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인숙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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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못 이루는 사람들을 위하여 / 밤의 묵상

  

                                                           홍인숙(Grace)


하루 중 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간, 밤이 왔습니다.
봄의 소생을 맞기 위한 외로움의 겨울처럼 밤은 새날을 맞기 위한 인내의 시간입니다.
하루동안 스쳐 지나간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처소로 돌아가 달콤한 꿈을 꾸고,
이름 모를 풀꽃들도 살며시 눈을 감는 시간. 고요와 적막 속에 풀벌레 울음소리와,
가끔씩 밤바람 뒤로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만이 정겨움으로 다가옵니다.

하루의 바쁜 일정을 끝내고 사랑하는 가족들이 곤한 잠을 자는 시간.
온종일 나를 감추었던 화장을 지우고 격식에 매었던 옷마저 편한 옷으로 갈아입습니다.
그리고는 나만이 누릴 수 있는 자유로 빠져듭니다.
나처럼, 외로움을 잘 타는 사람, 타인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
번잡함을 못 견디어 하는 사람에게 밤은 귀한 휴식의 시간이며 행복의 시간입니다.

썰물처럼 빠져나간 일상의 빈자리에 밤과 속삭일 준비를 합니다.
가녀린 불빛 아래 조용히 음악을 듣기도 하고 밀렸던 생각도 정리합니다.
서슴없이 그리운 사람들의 얼굴도 떠올려 가슴 아파하기도 하고,
컴퓨터를 마주하고 가물거리는 모국어를 찾아나서기도 하며,
세월의 뒷문을 살짝 열고 지나온 길을 하염없이 바라보기도 합니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나만의 시간, 나만의 공간에서
지느러미를 활짝 핀 물고기가 되어 마음껏 밤의 수면 속을 떠다닙니다.
고요와 침묵 속에서 생각은 한없이 자유로워지고 몸도 예전
내 어머니 자궁 속의 편안함으로 돌아갑니다.

늦은 밤 정원을 바라봅니다.
야자수 사이로 흘러나온 달빛이 길게 누운 정원에는
자연 위에 존재하는 모든 신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뜨거운 태양아래 화려함을 뽐냈던 꽃들도 겸허히 내리는 이슬에 몸을 맡기고,
날벌레 마저 내일을 위한 휴식으로 날개를 접습니다.
매일 찾아오는 오리 한 쌍이 다정히 몸을 담그던 수영장에는 또 하나의 달이
풍덩 빠져 미소짓고 있습니다.
아침을 기다리는 적막 속에서 생각은 쉬지 않고 밤하늘 높이 떠다닙니다.
그런가 하면 어느새 나팔꽃이 만발했던 내 유년의 한옥 뜰 앞에서 멈추어
갑자기 눈시울을 뜨겁게 하기도 합니다.

나는 이 밤의 모든 것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모든 아름다운 자연을 지으시고, 내 호흡을 지켜 주시며
선한 눈으로 사물을 볼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나의 생각이 악한 것에 머물지 않게 하시려고
밤이면 하루 동안의 나의 미숙함을 그분의 이름으로 반성하게 해 주시는 분.
사랑하는 그 분에게로 향하는 묵상 속에서 밤의 아름다움은 절정을 이룹니다.
외로움도 슬픔도 밤의 정적 아래 더욱 깊이 스며들지만
내일을 바라보는 희망으로 이 밤을 소중히 보내는 행복이 있습니다.



 (1999년 8월 크리스챤 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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