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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설> 홍인숙의 시집 행복한 울림을 읽고 - 성기조

by 홍인숙(Grace) posted Nov 01,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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評說


존재의 의미와 고독에 대한 해석        

           ― 홍인숙의 시집 행복한 울림을 읽고


                                                                               성 기 조 (시인, 한국교원대 명예교수)



1.

  홍인숙의 미국식 이름은 ‘Grace 홍’이다. 그녀가 살고 있 는 곳은 미국이다. 때문에 그녀는 미국식 이름으로 개명하고 지금까지 시를 쓰고 있다. 한국에서 그곳으로 떠난 지도 꽤 오래되었다. 서울에 살며 시를 쓰던 그녀가 미국에 뿌리내리 게 된 동기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고국의 언어와 문자를 끼고 살며 아름다운 시를 써내고 있는 일은 아주 자랑스러운 일이다.

  모임에서 만나도 말이 없이 미소만 날리는 그녀는 操身 조신 한 태도와 똑떨어진 말씨로 瑞氣서기를 뿜어내고 있는 사람이다. 이번에 홍시인이 시집을 낸다며 원고와 함께 평설 을 부탁해 왔기에 거절치 못하고 글을 쓰는 까닭은 평소 그 녀와의 가깝게 지냈던 정의이기도 하지만 그의 문학에 관한 깊이를 알기 때문이다.

2.

미국에 살고 있는 동포들이 이민자격으로 그 땅에 살고 있지만 지금 그곳에 살면서 한글로 문학을 하는 시인·작가 들은 수백 명에 이른다. 그들은 아직까지 이민을 현실로 받 아들이지 않고 정신작업은 우리글 우리말로 하면서 산다. 이 점이 자랑스러운 일이다.

  이를 파악한 나는 2천 년 초에 미국에 한국 펜클럽 소속 의 위원회를 워싱턴과 뉴욕 L.A, 샌프란시스코에 만들어 그 곳에 살고 있는 작가들의 한글 문학 작품들을 직접 게재할 수 있는 기관지도 만들고 문학행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만 들기 위하여 미주 펜문학상을 창설하여 해마다 문학상을 줄 수 있도록 한 바 있었다.


  이들 단체들은 지금까지도 활발하게 활동하는 모습을 보 여 한국에서는 이민문학의 한 분야로 미국 내에서 발전하는 우리 문학 작품을 눈여겨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홍인숙의 활동도 바로 이런 바탕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더욱 소중하다.

  고국을 떠나 이민 가는 일은 자신의 존재를 다시 창조하는 일이다. 살던 고향을 떠나 새로운 토양 위에서 삶을 영위해 야 하기 때문에 자신의 존재를 다시 따져 보아야 한다. 우선 간단한 물음이지만 한국에서의 자신은 누구인가, 또한 미국 에서의 새로운 뿌리를 내리는 자신은 누구인가를 따져보아 야 한다. 정체성의 혼란이다. 이런 절차를 거치지 않으면 한국과 미국 사이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누구인가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나와
나를 응시하는
저 눈동자의 열망은 무엇인가

오늘도 강물처럼 헤매다 돌아온 날
갈 곳이 없다

어둠이 어둠을 뚫고나와
빛보다 날카로운 눈으로
나의 삶을 송두리째 응시하는
두 눈동자에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

날마다 내 심장을 향해 화살을 꽂는
나는
누구인가

                                     ―시 <존재의 숨바꼭질>의 전문



  나와 존재. 존재는 하나뿐인데 여러 개의 존재로 착각하는 데서 ‘숨바꼭질’이란 말이 튀어 나온다. 한국에서의 존재와 미국에서의 존재가 제일 뚜렷해진다. 이민자들의 첫 고민은 자신의 ‘존재에 한 확인’일 수밖에 없다. 이 시를 살펴보면 ‘존재’는 참으로 여럿이다.
  가장 뚜렷한 것이 살아가는 나의 존재이겠고 둘째가 갈 곳이 없는 나일 것이다. 이 두 가지가 확정되더라도 ‘숨을 곳이 없는 나’란 생각과 ‘날마다 내 심장을 향해 화살을 꽂는 나’를 생각하게 된다는 홍시인의 진술에서 느껴지는 불안과 그 불안을 잠재우려는 자신의 존재에 한 신뢰가 중요해진 다. 사람들은 자기를 과거 속에서 찾던지 아니면 미래 속에 서만 보기 때문에 자신의 존재를 말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갖 는다.
 
