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곤이 이야기

2012.08.08 04:01

김학천 조회 수:549 추천:76

그날따라 빗방울이 여우비처럼 살랑살랑 흩뿌려져 차 앞 유리창을 어지럽게 한다. 사거리 신호등이 바뀌려할 때 우회전을 하려고 오른쪽을 보고 다시 왼쪽을 확인한 후 회전하려는 순간 오른 쪽에서 검은 안경을 쓴 사람하나가 흰 지팡이를 흔들며 인도로 내려서는 걸 보자 흠칫 놀라 급정거를 하고는 한숨을 쉬었다.
‘하마터면...’

   놀란 가슴 아직 가라앉지 않은 채 사무실에 출근해서 상의를 벗어 걸고 돌아서 보니 책상가운데 메모지가 한 장 놓여 있었다. 영곤이란 사람에게서 온 메시지였는데 언뜻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다 문득 ‘혹시 그 영곤이?’
낯선 전화번호를 돌리니 부드러운 목소리가 저 너머에서 들려온다.
‘여보세요. 저 신병헌 입니다만, 누군가가 메시지를 남기셔서...’
‘아, 예. 잠깐만 기다리세요.’ 싹싹한 말끝에 잠시 다른 이의 목소리가 저 끝에서 들려온다.
‘병헌이냐? 나, 영곤이. 기억 안나?’
  아하, 그 영곤이었구나. 이 얼마만인가. 한 40년은 되었겠다싶었다.

   그 때는 대학에 입학하고 2년인가 지나서 국민학교 때 단짝이었던 그가 나를 애타게 찾는다는 연락을 누군가를 통해 전해 받았었다. 반에서 1-2등을 서로 다투는 단짝으로 매일 같이 밤늦게까지 잠을 설쳐가며 쌍둥이같이 붙어 다니면서 공부하고 숙제하고 지냈던 그와 헤어진 것은 서로 다른 중학교에 입학하면서였다. 영곤이는 수원에서 상급학교에 진학을 하고 병헌이는 서울로 진학을 하면서 이사를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곤 소식이 영 끊어졌었는데 어렵게 연락이 닿았던 것이다. 전화로 받아 적은 주소대로 찾아가 초인종을 눌렀다. 초로의 노인이 문을 열고 얼굴을 삐끗 내미는데 한눈에 보아 그의 어머니였다. ‘안녕하셨어요, 어머니.’
‘그래, 오랜만이구나. 어서 들어오너라.’ 반가워하시긴 하는데 무언가 감추려는 듯 돌리는 얼굴에 눈물이 보였다. ‘무슨?’

   어머니는 얼른 뒤로 물러나시며 옷소매로 눈가를 닦으시는데 뒤에 따라 나왔던 여인이 안으로 안내를 한다. 사촌 여동생이었다. 그녀를 따라 마루를 거쳐 이층에 올라서서 바로 마주친 방으로 들어서자 영곤이가 빙긋 웃으며 맞이한다.
‘병헌이구나.’헌데 반가워 내미는 손이 허공을 가로졌기만 하는 게 뭔가 이상했다. ‘음?’
‘오빠가 앞을 못 보세요.’ 하고는 여동생이 돌아서 내려간다. ‘앞을 못 보다니?’어찌된 일인가? 영곤이는 방안으로 병헌이의 손을 잡아끌더니 바닥에 앉는다.

   얼핏 둘러보니 방구석이 말이 아니다. 정리는커녕 여기저기 늘어진 옷들하며 가구도 그렇고 여러 물건들이 정신없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다. 아무리 앞을 못 본다고 하지만 이렇게 어수선하고 지저분하게 내버려 둘 수가 있나?  
‘놀랬냐?’하며 이야기를 꺼내는 그를 바라다보려니 마음이 저려왔다. 눈동자는 멀쩡히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데 못 본다니 실감이 안 났다. 초등학교 때부터 눈이 안 좋았던 건 알지만 시력을 잃다니. 마주 앉았는데도 병헌이의 자리를 확인하려는 듯 잠시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더니 눈동자를 허공에 고정하곤 담담히 지난 사연을 이어가는 영곤이의 모습에서 어렸던 시절의 자신들의 모습과 꿈에 만감이 교차되었다.

