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할머니는 위대하다

by 홍인숙(Grace) posted Nov 29,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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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시대> 기획연재 / 미국에서 쓰는 한국문학 (10) 

              


                           할머니는 위대하다

                                            


                                                             홍인숙 (Grace Hong)


  

   아기가 우주를 움직인다. 아주 작은 아기가 온몸으로 부지런히 우주를 움직이고 있다. 론다 번은 <시크릿>에서 '끌어당김의 법칙'을 소개하며 ‘좋은 기운이 우주를 움직인다.’라고 하였다.

  우리 부부는 손녀딸을 키우기 위하여 사십 년 넘게 산 캘리포니아를 떠나 텍사스로 이사를 왔다.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아기를 보면 생명의 신비함에 숙연해진다. 사랑스러운 숨결, 손가락, 발가락의 작은 움직임, 머리카락 한 올, 한 올까지... 그 소중한 생명의 기운이 힘차게 우주를 끌어당기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지금 황혼 육아를 하고 있다. 아기와 함께 하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지만, 노년에 아기 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즐거움 가운데에도 힘에 부치는 건 사실이다.

  처음에는, 지인 한 사람 없는 타 주까지 와서 아기만 보고 있으려니, 의식의 저변에 자리 잡은 이상적인 삶의 상실감이 공허함으로 다가오곤 했다. 반복되는 일상생활로 정신적 문화가 낯선 곳에서 멈추어 버린 것 같은 고립감까지 엄습하기도 했다.

  어느 날, 기도 중이었다. 어디선가 내면을 흔드는 음성이 들려왔다.
“한 생명을 양육하는 일보다 더 귀하고 가치 있는 일이 어디 있는가. 너는 지금 위대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순식간에 들려온 그 울림은 신기하게도 복잡했던 감정을 한순간에 잠재웠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자부심이 솟아올랐다.
‘그래. 소중한 생명을 양육하는 일처럼 귀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비록 생활에 많은 부분을 잃고 힘이 든다 해도, 나의 도움으로 아들, 며느리가 마음 놓고 일하고, 손녀딸도 건강하게 자라면 그보다 더 보람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게 바로 이상적인 삶이 아닌가.’
그날 이후 나는 마음의 동요 없이 행복한 할머니가 되어 기쁨으로 손녀딸을 키우고 있다.

  나의 어머니께서도 위대하셨다. 서울에 가족을 두고, 잠시 딸과 첫 돌맞이 손자를 보시려고 미국방문을 하셨다가, 병약한 딸을 대신해 손자를 돌보시느라 체류 기간을 넘기고 말았다. 뜻하지 않게 불법체류자가 되시면서까지 손자 둘을 키워주신 어머니... 이민 변호사를 선임하여 어머니의 영주권을 내드리고, 가족을 초청하여 모여 살게 되었지만, 그동안의 긴 세월을 멀리 있는 남편과 자식들에게로 향한, 그리움과 염려, 기다림을 안고 얼마나 마음고생, 몸 고생이 심하셨으랴.

  어머니는 그 당시의 심한 스트레스와 힘든 육아 때문인지 미국 오신지 칠 년 만에 암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딸자식 집이 얼마나 어려우셨으면, 말기 암으로 진행될 때까지 그 심한 고통을 혼자 끌어안으시고 아픈 내색 한번 안 하셨던 어머니... 결혼한 아들은 시민권자의 형제 초청 케이스로 시간이 오래 걸려, 몹시도 사랑하셨던 큰아들은 끝내 못 보시고 눈도 못 감으신 채 운명하셨다.

  무심한 딸이 맞벌이 이민 생활로 내 몸 힘든 것만 알았지 어머니의 고통을 헤아려드리지 못한 게 너무나도 회한으로 남는다. 지금 내가 손녀딸을 키우다 보니 어머니의 노고가 더욱 귀하게 생각되어 가슴 아프고, 일찍 돌아가신 원인이 모두 나 때문인 것 같은 자책으로 많은 밤을 하얗게 밝히게 된다.


                       저기 저 바람 / 그리움 가득 안고 오는 바람 /

                       봄 내내 꽃망울 피우지 못한 / 정원의 그늘진 한숨 뒤로 /

                       수국 송이송이 / 소담스레 피워 올리시고 / 하얗게 웃고 계신 어머니.//

                                                                                     - <어머니의 미소> -


  나는 집을 옮겨 다닐 때마다 정원에 수국을 심는다. 어머니께서 생전에 좋아하시던 꽃이 수국이었다. 어릴 때 외동딸의 손을 잡고 햇살 좋은 꽃밭에 나가 소담스레 핀 수국을 가리키시며 늘 말씀하셨다.

