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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by 홍인숙(Grace) posted May 25,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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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시대> 기획연재 / 미국에서 쓰는 한국문학 (11) 


                                     자화상 


                                                            홍인숙 (Grace Hong)


  지나온 날들을 돌아본다. 전보다 사색하는 시간이 훨씬 많아졌다. 삶을 더듬어 생애에 만났던 사람들에게 고마워하고, 평범 무탈하게 살아온 삶에 감사한다.

  최인호 작가는 착한 것에 대해 색다른 정의를 내린 적이 있다. 온순하고, 자기주장을 내세우지 않으며, 자기 이익을 챙길 줄 모르는 사람을 보편적으로 착하다고 하는데, 그것은 우유부단한 것이지 결코 착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착한 것이란 올바른 생각을 갖고, 자기의 신념을 굽히지 않으며, 불의에 타협 없이 자기의 주장을 관철시키고, 똑똑하게 사는 것이라고 하였다.

  나는 똑똑하지 않다. 매사에 소극적이며, 이익을 챙기는 일에 둔하다. 내 주장을 내세우거나 당차지도 못하다. 이 모든 것이 눈곱만큼도 착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우유부단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뿐인가. 경제적인 면에서나, 인간관계에서나, 실리를 추구하는데 둔하다. 제일 취약점이 인간관계이다.

  나는 사람을 만나는데 경계가 없다. 누구를 만나던 다 믿고, 필요 이상으로 마음을 열어 내 안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수다스럽다거나 사교성이 있어서도 아니다. 이 나이에도 낯가림이 심해 인간관계의 폭이 좁다. 그저 사람들을 만날 때 모두 내 맘 같이 믿고 대할 뿐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을 조심하라고 일러줘도, 선입견을 갖고 사람을 대하고 싶지 않아 관계를 지속하다 결국은 안 좋은 일을 당한 적도 있다.

  나를 아끼는 후배는 이런 나를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다고 걱정을 한다. 사람도 가려가면서 만나고, 상대방의 심리분석도 해가면서 잘 파악하고 대하라는 것이다. 
 
아, 이 얼마나 피곤한 일인가. 사람의 관계가 이렇게까지 삭막해지다니 서글프기만 하다. 
  하지만, 긴 세월 곁에서 지켜본 남편까지 온갖 뉴스와 사람들의 말을 한 치도 의심 없이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나를 한심해 하는 걸 보면 내게 문제가 있긴 있나 보다.

  어리숙한 사람이 타국 이민생활 사십 년이 넘다 보니 잊지 못할 에피소드도 있다.

  이십 대에 미국 와 첫 집으로 이사한 지 며칠 안 되었을 때였다. 저녁 무렵, 집 주변을 산책하다 길을 잃었다. 동네가 낯설기도 했지만 길을 찾아 헤매면 헤맬수록 집에서 더욱 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어쩐 일인지 주택가를 벗어나 공장과 회사가 밀집해 있는 지역까지 가게 되었다.

  퇴근 시간도 지나 모든 건물이 문을 닫았고, 인적이 끊어진 길은 적막했다. 황혼은 점점 짙게 내려앉았다. 집으로 돌아갈 일이 막막하여 할 수 없이 미국영화에서 본 것처럼 Hitchhiking이라는 걸 하려고 마음 먹었다. 창피하여 몇 번의 기회를 놓치고는 정말 마지막 용기라도 내야만 할 때였다. 

  멀리서부터 어스름 달빛 속으로 차 한 대가 다가왔다. 겨우 손을 들어 도움을 청했다. 요란한 스포츠 카에 가죽옷을 입은 청년이 차를 멈추고 타라는 신호를 보내왔다. 고마움에 주저 없이 차에 올라탔다.

  1970년대에 쉽게 만날 수 없었던 동양 여인을 호기심으로 대하던 청년은, 서툰 영어로 길을 잃었다고 하며 집 주소를 알려주자 무척이나 난감해하는 눈치였다. 그도 그 지역이 낯선 타지 사람이었다. 겨우 짧은 기억을 더듬어 집 근처에서 밤에 Drive in Theater 스크린을 본 적이 있다고 말해주자, 청년은 반가워하며 Drive in Theater가 있을 만한 곳을 찾아보자고 나를 안심시켰다. 그리고는 고맙게도 여러 곳을 돌고 돌아 마침내 집까지 무사히 데려다 주었다.