  R.데카르트의 말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 재한다고 하고 말하는 그 결론이 참된 것이라고 우리는 믿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것은 자기의 사상을 질서있게 체 계를 세워가며 발전시켜가려는 사람에게 언제나 최초를 나 타나는 가장 확실한 결론이다.
  우리나라에도 왔던 C.V.게오르규도 “존재한다는 것은 곧 선을 의미한다.”고 말하였다. 이 말을 생각해보면 시인으로 서 존재한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선을 의미하게 만드는 게 분명하다.

 “오늘도 강물처럼 헤매다 돌아온 날 / 갈 곳이 없다 // 어둠 이 뚫고 나와 / 빛보다 날카로운 눈으로 / 나의 삶을 송두리 째 응시하는 / 두 눈동자에 /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 <존재의 숨바꼭질>에서”란 표현에서 느끼듯. 숨바꼭질하는 자신의 존재를 더 감출 수는 없다. 때문에 홍인숙은 미국에서의 존 재와 한국에서의 존재를 분간하면서 이민살이를 해야 하는 일에 직면해 있다. 
  존재한다는 것은 결국 낡아간다는 사실을 알아가면서 삶 을 영위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있다. 자신의 존재에 관 한 깊은 생각을 나타낸 또 한 편의 시가 있다.

적막한 밤이어도
나쁜 꿈에서 깨어나
만나는 어둠은
얼마나 반가운가

현실과 꿈의 거리를
더듬던 암흑에서
한 줄기 불 밝히고
나를 찾은 밤

생과 사의 폭이
지척임을 알게 해 준
한밤 중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온 세상이 아름다운
감사함이여
                                           ― 시 <존재함에 아름다움이여> 전문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존재를 확인하는 홍시인은 스스로 의 존재를 확인하고 감사한다. 소설가 김동리는 존재를 무한 적 존재와 유한적 존재로 구분하고 “인간은 유한적 존재인 동시에 무한적 존재”라고 말하였다. “생과 사의 폭이 / 지척 임을 알게 해 준 / 한밤중에 /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 온 세상 이 아름다운 / 감사함이여”를 이해한다면 인간은 살아서의 존재와 죽은 뒤의 존재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생전의 존재와 죽은 뒤의 존재가 엄연하게 구별된 다. 생전의 존재는 살아있음의 존재감이 신한다면 죽어서 는 생전의 일과 생각, 행동을 정리하고 평가한 역사의 기록 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친했던 국회의원이 있었다. 자신들은 생전에 부지런히 활 동하지만 죽고 나면 생물연와 정치가란 기록만으로 남는 다. 그런데 시인과 작가들은 작품은 물론 살아서 활동하던 일화까지 소상하게 남는다고 부러워하던 일이 기억된다. 살 아서의 존재감뿐 아니라 죽어서도 뚜렷한 존재를 남기는 일 은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생과 사의 폭이 / 지척임”을 알아야 한다는 목 에서 홍시인의 ‘존재’에 하여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시인은 문자로 단순한 예술행위만하는 게 아니라 인생의 깊이 있는 성찰까지 이루어내고 고도의 철학적 경지 에 이르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목이다. 모든 존재는 다음 순간에 일어날 가능성 앞에 떨고 있는 전율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전율을 잠자코 있는 세계에서는 자유란 이름 으로 불려지기도 한다.

