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야기- 제11막 (끝나지 않은 엑서더스)

2012.02.01 06:34

김학천 조회 수:585 추천:143

  애리조나의 강력한 반 이민법으로 연일 많은 사람들이 다른 주로 이동하는가 하면 국경에서는 생사를 넘나드는 밀입국을 하다가 탈진과 영양실조, 사고로 죽어나가는 사람들의 시체가 발견되고 있는 사태를 접할 때마다 자유를 찾아나서는 대 탈출, 엑서더스가 아주 오래전에만 있었던 흘러간 고전사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에도 진행형이라는 데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지네트 윈터의‘조롱박(북두칠성)을 따라서’란 어린이 동화책에 다음과 같은 노래와 이야기가 나온다.  
  “조롱박을 따라가라.
   조롱박을 따라가라.
   그러면
   노인 한 사람이 너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해가 다시 뜨고, 메추라기가 울 때  
   조롱박을 따라가라.
   강둑은 확실한 지표가 되어주고,
   고목이 길을 가르쳐주리라.
   왼발, 목발을 계속 따라가라.
   조롱박을 따라가라.
   두 언덕 사이에서 강이 끝나면
   조롱박을 따라가라,
   그 건너에 또 다른 강이 있다.  
   조롱박을 따라가라“
  ‘외다리 목발 조’란 백인이 대단위 재배농장에 숨어든다. 그곳에서 노동을 하며 틈틈이 다른 노예들에게 이 노래를 가르친다. 그리곤 기회를 틈타 노예들의 탈출을 돕는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그는 그곳을 그만두고 다른 곳으로 옮겨가서
똑같은 일을 하고 또 다른 곳으로, 또 다른 곳으로... 이일을 반복한다. 그러면 노래는 점점 더 퍼져나가고 더 많은 노예가 도망하게 된다.
  조롱박은 북두칠성을 말하는데 우리식으로 국자인 셈이다. 이 노래대로 북두칠성이 가리키는 곳 북으로 북으로 계속 도망 가라한다. 가는 길목마다 여기 저기 숨겨진  약속기호나 암호를 보며 낮에는 숨고 밤에는 걸어서 강을 따라 둑을 따라 가다보면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고 그가 강을 건너 자유와 생명의 땅으로 갈수 있도록 도와준단다. 그 누군가는 목발외다리 조이고 조롱박(북두칠성)이 가리키는 곳은 미 북부의 노예자유주이거나 캐나다, 건너가야 하는 강은 오하이오 강이었다. 헌데 이는 단순히 지어낸 동화이야기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남북전쟁 전에 ‘목발외다리 조’가 있었으니 그는 다름 아닌 도망노예 흑인여자 해리엇 터브만이었다. 메릴랜드에서 노예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심한 노동에 시달리던 어느 날 도망가려는 다른 노예를 위해 항거하다가 머리를 얻어맞은 후부터 심각한 발작증세의 후유증으로 평생을 시달리면서도 노예들의 제2의 삶을 위해서 일순간도 포기하지 않았던 용감한 여성. 그녀 자신도 29세에 지하철로를 이용해 펜실베이니아로 탈출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혼자만의 자유에 만족하지 못한 그녀는‘내가 자유로운 만큼 다른 이들도 나처럼 자유로워만 한다.’는 신념으로 지하철로의 일원이 되어 노예 탈출에 발 벗고 나선다.
