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노을길에서

by 홍인숙(Grace) posted Nov 10,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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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을길에서  /   홍인숙(Grace)
    

  

외출 전, 곧잘 아들아이에게 내 모습을 묻곤 한다.
사내아이지만 정확하게 나의 옷차림을 지적해 주기 때문이다.

나와 취향이 비슷한 아이는 평상시 내 옷차림에 별 거부반응이 없었고, 나도 어쩌다 한 번씩 있는 악세사리와 칼라 매치 정도의 아이의 지적을 거의 받아들이는 편이었다. 그러던 아이가 오늘, 검은 바탕에 흰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나서는 나를 보고 너무 나이가 들어 보인다며 정색을 하고 밝은 색상의 옷으로 갈아입기를 권한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단정하고 고상한 색상의 옷차림을 좋아하던 아이가 어느새 엄마의 늙음을 눈치채고 밝은 색상을 권하는 것이다. 잠시 작은 충격이 팔랑이는 바람처럼 마음 한 구석을 재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거울을 보았다. 차가운 유리 저편으로 노을이 깃든 낯선 얼굴이 걸려 있다. 놓치고 싶지 않던 순간들이 어느새 세월의 등뒤로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흐르는 세월을 어쩌랴. 젊어지려고 안간힘을 하는 것보다 세월 속에 자연스레 스며드는 성숙한 아름다움으로 남고 싶다.  
  
관상보다는 신상, 신상보다는 심상이 좋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나이가 들면서 사람이 추해지는 것은 육체보다 먼저 마음이 늙어가기 때문일 것이다. 내적인 지식을 쌓고 좋은 인품, 좋은 언행, 좋은 관계로 생활 하다보면 저절로 그 사람의 얼굴에는 결코 세월의 흐름을 탓할 수 없는 성숙한 아름다움이 배어 나오리라 생각한다.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지적수준이나 생활환경, 인품 등을 읽을 수 있다. 그것은 꼭 유복한 환경이나 고학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관계의 으뜸은 물질이 아니라 인품이고 덕망이라 생각한다. 덕망이 있는 사람은 헤어져도 금세 그리움으로 남고, 겉모습만 화려한 사람 곁에선 빨리 헤어지기만을 기다리게 된다. 나이를 떠나 외모의 아름다움보다 진솔한 내면의 아름다움이 더 향기 있고 오래가기 때문이다.

나도 평안한 모습으로 곱게 늙고 싶다.
언젠가는 아이에게도 젊어지려고 치장만 하는 엄마보다 순리대로 세월의 흐름을 받아들이고 평화로운 모습으로 늙어 가는 엄마에게서 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그날을 위해 쉬지 않고 나의 내면을 아름답게 가꾸는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

아이의 의견을 존중해 주기 위해 밝은 색상의 옷으로 갈아입고 나선 거리의 하늘엔 어느새 보랏빛 노을이 곱게 물들고 있었다.  


    (1999년 한국일보 / 여성의 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