팔랑이는 나뭇잎 하나에도
우주가 흔들리고 있음을
나는 안다

바로 그 날
창 밖 하늘거리는 나뭇잎새에
서른 살 청청한
내 목숨을 걸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
그 길지도 않은 생명줄에
고집스레 내가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 <흔들리는 나뭇잎새에도 우주가 있다>의 전문

  이 시의 제목. ‘흔들리는 나뭇잎새에도 우주가 있다.’란 문 장에 주목해야 한다. 나뭇잎새는 하찮은 것이다. 바람이 불 면 떨어지고 낙엽이 지면 곧 흙이 되는 것. 그러나 그 존재의 의미는 우주만큼 크다는 생각에 이르면 ‘존재에 한 가치’ 는 뚜렷해진다. 나뭇잎새 하나가 우주와 같다는 사실을 알고 경악하지 않을 사람이 있는가? “바로 그 날 / 창밖 하늘거리는 나뭇잎새에 / 서른 살 청청한 / 내 목숨을 걸었기 때문이 다”에 이르면 나뭇잎새 하나가 서른 살 청청한 목숨과도 같 다는 의미가 된다.
  이에 이르면 서른 살 청청한 목숨은 홍시인일 수 있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저마다의 사람은 각기 우주를 하나씩 가슴 에 안고 산다. 나뭇잎도 마찬가지이다. 홍시인의 존재가 우 주이듯 나뭇잎새도 하나의 우주가 된다는 등식에 이르면 홍 시인은 서른 살 때 목숨을 걸만한 큰 결단을 내렸다는 결론 에 이르게 된다. 바로 미국으로 이민 가는 결단을 내린 것은 아닌지? 사람이 결단을 내리는 일은 삶의 방식과 존재의 의 미를 바꾸는 혁명적인 일이다. 그런 엄청난 일을 단행하고 “그 길지도 않은 생명줄에 / 고집스레 내가 / 매달려”산다는 목에서 홍시인의 존재감은 뚜렷해진다.

  인생과 우주, 나뭇잎새와 사람, 인생을 우주에 비하면 사 람은 너무 왜소하다. 그러니 왜소한 사람일지라도 우주를 움 직인다. 인간은 생각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과학적 사 고와 철학적 사유. 우주의 이치를 깨닫는 궁리에 이르면 인 간은 참으로 위해지게 마련이다. 인간이 창조하는 예술, 지고지순한 진리. 도덕과 윤리를 뿌리로 삼는 인생의 삶은 한없이 아름답다.
  여기에 시가 겹쳐진다면 인생의 삶은 최고의 경지에 이른 다. 이 지경에 이르면 윤동주의 서시에 나타난 ‘나뭇잎’과 홍인숙의 ‘나뭇잎새’ 하나의 경지가 무엇이 다른가. 모두 생명이고 인생이고 순수이고, 작지만 하나의 독립된 목숨인 것 이다.
  독립된 목숨들은 ‘하나의 존재’이다. 무수한 존재들은 다 음 순간에 일어날 가능성 앞에서 떨고 있는 전율이라고 앞에 서 지적했지만 전율은 곧 자유라고 말할 수 있다. 존재와 자 유는 인간이 추구해야 될 최상의 가치가 된다.


우리는 모르지요. 이국 해변가에 남겨진 육중한 전설을. 지난날 의
서늘한 흔적들을. 세상길 돌고 돌아 첫 만남의 거리가 낯설지 않아
수많은 인파 속 갓난아이 품에 안고 구걸하던 여인 곁에서도 나는
누구일까, 어디서 왔을까, 궁금하지 않았어요.

하늘 아래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다 영원히
사라지고, 나 또한 광한 세상에 하나의 입자로 떠돌다 어 느 날 한
모퉁이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을. (이하 생략)

                                       ― 시 <흔적 / 크로아티아의 집시>의 전반부

  크로아티아, 1941년 크로아티아가 독립을 선포하고 난 뒤,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는다. 안테 파벨리치의 통치를 받게 되지만 그는 잔인했고 폭력적 독재정치로 소위 ‘인종정화’를 내세워 세르비아인, 유인, 집시, 반파시스트 크로아티아인 들을 학살했다.
  그 뒤 1991년 크로아티아 독립전쟁 때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다. 이런 질곡 속에서 인간의 생명과 존재의 식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었겠는가. 홍시인은 이곳을 여행하 고 두 편의 시를 남겼다. <흔적 / 드브로브닉 성벽에서>와 <흔적 / 크로아티아의 집시>이다. 드브로브닉 로브리에 나 쯔 요새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요새 중의 하나이다.  
  아드리아 해를 조망할 수 있는 절벽에 있고 서쪽에서 오는 적 을 막으려고 지어졌다. 그러나 이런 아름다움이 있어도 사람 의 생명이 파리목숨이었다면 존재의식은 실종된다. 두 편의 시 모두가 인간생명에 한 외경을 전제로 생명경시 사상을 꾸짖는 무게감이 있다. “나 또한 광한 세상에 하나의 입자 로 떠돌다 어느 날 한 모퉁이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을 걱정하는 홍시인의 허망한 심정은 결국 아무 의미 없이 죽어 간 사람들의 넋을 가슴 속에 넣고 있기 때문이다. 처절한 감 마저 든다. 인간의 존재는 유한적이기도 하지만 무한하다는 것도 동시에 느끼게 하는 처절한 생각이 드러나 있다.