   영곤이는 수원에서 중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입학을 했단다. 방학 때 집에 내려와서 며칠 쉬던 어느 날 좁은 언덕길을 걸어 오르는데 뒤에서 올라오던 차에 살짝 스치는 사고가 났다. 쓰러졌다 일어나보니 큰일도 아니고 별로 다친 데도 없어서 별일 없으려니 하고 그냥 무심히 지냈다. 헌데 얼마가 지난 후 이상하게도 시력이 점점 좋아져서 웬일인가 했는데 다시 얼마가 지나면서 급속히 시력이 나빠지더니 앞을 보기 어려워지기 시작했단다. 병원을 찾아가 검사를 해보니 망막이 분리되어 나오는 증상인데 치료가 어렵다는 진단이었다. 아마도 그 때 자동차에 부딪친 충격이 원인이었던 게다.
  
   속수무책으로 멀쩡했던 시력을 잃고 하루아침에 앞을 못 보게 된 것이다. 학업을 중단한 것은 물론 앞길조차 막막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감감한 상황에서 분노와 고통 그리고 좌절을 어찌 다 설명할 수 있었을까. 한 일 년 뼈 깎는 고통으로 방황하다가 생계를 위해 침술을 배우려고 했지만 생각만큼 여의치가 않았다. 결국엔 안마를 배워 시술을 하러 다닌다고 했다.
‘맹인이 여기서 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어.’하는 목소리에 비애와 원망이 서려있다. 어느 정도 시간도 지나면서 새 환경에 적응도 많이 되고 체념하는 마음에 안정도 되고나니 웬일인지 갑자기 어려서 친했던 친구인 자기가 몹시 보고 싶어져서 수소문하여 찾았다고 했다.

   병헌이는 앞을 못 보는 옛 친구 앞에서 무어라 할 말을 잃어 가만히 그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저녁이 깊어 가는데도 그칠 줄 모르고 이어지는 그의 가슴에 뭉친 이야기들은 병헌이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에도 충분했다. 그 많은 눈물겨운 이야기 중에서도 특히 자신의 처지를 가장 비참하게 만들었던 이야기는 병준이의 가슴까지도 멍들게 했다.

   한번은 어느 가정집에서 불러 안마를 하러 갔단다. 안방인지 어느 방안에 들어가 인사를 하고 무릎을 꿇고 앉아 땀을 흘리며 시술을 열심히 하는데 갑자기 키득키득 웃는 소리가 들리는가 하더니 신음소리 비슷한 소리까지 들리더란다. 그 방안에 남자 혼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웬 여자까지 옆에 같이 벌거벗고 누워 둘이서 성애(性愛)를 벌리면서 내는 소리 였음을 알아채고는 얼굴이 화끈거리고 모욕감에 더 이상 있을 수가 없어 일어나려니까 그냥 계속 하라고 강요를 하더란다.
아무리 앞을 못 보는 맹인이라 해도 어찌 사람 앞에서 이럴 수가 있는가 하는 분노와 자신의 처참함이 느껴져 뿌리치고 나왔는데 그날 밤 정말 많이 울었단다.

   영곤이는 그 이야기를 얘기하면서 ‘나는 눈을 멀고 나서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 된 거야. 아마 짐승보다도 못했을지 모르지.’ 그러면서 옛날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었다. “클레오파트라가 가마를 타고 노예들이 일하는 곳을 지나다가 소변이 마려워 가마를 세우고 모두 보는 앞에서 하체를 드러내고 볼일을 보려하자 곁에 있던 시종이 황급히 말렸어. ‘마마, 모두가 보고 있습니다.’ 그녀는 어안이 없다는 듯, ‘보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이냐?’ 하며 호되게 꾸짖고는 일을 끝냈다지. 그녀의 눈에는 노예가 사람으로 안 보였던 거야. 단지 짐승에 불과 했던 거지.” 하며 눈시울을 붉히며 울먹였다. 병헌이도 분노에 얼굴이 화끈거림을 느꼈다.

