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또 다시 창 앞에서

by 홍인숙(Grace) posted Nov 07,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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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다시 창 앞에서 /   홍인숙(Grace)



  
중학교 이 학년 때였다. 교내 백일장이 열리었다.
참가하는 친구를 따라갔었다. 열심히 쓰는 친구 옆에서 실컷 놀다보니 슬그머니 나도 한번 써
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마감 시간 십 오 분전을 알리는 사일렌 소리를 들으며 서둘러 써내고는 잊고 있었던 것이 운
좋게도 중. 고등학교 전체 장원으로 뽑혔다.
그날의 시의 주제가 바로 지금도 잊지 못하는 [창]이었다.

그때의 철없던 소녀가 삼십 년이 지난 오늘, 삶의 내음이 구석구석 밴 중년의 길목에서 뜻밖에
한국 일보 [여성의 창]지면을 맡게 되었으니 새삼, 이 창이라는 낱말이 각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유난히도 까탈스럽고, 무엇이든지 완벽해야만 직성이 풀렸던 나의 학창시절에 비쳐진 창 밖의  
세상은 내 척도로 재어 판단하는 만만한(?)한 세상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정지되어 있을 것 같던 그 오만과 후회의 세월은 덧없이 가 버리고, 이제
는 나 자신도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느슨하게 삶에 침잠 되어 허우적거리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열병을 치르듯 외로움을 타며 나름대로 터득한 삶의 적응책으로 가슴 깊이 간직
했던 꿈을 하나 둘 포기하기로 하였다. 처음에는 무척 힘이 들었다.
하지만, 차츰 익숙해지다 보니 이제는 오히려 그 꿈과 오만이 가득했던 자리에 슬며시 열등감
마저 비집고 들어올 정도가 되었다.
나의 자포자기(?)와 천국에 소망을 둔 종교가 만들어 낸 새로운 나의 모습이다.

가끔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볼 때, 너무 쉽게 모든 것을 던져 버리고 사는 것이 아닌가 은근히
걱정도 된다. 하지만 창에 코를 대듯 바싹 세상을 보는 것보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볼 때, 오히
려 더 크고 많은 것을 볼 수 있으리라 자위하며,  얼룩진 창으로 바른 사물을 볼 수 없듯이 허공
으로 떠도는 나 자신을 더욱 추슬러 좀더 진실한 마음으로 주위를 돌아보려 노력하고 있다.

이제는 사십대도 중반의 창턱에 서 있다. 아직도 가끔은 가슴 깊은 곳으로 쌉싸르한 아픔이 맴
돌다 간다.
하지만 어쩌랴.
이, 세상으로 치닫는 욕망의 끈을 푸른 하늘가로 하나, 둘 슬쩍슬쩍 놓아 버릴 때 비로소 난
자유로워지는 것을.


< 1995년 한국일보 / 여성의 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