  “아직도 전흔이 남아 공간적 이질감에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까마득한 발아래 전설의 도시, 벅찬 흔적을 품고 있고 숭 고한
거리에는 슬픈 사연들이 바람으로 흩날리고, 나도 작은 점
하나로 차가운 성벽 비바람 끝에 매달렸다”
― (흔적 / 드브로브닉 성벽에서의 일부)는 이 시의 한 구절을 읽으면서 크로아티아 사람들의 고통을 함께 느낀다.
  아드리아 해를 내려다볼 수 있는 아름다운 절벽, 까마득히 멀리 있는 도시가 인간 살육의 현장이 된 역사를 가슴 속에 느낀다. (벅찬 흔적을 품고 있는 숭고한 거리), “슬픈 사연들 이 바람으로 흩날리고, 나도 작은 점 하나로 차가운 성벽 비 바람 끝에 매달렸다”는 표현에서 크로아티아의 아픈 역사를 읽는다.
  인간은 이념 앞에서 목숨도 존재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비극, 파괴와 살육이 춤춘 광란의 도시를 상상하는 홍시인의 가슴에는 목숨, 존재, 이념, 죽음 등, 갖가지 공포의 현장만 떠올린다. 그러면서 그 속에서 살아남는 생명에 한 외경을 이 두 편의 시 속에 담고 있다.

3.
  존재에 한 고민 다음에는 죽음에 하여 생각해 보아야 한다. 목숨이 붙어 있는 것, 인간이다. 목숨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죽음, 그러나 죽음은 뒷날 명성(이름을 날리는)이라는 것을 남겨 한 인간이 존재했음을 확인시켜 준다. 인간은 무 한을 인식할 수 있는 유한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인간은 유한적일 수 있고 또한 무한적 존재일 수도 있다. 삶과 죽음의 관계를 성립시키고 존재와 무존재를 확신 시키는 일까지 도맡는다. 뚜렷한 존재를 가진 사람은 치열한 삶을 살아냈고 존재감이 없는 사람은 치열하게 살아보지 못 했다. 이것이 인생이다.

인생 한 막 무에 불꽃이 꺼지고
밀려나가는 검은 상복 무리 뒤로
빈 의자들의 침묵이 무거운데
구겨진 순서지 한 장 손에 쥐고
미련의 눈빛 거두지 못하는 건
금세 허무라는 이름으로 떠나버릴
풍선을 잡으려는 아이와 무엇이 다를까
아이의 손 떠난 풍선이
허공 돌아 하늘 속 가물가물 사라진다
삶의 끈을 놓친 사람들도
하나, 둘, 또는 여럿, 소리없이 사라진다
분주했던 세상, 그러나
살만큼 살아 본 세월
시간을 초월하는 평안함으로
이제는 더 멀리, 더 높은 곳
영원한 곳을 바라보고 싶다