   영곤이는 그 후 다시는 그 일을 하고 싶지 않았어도 생계를 위해선 어쩔 수 없어 계속했지만 그 일이 있은 후로는 뭔가 두려움이 엄습하고 자신이 너무 참혹해서 보통 힘든 게 아니었다고 했다. 눈을 잃었을 때 보다 몇 배나 더 큰 고통이었다고 한다.

   어느 덧 밤이 깊어 자기를 만나고 싶었던 친구를 위해 오랫동안 아무 말도 못하고 듣기만 하던 병헌이가 그곳을 나오면서 한 말은 고작 ‘미안하구나, 영곤아.’뿐이었다. 그러자 그가 두 손으로 친구의 얼굴을 만지며 ‘참으로 보고 싶었어. 그리고 너와 얘기를 나누고 싶었어.’ 하며 울먹임의 끝자락을 보였다.

   그렇게 헤어지고 병헌이는 다시 친구한테 찾아가지를 못했다. 그의 어머니가 자신을 볼 때마다 아들의 처지를 더욱 더 비통해 할 것 같기도 하고 친구의 눈을 마주 볼 자신이 없어서였다.

   그리고 세월은 흘러 어언 40여 년간 소식이 끊어졌었는데 불현듯 이번에 연락이 온 것이다. 약속을 하고나니 무척 궁금했다. 그 동안 어떻게 살아왔을까? 한편으론 다시 찾지 못했던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도 들었는데 그러고 보니 오늘따라 아침에 길을 건너던 맹인과의 조우도 우연인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외에 떨어진 한적한 방갈로 같은 집에서 만났다. 영곤이는 아내와 함께 딸을 데리고 나왔다. 그 때 헤어지고 몇 년 후 시술협회를 통해 한 여자를 알게 되었는데 자기와 똑같이 대학 다니다 사고로 실명을 한 같은 처지에서 서로 의지가 되어 나누던 하소연이 사랑의 밀어로 변하고 결혼까지 이어졌단다. 삶의 의욕도 생기고 용기도 되살아나 열심히 살다보니 생명과도 같은 귀한 딸을 얻었다.

   기특한 것은 딸이 의사가 되어 안과 의사가 되었으면 하는 부모의 바람대로 전문의가 되었는데 돈을 버는 개업의 보다는 시각장애인이 된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돕기 위한 단체를 만들어 국내는 물론 세계오지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의료 봉사사업을 하고 장애자의 권익을 위한 운동도 하고 있다고 했다.

   병헌이는 불현 듯 자기 어머니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양반신분을 버리고 스스로 백정이 되어 평생을 살고 간 한 효자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어느 날 탁발승이 집에 들러 눈먼 자기 어머니를 본 스님이 “눈먼 어머니에게 신선한 소의 간 천개를 먹으면 눈을 뜰 수 있을텐데...” 라고 한 말을 듣고 어머니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천개의 소간을 구할 수 있는 길은 백정이어야 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주저 않고 그 당시 가장 비천한 신분이었던 백정이란 모진 수모를 감수하면서도 각 고을을 다니며 소를 잡아주고 얻은 간을 바쳐 어머니 눈을 뜨게 하고 이에 감복한 임금님이 효행비(碑)를 내려 그의 효성을 기리게 하였다는 조귀천의 이야기.

   그 딸을 보며 한 이런 생각에 잠시 머뭇거리는데 영곤이는 웃음을 띤 환한 얼굴로 말했다. ‘병헌아, 나는 실명을 하고나서 잃은 것보다는 오히려 얻은 것이 더 많았어. 헌신적인 내 아내도 얻었고, 이렇듯 훌륭한 내 딸도 얻었거든. 그리고 무엇보다 난 더 이상 짐승이 아니라고 외칠 필요가 없음도 알게 되었지. 왜냐하면 난 세상엔 볼 수 있지만 보지 않는 눈 먼 사람들과 보진 못하지만 볼 수 있는 눈 뜬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고 나서 누가 더 짐승 같은지를 알았기 때문이지.’

   영곤이와 그의 아내 그리고 딸과 헤어져 돌아오면서 병헌이는 자신이 어느 부류에 속하는 지 궁금했다. 자신이 무척 부끄러웠다. 그리곤 그가 몹시 부럽기도 했다. (미주문학 2012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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