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미워하지 않는자의 죽음

2013.12.17 10:27

김학천 조회 수:419 추천:45

    지난달 10일 LA 시몬 비젠탈‘관용의 박물관’에서 특별한 행사가 있었다. 독일 전역에서 추모 물결에 휩싸이고 있는 75주년 '수정의 밤'의 일환으로 홀로코스트 생존자와의 만남이었다. 이날 증언자로 나온 일리와 데보라 남매는 그날의 끔찍한 악몽 같은 이야기와 함께 일보직전의 죽음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도와준 친위대원을 찾고 싶다고 호소했다.‘수정의 밤, 크리스탈 나흐트(Kristall-nacht)’는 독일 나치에 의 해 유대인 말살정책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린 최초의 유대인 학살로 기록되는 사건이다. 지금부터 75년 전 파리 주재 독일외교관이 유대인 차별에 항의하는 17세의 유대인 청년에 의해 피살된 사건을 빌미로 나치는 대규모 유대인 박해를 시작했다. 독일 전역에서 유대교 회당을 방화하고 유대인 상가를 부수고 약탈하고 유대인들을 체포하여 수용소로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날 발생한 박해와 폭력으로 수많은 유대인 상점 진열대의 파손된 유리창 파편들이 반짝거리며 거리바닥을 가득 메웠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헌데  수정의 밤 사건 일주일전 젊은 친위대원이 일리와 데보라 남매의 아버지를 찾아와서 집안에 가만히 숨어있으라고 귀띔해주었다. 그리고 그의 보호아래 그날의 위기를 넘겨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이들 남매는 그가 왜 목숨을 잃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저의 가족을 살려주었는지 아직도 의문이지만 뜻하지 않은 용감한 도움의 손길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라고 했다.    사실 우리의 삶과 죽음은 아무도 예기치 못한다. 전혀 예상치 않게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이 허다할 뿐 아니라, 남은 엄두도 못 낼 좋은 일에 솔선수범 나섰다가 엉뚱하게 어려운 곤경에 빠지거나 심지어 목숨을 잃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그런가하면 살 자리로 알고 간곳이 죽을 자리임에도 뜻하지 않게 도와주는 이가 있어 살아날 수도 있고 아예 무덤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우리네 삶 안에 이 같은 일이 모르고 지나쳐서 그렇지 어디 한두 번뿐이었으랴. 그렇게 볼 때 아직도  숨 쉬고 건재하게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손길이 있어서임을 깨닫게 된다.
  문득‘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이 떠오른다. 나치시절 유대인이 아닌 독일인인 뮌헨대학생 한스-조피 숄남매와 그 친구들이 조국이 잘못하는 것에 저항하다 함께 사형을 당하면서도 아무도 미워하지 않던 그 숭고함으로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지워지지 않고 남아 살아있는 이야기이다. 당시'수정의 밤'을 기점으로 나치 대원들의 광적인 유대인 말살정책이 시작됐지만 독일 인구의 미미한 숫자 정도밖에 안되면서도 국가경제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유대인에 대한 질시 때문에 언론과 지식인들은 침묵으로 일관했다고 한다. 하지만 숄 남매는 무엇이 옳은가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독일인들의 양심을 일깨우기 위해 생명까지 내놓았다. 또,‘훌륭한 일을 해 내었다’며 숄 남매를 대견해하던 그들 부모의 의연함에 고개가 숙여진다. 단 한번인 삶에 저들과 같이 용감해지기가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죽음의 순간을 누구나 맞이하는 데는 예외가 없다는 게 참으로 공평하고 또 그 때를 모르고 산다는 게 다행인 것이 아닐는지. 증언 마지막에 일리는 그 친위대원이 아니었으면 지금 살아있지 못했을 거라고 하면서‘생명은 무작위에 의한 것인 반면 살아남는 것은 운’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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