                                                 ― 시 <삶과 풍선>의 전문

  삶과 죽음의 관계를 명료하게 나타내고 있다. 삶의 무게가 천근이라면 죽음은 풍선이란 생각. 인생을 무게로 따지면 가 능하다. “구겨진 종이 한 장 손에 쥐고(장례식 순서지)미련 의 눈빛 거두지 못하는 것”, 아직 살아서 조문 온 사람이지만 이들도 곧 “허무라는 이름으로 떠나버릴” 것이다. “풍선을 잡으려는 아이와 무엇이 다를까” 다를 것이 없다. “아이의 손 떠난 풍선이 / 허공 돌아 하늘 속 가물가물 사라”지는 것을 보고 죽어가는 목숨과 같다고 진술하는 홍시인의 死生觀 사생관은 달관에 가깝다. 삶의 끈을 놓친 사람, 죽은 사람을 생각하는 목에서도 논리적이다.
  첫째, 살만큼 산 사람, 둘째, 시간을 초월하는 평안함으로 생을 마감한 사람, 셋째, 영원을 생각하고 눈을 감은 사람으 로 분류하는 목에 이르면 숙연히 머리도 숙여지지만 인간 의 존재에 한 평가로 유한적인 목숨을 유지하고 있을 때의 평가와 죽은 뒤의 무한적인 평가가 있음을 명확하게 구분한다.
  삶은 엄숙하고 존엄하다. 때문에 인내가 있고 고통이 뒤따 른다. 그러나 죽음에 이르면 “밀려가는 검은 상복 무리 뒤로 빈 의자들의 침묵만 무거운” 허망함으로 뒤따른다. 목숨은 생명이요, 죽음은 생명의 종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에 하여 많은 사람들이 남긴 명언을 되짚어 보면 소크라테스는 사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 바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L.A.세네카는 인간의 일생을 죽음으로의 나그네 길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또한 삶을 배우려면 일생이 걸린다고도 말했다. 실낙원을 쓴 J.밀턴 은 생명을 사랑하지 말라. 그리고 미워하지도 말라. 사는 데 까지 잘 살아라. 그 길고 짦음을 하늘에 맡기라고 실낙원 에서 말하고 있다. 우리들에게 가장 와 닿는 말이다.

슬픔이 깊으면 시가 써지지 않습니다.
행복에 취해도 시가 써지지 않습니다
몰입되어 있는 감정에서
한 발자국 물러나
담담히 조율할 수 있을 때
한 줄의 글로라도 나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슬픔이 깊어도 감사하려 합니다
행복이 넘쳐도 겸손하려 합니다

세상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걸
살아 갈수록 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라도 시를 쓸 수 있는 날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시 <내게 남은 날은> 전문



  어떤 삶이 좋은 삶인가? 삶의 기쁨은 참으로 크다. 그러나 지각 있는 삶이라야 기쁨은 더욱 크다고 J.W.괴테는 말했다. 지각없이 가볍게 살아가는 일이나 인생의 깊이를 느끼지 못 하는 삶은 헛사는 것이란 생각은 괴테뿐만 아니라 누구나 느끼게 된다.
  사람이 일생을 통하여 살아가는 일을 생각하지 않으면 그 의 삶에는 아무것도 없다. 삶은 平定心평점심을 가져야 한다 는 홍시인의 생각에 일을 당할 때마다 “몰입되어 있는 감정에서 / 한 발짝 물러나 / 담담히 조율할 수 있을 때 / 한 줄의 글로라도 나를 바라볼 수 있;다”는 생각, 언제나 겸손하고 (세상 모든 것이 영원치 않다는 걸) 항상 남을 배려하는 삶 을 영위해야 가장 행복하다는 결론은 누구나 수긍이 된다. 홍시인 자신의 삶의 무게를 따져보며 살아가는 일생을 뒤돌 아 보는 일이기에 이런 생각은 더욱 값지다.

4.
  사람이 살아가는 방법을 따져보면 두 가지가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회의 변화를 따라서 살아 가던가 아니면 자연에 숨어 자연을 따라 살던가? 이 두 가지 방법을 혼용해서 사회와 자연을 적당히 왕래하면서 살아가 는 방법을 찾아야 하지만 개 마지막 방법은 제치고 위의 두 가지, 사회와 자연만을 치부한다. 그러나 가장 잘 사는 방법은 인생과 자연의 조절임을 알아야 한다.
  A.쇼펜하우어는 인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인생은 한마디로 악이라고 했다. 왜 인생이 악일까? 고통을 참아내는 인내와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일반적인 목표를 이 루어내려면 얼마나 힘이 드는가. 따져보면 인생이 악일 수 있겠지만 착한 것, 선한 것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진다면 인생 은 살아볼만한 것이다. 그래서 삶은 화려하기도 하고 누더기 같은 시기가 존재하기도 한다. 때문에 인생은 어떻게 사느냐 가 문제가 된다.

