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인숙의 문학서재




오늘:
2
어제:
7
전체:
457,373


수필
2016.11.07 13:19

또 다시 창 앞에서

조회 수 45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또 다시 창 앞에서 /   홍인숙(Grace)



  
중학교 이 학년 때였다. 교내 백일장이 열리었다.
참가하는 친구를 따라갔었다. 열심히 쓰는 친구 옆에서 실컷 놀다보니 슬그머니 나도 한번 써
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마감 시간 십 오 분전을 알리는 사일렌 소리를 들으며 서둘러 써내고는 잊고 있었던 것이 운
좋게도 중. 고등학교 전체 장원으로 뽑혔다.
그날의 시의 주제가 바로 지금도 잊지 못하는 [창]이었다.

그때의 철없던 소녀가 삼십 년이 지난 오늘, 삶의 내음이 구석구석 밴 중년의 길목에서 뜻밖에
한국 일보 [여성의 창]지면을 맡게 되었으니 새삼, 이 창이라는 낱말이 각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유난히도 까탈스럽고, 무엇이든지 완벽해야만 직성이 풀렸던 나의 학창시절에 비쳐진 창 밖의  
세상은 내 척도로 재어 판단하는 만만한(?)한 세상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정지되어 있을 것 같던 그 오만과 후회의 세월은 덧없이 가 버리고, 이제
는 나 자신도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느슨하게 삶에 침잠 되어 허우적거리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열병을 치르듯 외로움을 타며 나름대로 터득한 삶의 적응책으로 가슴 깊이 간직
했던 꿈을 하나 둘 포기하기로 하였다. 처음에는 무척 힘이 들었다.
하지만, 차츰 익숙해지다 보니 이제는 오히려 그 꿈과 오만이 가득했던 자리에 슬며시 열등감
마저 비집고 들어올 정도가 되었다.
나의 자포자기(?)와 천국에 소망을 둔 종교가 만들어 낸 새로운 나의 모습이다.

가끔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볼 때, 너무 쉽게 모든 것을 던져 버리고 사는 것이 아닌가 은근히
걱정도 된다. 하지만 창에 코를 대듯 바싹 세상을 보는 것보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볼 때, 오히
려 더 크고 많은 것을 볼 수 있으리라 자위하며,  얼룩진 창으로 바른 사물을 볼 수 없듯이 허공
으로 떠도는 나 자신을 더욱 추슬러 좀더 진실한 마음으로 주위를 돌아보려 노력하고 있다.

이제는 사십대도 중반의 창턱에 서 있다. 아직도 가끔은 가슴 깊은 곳으로 쌉싸르한 아픔이 맴
돌다 간다.
하지만 어쩌랴.
이, 세상으로 치닫는 욕망의 끈을 푸른 하늘가로 하나, 둘 슬쩍슬쩍 놓아 버릴 때 비로소 난
자유로워지는 것을.


< 1995년 한국일보 / 여성의 창>




?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 홍인숙(Grace)의 인사 ★ 1 그레이스 2004.08.20 1601
269 마주보기 홍인숙 2003.04.26 568
268 자화상 홍인숙 2003.05.12 539
267 단상 내 안의 그대에게 (1) 홍인숙(그레이스) 2004.07.30 967
266 사랑의 간격 홍인숙 2003.05.12 565
265 수필 새봄 아저씨 (1) 홍인숙 2003.05.31 758
264 수필 새봄 아저씨 (2) / 아저씨는 떠나고... 홍인숙 2003.05.31 927
263 어머니의 미소 홍인숙 2003.06.23 591
262 시와 에세이 시인과 열 두 송이의 노랑 장미 홍인숙 2003.06.26 1031
261 안개 자욱한 날에 홍인숙 2003.08.03 590
260 당신의 꽃이 되게 하소서 홍인숙 2003.08.07 940
259 시와 에세이 수국(水菊) / 어머니의 미소 홍인숙 2003.08.07 1156
258 가을이 오려나보다 홍인숙 2003.09.08 528
257 날개 홍인숙 2003.09.08 580
256 비밀 홍인숙 2003.11.05 482
255 삶의 뒷모습 <시와 시평> 홍인숙 2003.11.05 548
254 그대 누구신가요 홍인숙 2003.11.05 493
253 문을 열며 홍인숙 2003.11.06 506
252 겨울 커튼 홍인숙 2003.12.01 503
251 아버지의 단장(短杖) 홍인숙 2003.12.01 579
250 수필 삶 돌아보기 홍인숙 2003.12.02 868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17 Next
/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