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브여 그대는..

2012.05.26 01:13

김학천 조회 수:451 추천:97

  지난 일요일 지인 한분이 저녁에 초대해주셨다. 아주 애주가이신데 점점 나이가 들수록 주위 친구들이 건강상의 이유로 하나 둘 술과 소원해져가는 것을 섭섭해 하는 분이다. 그날도 좋은 와인이 있으니 같이 맛을 나누자고 하셔서 갔던 것인데 은퇴 후에도 아직까지 왕성한 사회활동을 하시는 원로 한 분도 와 계셨다. 이분 역시 두주불사이신데 한번 이야기를 시작하면 끝이 없어 그 박식함과 이야기 재주에 시간가는 줄 모른다.
  이런저런 인사로 시작해서 술이 몇 순배 지나자 초청해주신 집의 부인이 음식준비를 끝내고는 고기를 구우러 우리 테이블로 오셨다. 그래 우린 다 같이‘자, 다시 건배.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 부인을 향해 잔을 들려는 순간 뭔가 잊은 듯 한 느낌이었는데 바로 그날이 어머니날이었을 줄이야.
  돌연 우리의 구호는‘어머니날을 맞이하여!’로 바뀌어 겨우 체면을 살리는가 싶었는데 잔을 부딪치기가 무섭게 이어서 남편이, “여태까지 같이 있어줘서 고맙습니다.”하는 말로 분위기는 한층 화기애애해졌다. 순간 말없이 미소만 띄우며 고기를 굽던 부인의 손이 잠시 멈추는 듯 말 듯 바로 하던 일을 계속하며 낮은 목소리로“저도요.” 화답하는 그 입술엔 잔잔한 미소가 피어올랐지만 눈가에 물기가 보였다.
  “어이구, 오늘 아주 어려운 사랑의 고백을 하셨습니다. 하시는 김에 좀 더 하시지요.”우리가 짓궂게 놀리는 말에“ 젊어서 밖으로 많이 나돌아 다니느라 잘 돌보지도 못하고 또 워낙 술을 좋아하다보니 그게 그만... 아무튼 데리고 살아줘서 고맙습니다.” 하며 한 옥타브 높여 반 농담 반 진심으로 외치는 게 아닌가. 모두 크게 웃으며“이거 어머니날 이렇게 수고를 끼쳐서야 되겠습니까? 오늘은 우리가 모시겠습니다.” 했지만 부인은 미소로만 대답할 뿐이었다.
  허긴 특별한 날이라 해서 새삼 무슨 말을 하거나 무슨 일을 원하고 싶었을까? 아내들이란 그저 남편을 돕고 아이들을 키워내며 가사까지 몇 겹의 일들을 하면서도 속으로 앓고 속으로 타들어가도 삼키고 내색 않느라 애매한 다듬이 두드리는 방망이질 소리만 구슬프고 처량하게 박자를 타던 게 아니었던가? ‘흰 옷과 검은 옷을 따로 빨고/흠씬 방망이로 두드려 때를 빼고…/뜨겁게 삶는 일이나/마른 옷을 다듬이 방망이로 두드려 곱게 펴는 일이며… 하는 전해오는 민요에서처럼.
  영국의 역사학자 아일린 파워는 그녀의 책에서‘여성은 역사의 무대에서 자신만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건만, 역사가들은 지금까지 그 일에 대해 거의 함구하고 있었다.’고 지적한 것을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남성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온 게 아니라 오히려 여성이 남성의 곁에서 바위같이 우뚝 지켜온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게 해서 젊어서의 아름다움은 다 사라지고 눈물과 회한으로 얼룩진 모습만 남겨진 것일 게다. 마치‘개는 멀리 떨어져 있을 때도 눈과 마음은 항상 주인을 향하고 있다.’고 그녀가 말했듯이 아내의 눈과 마음 또한 언제나 오롯이 가족만을 향해서 바라보고 달려왔기 때문에. 해바라기처럼.
  토마스 무어의 시가 떠오른다. ‘당신의 아름다운 모습이 덧없이 사라진 다해도...(중략)/해바라기가 노을 지는 태양을 바라보는/그 모습은 똑 같습니다./새벽아침 떠오를 때처럼.’
  ‘이브여, 그대는 내 뼈 중의 뼈, 내 살 중의 살이니라.’
(미주중앙일보 5-2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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