오늘도
어제도
그제도 시를 썼다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시를 쓴다

그러나 내 앞엔 언제나
백지 한 장
눈물에 젖는다

                                      ―시 <고독>의 전문

  인생은 만나서 알고지내며 사랑하고, 헤어지는 것이 모든 인간의 슬픈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그 슬픔은 값진 경험의 축적이며 살아나가는데 있어서 훈장처럼 빛난다. 홍시인은 ‘고독’이라는 제목을 달고 인생을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 신의 인생’을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 덧없는 안개”라고 작 품<詩心시심>에서 밝히고 있다. 그러나 시인으로 활동하 는 일이 과연 ‘덧없는 안개’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이런 홍시인의 견해에 반한다.
  B.A.W.러셀은 ‘사랑이 있는 기나긴 화’란 글에서 인간 의 삶이 무언가를 조금이라도 인식하는 사람이면 살아가면 서 누구나 각기 떨어진 영혼이라는 이상한 고독감을 느끼게 된다고 말하였다.
  쉽게 말하면 생각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고독감을 느낀 다는 말이다. 홍시인은 ‘고독’이란 시에서 언제나 시를 쓰면 서 고독감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백지 한 장을 앞에 놓고 눈 물을 흘린다는 표현은 눈물로 시를 쓴다는 말에 지나지 않는 다. 고독이란 말은 우리가 살아오면서 배운 말이다. 이 말을 배우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시간을 참아왔는가.
  우리들의 넋과 혼을 정제하고 마음 속 깊은 신앙까지도 밀쳐 놓고 고독이란 말을 먼저 배웠다. <고독>이란 시를 찬 찬히 읽어보면 시가 있는 인생, 시가 있는 세월을 살아오면 서 완성된 시 한 편을 쓰려고 애썼지만 완성된 인생이 없듯, 완성된 시도 없었다는 고백이다. 인생은 강해지기 위하여 고독해야 한다고 말한다. 더구나 시인은 고독해야한다. 시인들의 고독은 더 한층 심화되고 승 화되어 孤高고고의 세계에 까지 이르기 때문이다.


잘 지내다가도
우울한 기분이 드는 건
정서적 특별활동이다
대체로 행복하고 가끔은 쓸쓸하다
때론 체로 쓸쓸하고 가끔 행복하다
요즘은 물 위에 부유하는 느낌이다
물 위에 떠있는 것들은
존재의 가벼움으로 애틋하다
싸락눈같은 가벼움이 오히려 서글프다
온통 무거움의 틈새에서
가볍게 산다는 것은
망망해에 홀로 침묵하는 섬
숨죽여 흐르는 강물처럼 외로운 일이다

                                            ―시 <가끔은 우울하다, 그리고 외롭다>의 전문

  쓸쓸하고 외롭다고 말하는 일은 인생이기 때문이다. 이형 기의 시를 보면(‘그’란 이름의 시)“외로움이란 / 내가 그 에게 / 그가 나에게 / 서로 등을 고 울고 있는 것이다” 라고 읊고 있다. 외로움은 우울과 통한다. 우울하고 외로운 일은 시인에게는 언제나 만나는 손님과 같은 일이다.
  때문에 홍시인은 ‘우울하고 외로운’ 일은 ‘정서적 특별활 동’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릴케는 그의 시집에서(形象詩集) ‘고독은 비와 같은 것이다 / 해질녘을 향하여 바다에서 오른 다 / 아주 먼 들판에서 / 고독은 하늘에 올라가 언제나 거기 있다 / 그리고 하늘로 부터 처음으로 거리 위에 내린다’고 쓰고 있다.
  인용한 두 개의 시들(이형기, 릴케)이 모두 고독과 인생, 그리고 우울한 일상과 외로움을 내용으로 담고 있다. 이 시 들을 읽으면서 마지막 부분 “온통 무거운 틈새에서 / 가볍게 산다는 건 / 망망해에 홀로 침묵하는 섬 / 숨죽여 흐르는 강물처럼 외로운 일이다”란 목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망망해에서 홀로 침몰하는 섬에 비유한 자신을 생각해 보면 홍시인의 우울과 고독에 하여 알만하지 않겠는가.


