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인숙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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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2018.09.25 04:10

내 평생에 고마운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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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필시대> 기획연재 / 미국에서 쓰는 한국문학 (12)

 

 

                           내 평생에 고마운 선물

 

 

 

 

                                                    홍인숙 (Grace Hong)

 

 

사람은 자기 자신을 의탁할 자기 세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자기의 마음속에 그리고 있는 자기의 세계에 충실하였느냐 충실치 못하였느냐가 늘 문제이다.
사람에게 있어 가장 슬픈 일은 자기가 마음속에 의지하고 있는 세계를 잃어버렸을 때이다.

나비에게는 나비의 세계가 있고, 까마귀에게는 까마귀의 세계가 있듯이,
사람도 각자 자기가 믿는 바에 정신적 기둥이 될 세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당신이 당신의 마음과 다른 곳에서 헤매고 있거든 다시 자기의 세계로 돌아가라.   -헤겔-

 

 

  오랫동안 방황하고, 나약해 있을 때 나의 정신세계를 회복하는데 힘이 되었던 헤겔의 글이 생각난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생애에 가장 좋아한 일은 독서와 글쓰기였다. 나에게 문학은 위안이며, 정신적 기둥, 행복 충만한 세계였다.

  긴 세월 고국을 떠나 살면서 모국어로 글을 쓴다는 것은 어쩌면 무모한 행보였을지도 모른다. 애초부터 유명 시인이 되고 싶다는 욕심 같은 건 없었기에 가능했던 일인 것 같다. 

  스물다섯 살, 결혼하고 미국에 오니 성이 남편의 성으로 바뀌고, 난생처음 직장이라는 것도 가졌다. 급변한 환경 때문인지 한국에서는 감기도 잘 앓지 않았으나 미국 와서부터는 잦은 병치레로 생활영어보다 병원 영어를 먼저 배워야 했다. 나무나 풀포기를 옮겨 심어도 몸살을 앓는데, 어린 나이에 부모 형제를 떠나 낯선 나라에서, 낯선 생활이 어찌 편하기만 하였으랴. 날마다 봄날처럼 황홀할 꿈 많은 나이에, 문화 충돌로 인한 정신적 동요로 몸이 예민하게 반응했던 것 같다. 

  새로운 문화와 환경에서 오는 갈등으로 나는 나이보다 일찍 인생을 알게 되었다. 그런 내가 헤겔을 만나고부터 엎드려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곤 그 공간에서 훨훨 날개를 펴고 홀로함에 자유로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기억 속에 잠들었던 언어들이 일어나 반겨주었고, 글숲에서 사색하는 시간이 점점 많아졌다. 그렇게 다시, 잊혀졌던 언어들과 만나며 서서히 평안을 찾았고 홀로 시심을 키웠다.

  긍정적인 사색은 확실한 치유제이다. 지금 생각하면 잠재해 있던 글쓰기의 습관이 나도 모르게 살아남기 위한 본능적 투쟁으로 나타났던 것 같다. 문학이 없었다면 그 황량한 정신세계를 어찌 감당할 수 있었을까. 학창시절, 고국에서의 문학이 오색찬란한 꿈이었다면, 미국에서의 문학은 존재의 방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구체적인 도전이었다.

  지금은 인터넷이 발달하였고 샌프란시스코 지역에 여러 문학 단체가 있어, 각종 문학 행사, 문학지 발행, 많은 등단 문인들로 한국문학 활동이 활발하지만, 1970년-1990년대에 고국은 너무나 멀었다. 한국 서적을 구하기도 쉽지 않았고, 한국 문단의 흐름에 대해서도 암흑 같았던 그 시절, 오랜 기간 혼자 글을 쓰고, 가끔 지역 신문에 시와 수필을 발표하는 정도였다.

  그러던 중, 1990년대 후반에 뜻이 맞는 사람들과 시모임을 갖게 되었고, 당시 시 창작의 열정을 함께 나누던 문우들은 지금 모두 등단 시인들로 미주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2000년대에 들어서 2002년 <한국문인협회 샌프란시스코 지부>, 2003년 <샌프란시스코 한국문학인협회>, 2004년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샌프란시스코 지역위원회>가 각각 창립되면서 비로소 샌프란시스코에 한국문학의 꽃을 피우게 되었다. 

  어느 여름날, 스무 살 아들아이가 울창한 숲속의 고풍스러운 찻집으로 엄마를 안내했다. 나이테가 말갛게 비치는 나무 마루, 튼튼한 통나무 테이블, 굵은 나뭇가지로 만든 의자들... 은은한 나무 냄새와 커피 향이 어우러진 찻집에서, 창밖 팔랑이는 나뭇잎들을 바라보며 시집을 읽고, 평화로움을 안았다.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한 호숫가 숲길을 걸으며, 모네의 정원처럼 구름다리 아래 연꽃 사이로 청둥오리들이 유영하는 평화로운 정경을 마음에 깊이 담기도 하였다. 
 