  이미 밤이 밀려오고 있었다. 안도감으로 집에 들어선 순간, 걱정으로 집안에 모여 있던 시댁 분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로 쏟아졌다. 전후 사정을 들으시곤 내가 얼마나 위험한 짓을 했는지 엄청 많은 꾸지람을 하셨다. 나는 청년이 나쁜 사람일지도 모른다거나, 두렵다는 생각은 전혀 안 했었다. 그러나 다민족 국가, 미국에서 살아보니 그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곧 알게 되었다.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날 그 청년이 베풀어준 고마움을...…


  십여 년 전에는 Santa Cruz 바닷가 근처에서 식품점을 운영한 적이 있었다. 한낮에도 안개가 자욱한 곳이지만, 그날은 비가 오려는지 더욱 어둡고 흐린 날씨였다. 손님도 없어 한가하게 카운터에서 음악을 듣던 중이었다. 우람한 체격의 처음 보는 남자가 들어와 가게 안을 살피고 나가더니, 곧바로 다시 들어와 카운터 테이블 위에 납작한, 일명 007 가방을 얹어놓았다. 그는 다시 가게 안을 둘러보며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는 가방을 열었다. 그 안에는 까만 권총이 누워있었다. 남자는 총에 손을 얹었다. 

  나는 처음 보는 총이 너무나 신기했다. 영화에서나 보던 권총을 실제로 보다니...... 마치 어린아이가 새로운 장난감을 보듯 신기하여 진짜 총이냐고 물었다. 남자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방 안을 들여다보니 은빛 동그란 것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총알이냐고 물으니 또다시 남자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런데 그것이 어쩌면 그렇게 앙증맞고 예쁘게 생겼던지...... 그에게 만져봐도 되냐고 묻곤 대답도 듣기 전에, 차갑고 매끄러운 그것들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만지작거리다 문득 궁금해졌다. 남자를 바라보며 왜 이런 것을 갖고 다니느냐고 물었다. 남자는 큰 눈을 껌벅이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보더니 재빨리 말했다. “I need money.” 
  순간적으로 ‘아, 이 사람이 돈이 필요해서 총을 팔러왔구나.’ 생각한 나는, 미안하지만 총이 필요하지 않아 사지 않겠다고 말해주었다. 
  그 순간 가게에 손님이 들어왔다. 남자는 순식간에 후다닥 가방을 닫아 들곤 뛰쳐나갔다. 들어선 손님은 가게 단골이며, 동네 터줏대감으로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챘는지 아무 일 없었냐고 물었다. 나는 너무나 멀쩡하게 아무 일도 없었다고 대답했으나, 그는 낯선 외지 사람이 이상한 가방을 들고 급히 도망간 것으로 보아 분명한 강도였는데 정말 괜찮냐고, 계속 물어왔다. 그때야 비로소 무슨 일을 당할 뻔했는지 안 나는, 다리에 힘이 빠져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곤 며칠을 그 충격에서 헤어나질 못했다.

  사람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이 섬뜩한 이야기를 듣고도 나를 위로하기보다 웃느라고 정신이 없다. 세상에 강도도 몰라보다니, 또한 강도의 얼굴을 보면 총을 쏜다는 것은 상식인데, 몰라도 그렇게 모를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강도가 나 때문에 얼마나 당황하고, 기가 막혔겠냐고, 오히려 강도에게 더 동정적이다.

  지금 생각하면 위급한 상황을 똑똑하지 못하여 화를 면한 것 같다. 그래서 사람은 제가끔 생긴 대로 살아가기 마련인가 보다. 모자람으로 생활 속에 잃은 것도 있었겠으나 무의식중에 얻은 큰 감사 또한 있지 않은가. 

  글제를 ‘자화상’이라고 붙였지만, 사실 나는 아직도 나 자신을 다 알지 못한다.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일보다 더 어려운 것이 바로 자신을 이해하는 일인 것 같다. 그럼에도 확실한 것은, 착한 구석은 없고, 우유부단 투성이라는 것을 한 시대를 풍미했던 최인호 작가를 통해 알게 되었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생활은 편리해지지만, 정서적 여유로움을 잃는다.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현대사회에는 모든 것에 가속이 붙는다. 기회도 한순간이다. 성실함으로 사람을 대하기보다, 재빠른 판단과 발 빠른 처신만이 성공의 지름길이라고 믿는, 세속적인 성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난다. 나는 그들을 바라만 보기에도 숨이 가쁘다. 그렇다고 나의 취약점을 합리화시킬 생각은 없다. 타고난 성품대로 살아가는 것이 내 삶의 방편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인생의 굽이마다 내 모습 그대로 품어주며 사랑을 베풀어준 사람들로 외롭지 않았으니, 언젠가 세상 여정 끝나는 날, 내 삶의 인연들은 모두 아름다웠노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