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의 의심

2011.12.13 05:41

김학천 조회 수:535 추천:145

변호사 훼데리코는 동료의 약혼자와 사랑에 빠진다. 동료는 훼데리코에게 그녀가 비밀리에 선택적으로만 관계를 갖는 아주 최고급 콜걸이라고 귀띔을 해주지만 그는 전혀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둘은 마침내 결혼을 한다.
그러나 결혼 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아내가 종종 영문 모르게 집을 비우는 것을 알게 되자 친구의 말이 떠오르게 되고 아내의 행동이나 행적이 수상쩍다고 생각하게되면서 정말 아내가 그러한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이를 확인해 보기 위해 비밀리에 부인들을 접선하고 연락해 주는 골동품가게를 알아내고는 자신이 직접 손님으로 가장하여 구체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여성을 부탁한다.
며칠이 지나 가게 주인으로부터 연락이 오는데 자신의 약속이 되어 있는 날 아내도 외출약속이 있음을 알게 된다. 긴장된 마음으로 약속된 시간과 장소에 가보았으나 상대여성이 사정이 생겨 나오지 못하게 되었다는 메시지를 받는다. 집에 돌아온 그는 자기 아내도 사정이 생겨 외출하지 않았음을 안다.
그 후로도 여러 번 자신의 약속 날과 아내의 외출 스케줄이 동시에 이루어지는데 그 때마다 이런 저런 사연으로 만남은 어그러지고 아내의 외출약속 또한 취소되고 변경된다. 모든 상황이 점점 확실하게 맞아떨어져 가면서 그의 의심은 이제 확신으로 바뀌어가고 그럴수록 그는 어찌되었든 약속된 여성이 자기 아내임을 확인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집착한다.
드디어 우여곡절 끝에 또다시 가게 주인으로부터 연락이 오고 이번만은 틀림이 없다고 믿은 그는 드디어 문제의 상대방을 만나게 되는데 방에 들어서는 여성을 보는 순간 자신의 아내가 아니었음을 알고는 미친 듯 뛰쳐나와 집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그는 자살 한 아내의 시신을 발견한다. 삶에 대한 심한 우울증이 남편과의 긴장된 관계로 악화된 결과 그녀는 스스로 생을 마감한 것이었다.
아주 오래 전 보았던 ‘약속’이란 영화 이야기이다. 의심은 상대방의 의심스러운 행위 때문이라기 보다는 주로 자신의 의심 많은 성격이 만드는 것이라 한다. 결국 의심은 의심을 낳고 더욱 심해지니 의심하는 마음을 사로잡는 올무는 바로 ‘의심의 덫’이라지 않던가.
그렇다해서 의심이라고 다 부정적이고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질투에서 나오는 의심과 의문에서 나오는 의심은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보통 ‘의심’이라고 하면 곧 믿음의 반대되는 불신 같은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러한 의심은 트집이나 시비일 뿐이고 끊임없는 정신적 고뇌에서 나오는 의심은 오히려 생산적이다.
즉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접하는 일상에 의심의 시선을 던져보고 여러 개념의 확실성을 확인해보는 데서 우리의 삶이 발전되어 가는 걸 보면 ‘의심은 우리 인간의 전유물이다’라고 한 그리스 신화가 새삼스럽지 않다.
그렇게 볼 때 우리가 ‘의심 많은 토마스’를 흉볼 수가 없는 것은 그가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 때문이 아닐까. 예수의 12제자 중의 하나로 상처를 만져보기 전에는 예수의 부활을 못 믿겠다고 우기던 토마스.
허나 그는 그의 의심을 승화시켰다는 점에서 우리와 다르다. 그분의 오상(못과 창으로 찔린 다섯 군데의 상처)을 만져보고는 자신의 부족한 믿음에 무릎을 꿇고 토해낸 ‘내 주님, 내 하느님’이란 그의 네 마디 진정한 신앙고백은 오늘날 전 세계의 신자들에게 많은 묵상을 하게 한다. (미주중앙일보, 200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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