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소나기 

by 홍인숙(Grace) posted Nov 10, 2016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소나기  /   홍인숙(Grace)
    

  

오랫동안 고국을 떠나 살다보니 새록새록 그 옛날 고국의 정서가 그리워진다. 그 중에도 한여름을 시원하게 적시던 소나기의 정을 잊을 수가 없다. 그 시원함, 그 소리, 30년 가까이 못보는 풍경이지만 아직도 내게 설렘으로 남아있는 것은 내가 사는 곳엔 소나기를 보기가 쉽지 않고, 간혹 소나기를 맞는다해도 고국에서처럼 끈끈한 정서를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맑았던 하늘에서 갑자기 쏟아지는 거센 빗줄기.
세차게 창문을 두드리며 내리는 그 신선한 울림.
나뭇잎을 흔들며 춤추듯 떨어지는 경쾌한 빗방울들의 모습.
차창을 부딪치며 긴 꼬리로 흘러내리는 매혹의 여운.
아스팔트를 튀어 오르며 쏟아지는 도발적인 빗방울들의 몸짓.
어느 새 흥건히 고인 빗물을 세차게 튀기며 달리는 자동차의 물결.  

갑자기 쏟아지는 비를 피해 부산히 움직이는 사람들.
부지런히 빨랫줄에 빨래를 걷고, 장독대를 향하여 발걸음을 서두시는 어머니.
가던 길을 멈추고, 남의 집 처마 밑에서 소나기가 멈추기를 기다리는 사람들.
신문지로 머리를 덮고 황급히 뛰어가는 사람.
속살이 훤히 드러나게 젖어 버린 블라우스로 난감해 하는 여학생.
파란 비닐 우산을 겨드랑이에 끼고 빗줄기 사이를 뛰어 다니는 우산 팔이 소년들..

그런 날, 사람들은 커피 냄새가 짙게 배인 찻집으로 옹기종기 모여들고 뮤직 박스에서 흐르는 '노오~란 레인코트에~..' 허스키가 뽀얀 담배 연기 사이로 넘실거린다. 사람들은 어느 새 잠시의 혼란에서 벗어나, 익숙한 모습으로 대지를 적시는 시원한 빗줄기를 바라보며 저마다 짧은 휴식에 들어간다.
  
잠시 후, 언제 다가왔는지 눈부신 태양이 슬그머니 먹구름을 밀어내면 거짓말처럼 금세 소나기가 멈추고, 사람들은 재 빨리 일상 속으로 달려간다.

젖었던 옷을 툭툭 털고 황급히 제 갈 길로 나서는 사람들.
스타킹에 튀긴 빗물자국을 고운 손수건으로 닦아 내곤 경쾌한 하이힐 소리를 남기며 사라지는 여인들.
처마 밑의 짧은 만남을 눈인사로 마치고 헤어지는 사람들...

하늘엔 드높은 무지개가 떠오르고, 아스팔트는 어느 새 말끔한 얼굴로 누워있다. 한순간 거짓말 같은 풍경이 스쳐지나갔다. 이 모두가 1970년대 고국에서 보았던 아직도 내게 그리움으로 남아있는 소나기가 연출한 풍경이다.
  
우리의 삶에도 가끔은 소나기를 바라보는 휴식이 필요할 것 같다. 멈출 줄 모르고 질주하는 일상에서 우리의 정신과 육체는 황폐해지고 가중되는 스트레스는 돌이킬 수 없는 허무와 체념을 싣고 온다. 건전한 사고와 건강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가끔은 틀에 박힌 일상을 접고, 한여름의 열기를 식히는 소나기를 바라보는 마음으로 쉬었다 가야겠다고 생각한다.
잠시 빗줄기를 피한 휴식 후, 힘찬 모습으로 다시 희망을 갖고 도약하는 것이다. 소나기 뒤의 하늘은 더욱 푸르고, 눈부신 태양 아래 아름다운 무지개가 떠오르는 것처럼.

    (1999년 한국일보 / 여성의 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