 궁중 소설까지 읽기엔 너무 무리였다. 그럼에도 모국의 슬픈 역사에 가슴 아파하며 열심히 읽고 독후감을 나누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세월이 흐르다 보니 지금은 그들도 유창하게 한국책을 읽고, 깊은 의미의 부분도 무리 없이 소화해 낸다.

  우리가 함께 모여 유익한 시간을 갖게 된 지도 벌써 9년이 넘었다. 그 긴 세월 동안 많은 작가를 만났고 많은 책을 읽었다. 전 세계의 대표작가,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의 작품들, 한국문학을 포함한 세계 고전, 그 외에 베스트셀러, 자기 계발서 등 다양한 장르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작가들의 고뇌와 행복관, 철학관,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에 근접하려고 노력했다.

  간혹 북가주가 배출한 작가의 작품을 만나면 친근감에 읽는 즐거움이 컸다. 살리나스의 존 스타인벡 생가와 그의 수많은 작품세계가 그대로 보관 전시되어 있는 기념관은 전 세계 문인과 문학 애호가들이 방문하는 명소다.

  오클랜드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나 오클랜드에서 자란 작가 잭 런던의 이름을 딴 잭 런던 스퀘어가 있다. 한쪽 광장에 그의 [야성이 부르는 소리]의 배경을 그대로 옮겨온 거리가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우리에게 긴 여운을 남겨준 [그리고 산이 울렸다]의 작가 할레드 호세이니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산호세에서 고교를 졸업하고, 캘리포니아에서 의과대학 졸업과 수련의 과정을 거친 후 의사로 활동하면서 글을 쓴 작가이다. 그의 글 속에 우리들이 익히 아는 거리, 풍물 등이 잘 묘사되어 모두가 반갑게 공감하며 읽을 수 있었다.

  이번 달, 독후감 주제는 카프카의 단편집이었다. 카프카의 사상과 고뇌에 얼마만큼 근접했는지 모르지만, 우린 카프카의 고독과 40세 생일을 며칠 앞두고 폐결핵으로 사망한 그의 짧은 인생을 안쓰러워하며 [변신], [시골의사] 등 긴 시간 지루한 줄 모르고 그의 문학 속으로 흠뻑 젖어들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다. 이런 나의 습관을 아신 아버지께서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하자 세계문학 전집을 사주셨다. 그때 내용을 잘 파악도 못 하면서 밤을 새워가며 고전 읽기에 빠져들었었다. 정말 그땐 새 세상으로 향한 신비감을 충족시키느라 이해하기보다는 읽어댔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나는 문학을 사랑하게 되었고 대학에 진학하여서도 자연스레 국어국문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미국에 와서도 습관이 변하지 않아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독서모임을 만들어 꾸준히 책을 읽었다. 그런 중에 소속되어있던 산호세 파이오니어 라이온스클럽에도 독서모임을 만들고 긴 세월 함께하게 된 것이다.

  고마운 것은 회원 모두 바쁜 생활 중에도 열심히 책을 읽고, 모임에도 적극적이다. 처음에는 책이 주는 지적 충만감의 기대만으로 각자 직업만큼이나 다양한 개성이 뿜어나고 이견도 치열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니 이제는 책이 품고 있는 짙은 향기, 활자의 편안함, 책이 주는 다양한 생각, 감동을 나누면서 서로의 깊이를 알아가게 되었다. 또한 독서를 통해 객관적인 시선으로 자기발견을 하게 되고 그 부분에 대해서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우리들은 그렇게 책과 깊은 사랑에 빠졌다.

  가끔 회원 집에서 파트럭으로 모이기도 하고,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F 스콧 피츠제랄드의 [그레잇 캣츠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등 우리가 읽었던 책들이 영화화된 작품이 있으면 단체 관람도 하면서 행복한 시간을 함께한다.

  고국을 떠나 드넓은 미국 땅, 한시대에 한공간에서 함께하는 한국 동포라는 것만으로도 우린 이미 특별한 인연이다. 거기에 독서모임이라는 공동체에서 책을 공유하고 책 이야기, 세상 이야기, 사람 사는 이야기, 가정의 대소사도 함께 나누는 회원 간의 대화는 항상 무궁무진하고 오가는 정도 가족처럼 끈끈하다.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많은 책을 읽고, 열심히 작가에 대해 공부를 하지만 그 지식을 모두 간직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이 들어 외모나 육체의 변화보다 정신세계가 노화되는 것이 가장 슬프다. 친구인 내과 의사는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서 기억력이 퇴화하는 게 마치 머릿속에 작은 방들의 불이 하나, 둘 꺼져가는 것과 같다고 쉽게 설명해주었다. 

  우리는 사라지는 것들의 상실감을 뛰어넘기로 했다. 영국의 문호 마틴 발저는 “우리는 우리가 읽은 것으로부터 만들어진다.”라고 했다. “독서를 잘하는 뇌는 없다. 독서가 뇌를 만든다.”라는 말도 있다. 나이 들수록 기억력이 퇴화하기에 그 망각의 늪을 뛰어넘기 위해선 끊임없는 독서가 필요하다는 논리도 될 것이다. 비록 오늘 우리가 읽은 많은 부분을 모두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어느 한구석에 침잠하는 것들로 남아 가끔 불쑥불쑥 기억의 갈피를 헤치고 삶의 수면 위로 솟아오르겠지.. 라는 믿음이 있다.

  나는 내 주위에 많은 사람이 책을 사랑하였으면 하는 바람으로 출석하는 교회에 도서관을 만들고 각종 장르의 한국 도서를 2,000권 넘게 구비해놓았다. 책 한 권 없이 시작한 일이 이제는 북가주 유일의 한인교회 부설 도서관으로 자리를 잡아 많은 교인이 자유롭게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미국 내 한인 동포들이 많다보니 심심찮게 사건사고가 일어나고 안타깝게도 교도소에 복역 중인 한국인 수감자도 꽤나 많다. 그들이 한국 서적을 읽고 싶어 한다는 기사를 읽고 작은 위로라도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한국 서적을 보내주기도 한다.

  시대가 빠르게 변모하고 있다. 디지털 시대, 스마트폰 안에서 세상은 매일 새롭게 태어나고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최첨단 문명의 뒤로 소리 없이 사라진 직종이 많다. 인쇄 매체 역시 불황으로 곧 종이의 시대가 사라질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미 e-북과 오디오 북이 대세지만 그러나 나는 아직도 손으로 한 페이지씩 넘기며 읽는 종이책에 무한한 향수를 느끼고 행복해한다.

  산호세 파이오니어 라이온스클럽 회원들은 매년 장학생 선발 장학금 수여, 우수 소방관과 경찰관 포상 격려금, 웅변대회 주최 상금 등, 많은 기부금 마련을 위해 열심히 봉사하며 조금이나마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오랜 세월 책과 더불어 삶을 나누고, 사랑하고 위로하며 함께 해왔듯이 우리는 앞으로도 오래오래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함께 이어갈 것이다.

  오늘도 우리는 책 속에서 길을 찾고 꿈을 꾼다. 밝은 세상을 향해 꿈꾸는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수필시대> 통권 72호  1/2-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