“저 꽃은 참 신기하단다. 토양이나 햇빛에 따라 꽃의 색을 다르게 피우기도 하지. 한 송이씩 따로 피는 꽃도 아름답지만, 난 왠지 저렇게 서로 옹기종이 이마를 맞대고 의지하며 꽃을 피우는 수국이 참 좋구나.”

언제나 수국 앞에 설 때면 잔잔한 그 음성이 햇살로, 바람으로 내 안을 맴돌곤 한다.

  어머니는 부유한 집 오 남매의 외동딸이셨다. 큰 키에, 서구적인 용모를 지닌 이지적인 분이셨다. 집안에서도 항상 몸단장을 곱게 하시고, 언행이나 자세에 흐트러짐이 없으셨다.

  누구나 사모의 정으로 어머니에 대해 조금은 과장된 기억을 가질 수 있겠지만, 내 기억에 어머니는 평생 조용하시고, 온화하신 모습만 보여주셨다. 자식 삼 남매를 키우시면서도 항상 존중해주시며, 당신의 주장을 하시거나 꾸짖는 일이 없으셨다. 
집에 걸인이 와도 대청마루에 식구들이 먹는 것과 똑같은 밥상을 차려 대접하곤 하셨다.

                       첫새벽마다 / 정한수 한 사발 올리시고 / 기원 드리시던 어머니 //

                       이제야 알 것 같다 / 엄동설한에도 / 단 하루 빠짐없이 /

                       언 손 마주 빌던 / 그 질긴 염원들을 //

                       추억이 얼비친 / 하얀 그릇 속으로 / 툭 -/ 떨어지는 눈물.//

                                                                                       -<어머니의 염원>-

  어머니에게는 가족이 전부셨다. 매일 새벽, 미명의 하늘 아래 가족을 위해 두 손 모아 기원을 드리셨다. 추운 날, 비 오는 날, 따뜻한 침상에 좀 더 누워계시고 싶으시련만 장독대에 정한수를 올리시고 긴 시간 간절한 기원을 드리셨다. 그 당시 어머니에게는 그 의식이 절대적이며 거룩한 종교의식이었다.

  큰아들이 군에 입대하였을 때에는 그 아들을 위해 더욱 정성 드려 기도하셨고, 식사 때마다 아들의 따뜻한 밥을 퍼 놓으시며 아들의 부재를 잊으려 하셨다.

  하나뿐인 딸을 출가시켜 미국으로 떠나보낸 후, 딸의 흔적이 남아있는 동네 길을 눈물로 다니셨다는 어머니... 그 딸이 좋아했던 반찬은 밥상에 올리지도 않으셨다는 어머니... 미국에 와서 낯선 문화에 적응하느라 부모님께 소식 한 자 못 드리고 살다가, 미국을 방문했던 친지로부터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얼마나 애통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자식을 키워보고, 또 그 자식이 자식을 낳아 손주를 키워보니,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참으로 자식을 위해 애면글면 기도할 일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의 간절한 염원, 절대적인 사랑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으리오.


                       그대여 // 지금 어디서 / 하늘의 방(房)을 / 가꾸고 계신지요 //

                       천사의 노래 속에 / 이승의 기억일랑 / 빗물로 내리고 //

                       일어나 거닐며 / 속삭이며 / 미소도 짓고 계신지요 //

                       달빛 아래 아직도 / 눈뜨고 있는 / 한 줌 꽃으로 // 

                       그대 남긴 자리 기웃대는 / 내 부끄러움 / 용서받고 싶은 날들 //

                       어머니.//

                                                                                    - <하늘의 방房> -

  

   ‘어머니보다 더 훌륭한 하늘로부터 받은 선물은 없다.’고 한다.

  나이 들수록 사무치게 그리운 어머니... 어머니께 조금이라도 속죄하고픈 마음으로 나도 어머니처럼 정든 곳을 떠나와 손녀딸을 키우고 있다. 어머님이 키워주신 나의 아들이 어느새 장성하여 낳은 자식을, 이제 내가 열심히 키우고 있는 것을 분명 어머니께서도 기뻐하시리라.

  그때 어머니의 손에서 건강하게 자란 우리 아이들은 삼십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할머니의 사랑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한다. 나와 내 자식으로 뿌리내리며 위대한 어머니로, 할머니로, 우리 곁에 존재하는 그 큰 사랑과 희생에 감사하며, 노년에 손주를 키우는 세상의 모든 할머니에게 응원을 보낸다.


  <수필시대> 통권 75호  7/8-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