매일 집에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엄마가 안쓰러웠는지 가끔 분위기 있는 곳으로 안내하겠다는 아이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그 약속을 지킨 것이다. 엄마가 나이 드니 아이에게 연민의 대상이 되었나 보다. 그날 밤, 나의 일기장에는 ‘사랑받고 있는 늙음은 쓸쓸하지 않다’는 행복한 글이 남겨졌다. 

  그 후로도 아들아이는 엄마의 정서 생활에 도움이 될만한 곳으로 자주 안내했다.엄마가 적적해 보이면 살며시 다가와 어깨를 감싸주고, 밖에서 친구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엄마에게도 사다 줄까 전화하는 아이. 이름 있는 날이면 잊지 않고 다정함을 보이던 그 아이가, 지금은 E.M (응급의학) 의사가 되어 병원 응급실에서 바쁘게 일을 한다. 매일 많은 사고 환자를 접하고, 늘 죽음을 가까이 보고 산다. 그래선지 늙은 부모에게 신경을 많이 써준다. 마음을 편안히 갖고, 하루하루 즐기며 행복하게 살라고 권유한다.

 

  ‘사람은 늙어야 사방이 보인다’라는 말처럼, 나도 이제야 세상이 보인다. 세상 살면서 많은 얼굴을 만났고, 마음을 보았고, 슬픔과 행복도 알았다.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삶보다 경험을 통한 삶의 의미는 훨씬 깊고, 정신적 가치 또한 달랐다. 눈물을 감출 수 있게 되었고, 상처도 다독일 줄 알게 되었다. 사람 냄새가 진한 사람도 알아볼 수 있게 되었으며, 삶에 깊은 시선을 갖고 고난도 유익이라는 진리까지 터득하게 되었다. 

  나는 운명론자가 아니기에 인생은 자기 자신으로 인해서 얻어지는 삶의 결과물이 대부분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살면서 부딪쳐 오는 일을 겪다 보니 때론 '타고난 운명이라는 게 있나 보다'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말이나 행동이 민첩하지 못한 나는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행복했고, 내가 가야 할 길이라고 우직하게 믿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운명처럼 글 쓰는 일을 안고 살았다.

  많은 사람이 자기 이야기를 책으로 쓰면 수십 권이 될 거라는 자기 삶에 연민과 무게를 두고 산다. 각자 자기의 인생 사연이 가장 애틋한 것처럼, 나 또한 글을 쓰며 자기 연민에 빠져 감성팔이를 하지 않았나, 염려할 때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소설 같고, 영화 같은, 지난 인생의 절절한 사연이 아니라, 하루하루 새롭게 주어지는 시간일 것이다. 삶 속에 침전된 고난의 순간들을 가슴에 훈장처럼 지니지 말고 자유롭게 흘려보내는 연습이 필요할 것 같다.

  오늘, 유난히 달빛이 곱다. 블라인드를 활짝 열어 유리창 가득 쏟아져 들어오는 바깥세상과 소통을 한다. 창은 세상으로 향하는 출구이며, 살아있는 호흡이다. 하루가 저무는 고요 속에서 혼자 하는 시간은 더욱 황홀하다. 

  철학자 틸리히는 혼자 있는 고통을 표현하는 말은 ‘외로움’이고, 혼자 있는 즐거움을 표현하는 말은 ‘고독’이라고 정의했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외톨이로 여겨지는 것, 혼자 있어 외로운 것이 아니라, 혼자 있지 못해서 외로운 것’이라는 심리학적 견해도 있다. 나는 내가 선택한 홀로함을 즐기고 사랑한다. 

  돌아보니 나는 살아오면서 소유적 가치보다 존재적 가치를 더 지향했던 것 같다. 젊은 날엔 존재의 허무감으로 갈등했고, 지금은 매 순간 존재 자체로 감사한다. 언제나 곁에서 나를 지켜준 문학이 있어 고맙고, 내 평생에 문학예술을 사랑하는 정신적 요소를 선물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이야기꾼이 아닌 사람이 별다른 인생 내공도 없이, 미국 거주 한국 문인이라는 것만으로 본국 문학지 [수필시대]의 기획연재 ‘미국에서 쓰는 한국문학’을 맡게 되었다. 그동안 글에 미흡한 부분이 많지는 않았는지, 혹시라도 나의 글이 미주 문인들에게 누가 되지는 않았는지, 매우 염려된다. 
  이제 마지막 글을 정리하며, 모쪼록 그동안 나의 글이 문학을 사랑하는 따뜻한 가슴, 가슴에 친근하게 다가가 주었기를 바랄 뿐이다. 

             

     <수필시대>    통권 76호    9/10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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