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보리니

2012.04.17 01:56

김학천 조회 수:498 추천:102

   세계 2차 대전이 한창이던 때 이탈리아의 어느 비탈진 산등성이 길을 따라 한 젊은이가 자전거로 허겁지겁 마을을 향해 달린다. 마을 어귀에 들어서자 급히 자전거에서 내려서서 높은 종탑에 매달린 커다란 종을 울리며 주민들에게 소리친다.
‘독일 군들이 들어오고 있다!’마을은 갑자기 술렁이고 어떻게 마을을 지킬 것인가 위급한 상황에 빠진다. 독일군이 오면 틀림없이 그들의 생계의 유일한 수단인 포도주 생산품을 모조리 빼앗길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마침 모두들 대낮부터 시청 회의실에 모인 의원들은 무솔리니 정권이 무너지며 물러난 파시스트 시장 뒤로 누구를 새로 추대해야할 지를 골몰하던 중에 엉뚱하게도 보잘 것 없는 술주정뱅이 봄보리니란 인물을 시장으로 내세운다.
   그는 항상 술에 젖어 사는 무능한 공처가로 허구한 날 마누라에게 무시당하고 걷어채기 늘상인데 교활하고 잔꾀도 많은 자이다. 그런 형편없는 자가 얼떨결에 시장이 되었으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으쓱하는 기분에 들떠 술병을 들고 마을을 돌면서 취해 떠들던 그는 불현듯 언젠가 누군가에 의해 들었던 마키아벨리를 떠올린다. 그리곤 그의 군주론을 읽고 읽고 또 읽다가 한 구절을 발견하고 신주 모시듯 한다.
  ‘신의를 지키는 것이 공동의 이익과 위배될 경우 군주는 결코 신의를 지키면 안 된다’, 즉 내 개인의 신의 보다는 내 공동체의 이익을 우선해야 한다고 이해한 그는 마을을 지켜내기 위해 목숨까지 걸어야 할 행동을 결심한다.  
   그리곤 그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생명줄이나 다름없는 포도주 1백만 병을 동굴 속에 감추는 작업을 시작한다. 마을사람들 모두가 포도주 창고로부터 산 속 비밀 장소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수십 갈래로 나란히 줄을 서서 손에서 손으로 병을 나른다. 뜨거운 낮과 추운 밤을 마다않고 나르고 또 나른다. 비를 맞아가면서도 나르고 급기야 손이 부르트고 터져 병을 놓쳐 부서지기 시작해도 나르고 또 날라서 30만병만을 남겨놓고 100만병 모두를 감춘 후 벽을 막고 위장한다.   포도주가 감춰진 후, 포도주 몰수를 위해 독일군이 들이닥치는데 인솔 장교는 전쟁론의 신봉자였다. 그러나 마을에 들어온 독일군 장교는 비굴할 정도로 친절한 봄보리니 시장에 속아서 30만병만 있다는 보고를 믿는다. 헌데 이상한 것은 30만병을 모두 빼앗기면서도 마을사람들의 얼굴에 미소가 가시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퇴각시간에 가까워서야 무언가 낌새를 알아차린 독일군 장교는 마을광장에 인질을 내세우고 총을 들어 광장의 시민들을 협박하지만 마을사람들은 하나로 똘똘 뭉쳐 침묵으로만 일관하고 더 이상의 와인은 결코 없다고 할 뿐이다.
   끔적도 않는 사람들과의 싸움에 지친 독일장교는 손을 들어 엄지와 검지를 마치 총모양으로 펴들고 마을 사람들을 쭉 돌아가면서 가리키며 이렇게 말한다. ‘도대체 너희들은 어떻게 생겨먹은 사람들인가?’
   마침내  독일군이 퇴각하고 나자 봄보리니도 심각한 듯 우스꽝스러운 얼굴로 마을광장에 둘러선 사람들을 둘러보고는 독일군 장교가 했듯이 손으로 가리키며 똑같이 뇌까린다.‘도대체 너희들은 어떻게 생겨먹은 사람들이야?’
   별안간 광장은 온통 박장대소로 셰익스피어의 ‘헛소동’처럼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 후 즐거운 춤판이 일어난다. 서로 껴안고 춤을 추며 환한 미소와 안도의 환희로 그리고 하나로 뭉쳐 해 냈다는 자긍심으로 축제를 즐긴다. 결국 어벙벙한 봄보리니가 포도주와 마을을 지켜낸 것이지만 이 모두가 공동의 이익을 우선으로 했던 진정한 대표자와 그를 굳게 믿었던 시민들의 승리의 한판 굿판이었던 셈이다.
   한편 남편의 용기와 대견함을 새롭게 발견하고 처음으로 환한 미소를 보내는 아내의 엉덩이를 두드리고 당기며 춤을 추는 봄보리니, 그리고 양손을 드높이 올려 포도를 재배하는 태양과 자기가 사는 마을의 축하와 환희를 보내는 군중들과 함께하는 봄보리니의 모습에‘산타 비토리아의 비밀’영화는 그렇게 막을 내린다.
   그들은 그들의 지도자가 말로만 서민이 아니라 애초부터 그들 중의 하나였고 현재도 시장이 아니라 그들의 진정한 대표로 그들과 하나였던 것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바탕으로 거대한 무력 앞에 맞설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의 우리 정치인들이나 지도자란 인물들은 어떠한가?
   과연 모자라고 볼품없는 봄보리니 만큼이라도 공동의 이익이 무엇인지 알고 공동의 선(善)을 의식하는지 있는지 궁금할 뿐이다. (미주중앙일보, 삶의 향기, 4-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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