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와 매미

2012.04.18 07:29

김학천 조회 수:501 추천:96

  새벽 일어나자마자 세수도 못한 채 옷을 입고 문 밖에 나가는 이유는 간단하다. LA 타임즈와 중앙일보를 구독 중인데 아침나절 조금 늦게 나가면 한글판의 신문만은 누군가가 집어가서 온데 간데 없어져 만나기 어려워서이다.
  오늘도 신문을 돌릴 시간에 맞춰 부리나케 옷을 주워 입고 나갈 무렵 난데없는 매미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우리가 살고 있는 여기 LA에도 사계절이 있다고는 하나 한국처럼 그 구별이 피부에 닿는 실감이 적은 탓에 더위와 추위에 대해 거의 잊고 산지 오래이다.
  헌데 오늘 따라 들리던 맴매앰 소리가 일에 파묻혀 사느라 그저 지나는 바람소리처럼 지나쳤던 감각을 깨우는 것은 왜일까. 뒷마당 한구석 조그만 맨땅에 ‘친환경농야채’를 심어보려고 생전 하지 않던 밭갈이 농구를 사왔다. 기껏해야 집안 둘레의 얼마 안 되는 면적이긴 하나 그 동안 보기 좋은 잔디모양을 위해 돈을 주면서 자존심처럼 말끔히 가꿨던 자리에 먹거리 야채 씨앗을 뿌리기 위해서였다. 집 앞쪽이야 시의 규약 때문에 어쩔 수 없다해도 뒤란이야 어떨까 싶어 생각 한 것이 잘했다 싶던 차에 들리는 한여름 첫새벽을 알리는 소리가 참으로 신선했다.
  자연은 늘 그 자리에서 떠나거나 배반함이 없이 그저 받은 대로 제 모습을 보이는 것인데 사람들이 함부로 그것들의 생명을 다루는 것은 아닌지 갑자기 엄숙해지는 마음으로 방에 들어오다 문득 얼마 전 산호제에 사시는 큰 누님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한국 모 신문사 수장으로 있는 둘째 형님이 샌프란시스코에 세미나 차 왔다가 큰 누님 댁에 잠시 둘렀을 때 길가 쪽 앞마당에 달팽이가 극성을 보였던 모양이다. 누님이 그것들을 걷으려 하자 “그만 두세요. 한국엔 그걸 보기도 어려워요” 했단다.
  하긴 돈을 주고 정리하는 앞마당에서 개미들의 숱한 구멍들이 나를 화나게 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거기다 무얼 뿌리면 없어진다는 약 효과를 믿고 두어 번 해봤지만 누님의 말을 들은 뒤부터 그만 두었다. 하지만 저들이 주는 피해를 눈으로 볼 때마다 볼썽사나운 생각이 드는 것은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돌이켜보면 어릴 적 우리 교과서엔 개미는 먹거리를 위해 밤낮없이 일하는 위인으로 추앙 받았고 매미를 비롯한 베짱이들은 여름내 놀고먹다 추운 겨울이 닥치자 오다가도 못하는 비참한 존재로 전락시켰다.
  하지만 개미가 그 치열한 시간을 지내는 동안 그들의 숨막히는 갈등의 고통을 이겨내게 한 것이 매미가 목숨을 다해 토해놓던 노래였는지 누가 알랴. 개미의 한 일은 눈에 보이나 매미의 공적은 허공을 치는 일이라 늘 눈에 보이는 것만 귀하게 여겼던 사회문화가 한 여름 우리네 가슴을 시원히 뚫어주는 활명수 같은 존재였던 소리(음악문화)를 가볍게 여긴 이야기는 아니었는지.
  하긴 아프리카 검은 대륙의 기갈에 굶주린 모습의 뉴스를 보면 이런 말이 사치일지도 모른다. 따지고 보면 목숨보다 더 앞서는 게 있을까. 그럼에도 매미가 여전히 울어댐은 그의 태생이 그것밖에 할 줄 몰라서일 게다.
  뉴스에 의하면 이번 그리스 아테네 올림픽에 출전한 아프리카 북동부에 있는 소말리아에서 출전한 2명의 선수가 운동화를 어렵게 장만했다는 보도가 매미의 울음보다 가슴을 친다.
  개미처럼 한 눈 팔지 않고 정직하게 모은 것들을 이제 운동화 한 켤레에 감격하는 이들을 위해 쓸 때 그 눈물겨웠던 노력의 가치가 더 빛나는 것은 아닐까 신문 기사는 내게 묻고 있었다. (미주중앙일보, 이 아침에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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