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최선을 다하는 하루 

by 홍인숙(Grace) posted Nov 10,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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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선을 다하는 하루  /  홍인숙(Grace)
    

  

며칠 더위가 계속 되었다. 특별히 하는 일 없이 나날을 보냈다.
내 특유의 게으름이 일조를 하였지만, 그건 분명히 갑자기 찾아와 사람을 무력하게 만든 더위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고 싶다.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하루하루 미루어 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유난히 더위를 타는 남편을 위해, 아침부터 오이냉국을 준비하느라 채칼을 사용하다 그만, 손가락을 다치게 되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참으로 간사한 것이다. 손을 자유롭게 쓸 수 없게 되니 왜 그렇게 하고 싶은 일들이 많은지.. 그동안 미루어 왔던 일들이 한꺼번에 다 하고 싶은 욕망으로 밀려오는 것이었다.
진작에 해 둘 것을...후회가 되었다.

오래 전, 적지 않은 돈으로 세계문학전집과, 한국문학전집을 장만하고는 한가할 때를 기다리며 책장에 꼽아 두었었다. 이제 비로소 시간적인 여유가 생겨, 기다리던 때가 되었다고 마음을 먹고 책을 펼치니 어느새 시력이 떨어져 자유롭게 읽을 수가 없었다. 그만 때를 놓친 느낌이다.

우리의 삶도 매일을 보장받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때를 기다리다 영원히 그 때를 잃어버리지 말고 하루하루 나의 건강과 여건이 주어졌을 때 최선을 다 하여야겠다.

하루를 시작하는 것은 매일 주어진 깨끗한 백지 앞에 마주 선 것과 같다고 한다. 게으르게 흰 종이 그대로 하루를 접는 사람과, 그 백지에 여백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보람있는 삶으로 꽉 채우는 사람 중, 나는 어떤 사람인가 스스로를 반성해 본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아깝게 버린 흰 종이가 얼마나 쌓였을까 새삼 나의 게으름이 부끄럽다.

내일은 희망이다. 희망은 기다리는 것이다. 분명 그 내일이 있으므로 오늘의 역경도 감수할 수 있다. 그러나 무모하게 내일에 의존하다가 자칫, 오늘을 헛되이 보내지는 않았는가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오늘에 최선을 다하고 반성하며 살 때에 더욱 보람있는 내일을 맞이하게 될 것이리라.

우연히 다친 손가락이 잊고 있었던 진리 하나를 깨닫게 해준 하루, 오늘 나는 어떤 모습으로 이 새로운 흰 종이를 장식할 것인가.



    (1999년 한국일보 / 여성의 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