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인숙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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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ck2016.11.21 05:05
                         정미소처럼 늙어라/ 유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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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소처럼 늙어라/ 유강희 


나 늙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리 
아직은 늙음을 사랑할 순 없지만 언젠가 사랑하게 되리 
하루하루가 다소곳하게 조금은 수줍은 영혼으로 늙기를 바라네 
어느 날 쭈글쭈글한 주름 찾아오면 높은 산에 올라 채취한 나물처럼 
그 속에 한없는 겸손과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하늘의 열매 같은 그런 따사로운 빛이 내 파리한 
손바닥 한 귀퉁이에도 아주 조금은 남아 있길 바라네 
언젠가 어느 시골 마을을 지나다 잠깐 들어가 본 
오래된 정미소처럼 그렇게 늙어 가길 바라네 
그 많은 곡식의 알갱이들 밥으로 고스란히 돌려주었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식은 왕겨 몇 줌만으로 소리 없이 늙어 가는 
그러고도 한 번도 진실로 후회해 본 적 없는 
시냇물 흐르는 소리도 반짝, 들려주는 녹슨 양철지붕을 
먼 산봉우리인 양 머리에 인 채 늙어 가는 시골 정미소처럼 
나 또한 그렇게 잊힌 듯 안 잊은 듯 조용히 늙어 가길 바라네


웹진 문장》 2008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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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늙어간다는 사실보다 늙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사람을 더 추하게 한다. 늙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기력이 쇠하여져서 생산성이 떨어지거나, 성취하고 소유하고 유지할 능력을 계속 요구하는 세상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함에 따른 서운함이지, 늙어 보이는 것 자체에 두려움을 가질 이유는 없다. 어쩌면 나이가 들어 더 이상 호르몬의 작용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일지도 모른다. 늙는다는 것은 하고 싶지 않은 일들에서 벗어날 수 있는 분명한 핑계거리를 제공해 주기도 한다.



 늙는다는 것은 우리 몸이 자신의 의지대로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고 각성케 한다. 우리를 완전하게 만드는 것은 몸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이다. 죽음을 피해갈 수 없듯이 누구나 언젠가는 늙을 수밖에 없다. 그때 ‘하루하루가 다소곳하게 조금은 수줍은 영혼으로 늙기를 바라’는 마음가짐은 얼마나 갸륵한 인간의 모습인가. ‘높은 산에 올라 채취한 나물처럼’ ‘그 속에 한없는 겸손’을 읽는 것이야말로 늙음을 사랑하는 일이 아니랴. 늙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영혼을 더 늙게 하고, 그 두려움은 수많은 실수를 저지르게 하여 끊임없이 고통에 시달리게 만든다.



 극사실주의 대형 인물화를 주로 그리는 강형구라는 화가가 있다. 2007년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반 고흐’ 초상은 5억5천여만 원, ‘앤디워홀 테스트’는 5억에 팔리는 등 지금도 잘 나가는 작가다. 2002년인가 친구였던 그의 전시회를 보러 상경한 적이 있다. 마릴린 먼로 등 전설의 스타들, 이병철, 정주영 등 재계 거물, 처칠, 체 게바라, 케네디, 박정희 등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정치인이 포함된 초대형 인물화들이었다. 현재형의 살아있는 모습으로 추정해낸 그의 그림은 주름은 물론 땀구멍, 솜털까지 선명하고 강렬하게 표현되었다.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박근혜가 80세의 박정희 모습을 담은 초상화를 1억 원에 구입하겠노라고 예약까지 해둔 상태였는데 막상 그 그림을 보고서는 아버지의 모습이 너무 늙어있다며 그림을 사지 않겠노라고 했다는 것이다. 한참 뒤에 동생 박근령이 사갔다든가 박태준 씨가 사갔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은데 확실치는 않다. 아무튼 작가의 의도는 죽어서 볼 수 없는 그들의 모습을 현실 속에 불러내어 그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시간과 늙음을 그림으로 재현해낸 것인데 가끔 그렇게 까탈을 부리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그는 세계 유수의 재벌들이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했지만 모두 거절했다. 물론 국내 현역 회장의 그림도 단 한 점 그리지 않았다. 그림 크기를 좀 작게 하고, 예쁘게 그려달라는 여성들의 요청에도 일절 응하지 않는다. 그가 그린 당대의 인물은 그 시대 아이콘들이며, 얼굴에는 그 시대와 사회 상황이 담겨 있다고 말한다. 그는 얼굴에 대한 유권해석은 바로 화가의 특권이라는 지론을 갖고 있다. 강형구는 유신 체제 아래의 대학시절(중앙대 미대) 부친이 훗날 대법관을 지낸 법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체 게바라를 그리다 들켜 파출소에 끌려가 곤욕을 치른 뒤 현역 입대를 종용당한 적도 있다.


 박근혜 씨가 대통령 후보시절 한 지방 신문에 실린 자신의 사진이 늙어 보이고 눈매가 표독스럽게 보인다 하여 캠프 참모를 시켜 신문사로 경고성 전화를 해온 일이 있다. 그녀가 그동안 몰래 맞았다는 태반주사니, 백옥주사니 하는 것들이 얼마나 노화를 방지하고 젊음을 유지하게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말마따나 영혼이 비뚤어지지 않고는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서 할 짓인가. 박근혜나 최순실 같은 여자에게 ‘오래된 시골정미소처럼 그렇게 늙어라’고 하면 시적 이해는커녕 아마 기겁을 할 것이다. 영원히 그 집의 푸른 기와처럼 반질반질하길 바라겠지만 어림없는 노릇이다. 발악을 하는 추한 모습을 보니 이젠 '잊힌 듯 안 잊은 듯 조용히 늙어 가'기도 어려울 것 같다( 글. 권순진)


"https://www.youtube.com/embed/5dBfPAnN6d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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