어둠이 어둠을 안고
비추는 밝은 빛

슬픔은 슬픔을 안고
미소짓는 따뜻한 고리

낮고 습한 곳에서
피어오르는 침묵의 꽃

그 안에서
서서히 소생하는
착한
목숨, 목숨

                                          ―시 <인연>의 전문

  法句經법구경을 읽으면 인연에 관하여 자세히 알 수 있다. 어느 때, 부처님이 가시론산에서 精舍정사로 돌아오시다 길 에 떨어져 있는 종이를 보시고 비구를 시켜 그것을 줍게 하 시고 그것은 어떤 종이냐고 묻자 비구가 아뢰었다. 이것은 향을 쌌던 종이입니다. 부처님은 다시 길을 가다 새끼를 보 시고 그것을 줍게 하신 뒤 또 물으셨다. 그것을 또 무엇이냐 고. 비구는 다시 이것은 생선을 꿰었던 새끼로 아직도 비린내가 남아 있습니다 라고 답했다. 이에 부처님은 사람은 원래 깨끗한 것이지만 어진 이를 가까이하면 도덕과 의리가 높아지고 어리석은 이를 친구로 하면 재앙과 죄에 이른다. 저 종이는 향을 가까이해서 향기가 나고, 저 새끼는 생선을 꿰어 비린내가 나는 것과 같다. 사람은 다 조금씩 물들어 그 것을 익히지만 스스로 그렇게 되는 줄을 모를 뿐이라고 말씀 했다는 이 글이 인연에 한 풀이가 된다.

  어둠이 비추는 밝은 빛, 슬픔을 안고 미소 짓는 따뜻한 마 음, 낮고 습한 곳에서 피어오르는 침묵의 꽃 등은 모두 인연 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 태어났다. 이런 바탕에서 서서히 소생하는 착한 ‘모습’은 인연이 있기 때문이란 홍시인의 해 석은 그야말로 인연을 전체했기에 가능하다. 인연을 아는 것은 깊은 사유의 세계를 거쳐야만 가능하다.
  통찰과 사유를 통하여야만 인연을 만날 수 있기 때문에 깊은 물속에 잠기듯 감정의 밑바닥까지, 인연이 숨 쉬고 있는 밑 바닥에 이르기까지 깊은 생각에 잠겨야만 발견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홍시인은 이 경우를 “서서히 소생하는 착 한 목숨”이라고 읊고 있다.

5.
  지금까지 홍인숙Grace시인의 시를 3부로 나누어 2에서 는 생명과 존재에 하여(존재의 숨바꼭질, 존재함에 아름다 움이여, 흔들리는 나뭇잎새에도 우주가 있다) 깊이 있게 살펴 이민 사회에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존재의식과 정체 성 찾기에 관하여 알아보았고 3에서는 삶과 죽음이란 전제 아래 인생과 삶의 무게에 하여(삶과 풍선, 내게 남은 날 은) 살펴보았다. 살아가면서 맞게 되는 사회적 변화와 자연 에 순응하면서 살아가는 두 가지 관점에서 이를 조절하면서 살아가는 지혜에 관한 홍시인의 철학을 살폈다.
  4에서는 인생과 시에 한 고민을 엿보는 목이었다. 인 생은 치열하게 살아가거나 무관심하게 제3자적 입장을 취하 면서 소극적으로 살아가기도 한다. 이런 현상을 <고독>과 <가끔은 우울하다. 그리고 외롭다>와 <인연>이란 세 편의 시를 입해서 살펴보았다.
  홍인숙Grace시인의 인생관 내지는 삶의 태도와 의지, 그 리고 ‘존재’에 한 고민을 알아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 다. 그러나 이 모든 분류나 해석은 오로지 필자의 독단적 의 견이기 때문에 오류일수도 있다는 전제하에 이 글을 읽는 분들의 높은 식견에 따라 변모될 수 있음을 전제로 한다. 한 사람의 시인이 오랫동안 생각하고 인생을 통찰하면서 써놓은 작품에 관하여 말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움이 따른다 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하여튼 홍시인의 작품을 한 번에 읽을 수 있는 기회가 있어서 행복했다는 것을 말씀 드린다.
  그리고 1과 5는 이 글의 도입부에 해당하는 부분이고 5는 결론에 이르는 글이기에 더 자세하게 언급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