  당시 노예들은 글을 읽을 수 없었기 때문에 주로 퀼트를 이용해 수놓은 패턴을 창문틀이나 나뭇가지 등에 묶어 사인을 보내서 때와 장소 및 방법을 알렸다. 목숨을 걸고 도망하는 이들을 찾는 추격대를 따돌리기 위해선 많은 속임수를 써가며 위험한 모험을 감수해야만 했는데 특히 추적견의 코를 혼란시키기 위해서는 주로 물을 건너야 했다. 해서‘Wade in the water’는 흑인들에겐 새 생명으로의 길을 이르는 고난과 질곡의 역사를 말하는 한 서린 노래이기도 하다.(이는 성서의 엑서더스와 세례, 요한복음 5장 4절과도 관계가 있기도 하다.) 그녀는 무수히 많은 다양한 기지를 그 때 그때 발휘하며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수많은 노예를 탈출시켰다. 이스라엘인들이 홍해 바닷물을 건넘으로 파라오 압제자에서 해방되었고 신앙의 견진을 얻었듯이 그녀의 도움으로 오하이호 강물을 건넘으로 쇠사슬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고 새 삶을 보장받은 노예들의 수는 무려 남북전쟁 전후 1000여명이 넘었다. 이리하여 그녀는‘노예들의 모세’로 불렸다.
  후에 그녀는  남북전쟁이 발발하면서 간호사나 첩자로 활동하기도 하고 노예해방을 위해 전투에 참가하기도 하고 여성해방운동에도 적극 참여하는 등 끊임없는 일들을 했다.
  지하철로는 실제로 지하철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남북전쟁 전에 도망친 노예들을 안전지대로 비밀리에 피신시키기 위해 도망노예들과 흑인에 동정적인 북부의 백인들이 만든 비밀 조직 도망루트였는데 그들만의 은어에 주로 철도 용어들을 사용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예를 들어 탈출로는 ‘노선’, 중간 대기 장소는 ‘역’으로 불렸으며 탈출을 돕는 사람은 ‘차장’으로, 그들이 맡은 노예들은 ‘소포’나 ‘화물’로 불렸다. 탈출로는 북부 자유주나 도망노예 추적자들의 손이 미치지 않는 약속의 땅 캐나다 전체에 걸쳐 사방으로 뻗어 있었다.
  노예들의 탈출을 돕는 지하철로원들 중에는 앞서 말한 해리엇 터브먼과 프레더릭 더글라스 같은 용감한 도망 노예들을 비롯하여 윌리엄 게리슨과 존 브라운 같은 백인 노예제 폐지론자도 끼어있었다.
  1800년 코네티컷 주에서 태어난 존 브라운은 집안이 가난해서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엄격한 청교도 아버지의 영향으로 노예해방론자가 되었고 그의 집은 흑인노예들의 도망을 돕는 비밀결사‘지하철로’의 거점이었다. 그는 1849년 10월 늦은 밤 노예를 해방시키기 위해 버지니아 하퍼스페리에서 아들들과 그를 따르던 20여 명의 추종자들과 함께 90여 명의 연방군 해병대원들(연방군 대장이 후에 남북전쟁의 남군총사령관 리 장군이었다)과 치열한 총격전을 벌이는 이른바 3일 천하 끝에 포로로 잡혀 반란 및 살인죄목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그러나 그의 죽음과 미국역사에 길이 남은 처절한 이 전투는 남북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그는 또 이에 앞서 소위 ‘피의 캔자스’라 불리는 미국역사상 끔찍한 유혈사태 에도 관여했다.
  애당초 1688년 펜실베이니아의 독일과 네덜란드인 퀘이커교도에서 시작된 아프리카인 노예제도 반대는 1777년 당시 독립 국가였던 버몬트가 미국에서 최초로 노예제를 폐지하게 되고 그 후 노예제 폐지론자들의 압력으로 노예 해방을 향하여 크고 작은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나게 되면서 1808년 이후 미국으로 노예를 수입하는 행위금지로 까지 발전되었으나 아직 국내 노예 거래나 외국의 국제 노예무역 종사에는 해당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법적으로 노예제는 계속 이어졌으며 합법적으로 해방되기 까지는 60년이나 더 걸려야 했던 것이다.
  이 기간 동안 당시 미국은 북부와 남부의 노예제 문제로 모든 면에서 첨예하게 대립하는 상태였다. 왜냐하면 미국영토가 점차 확장됨에 따라 새로운 주가 생겨나고 그에 따라 노예제도에 대한 지지냐 반대냐의 선택에 따라 세력다툼이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1818년 미국 내에는 22개 주가 있었는데 각각 11개 주씩 노예주와 자유주로 균형을 잡고 있었다. 그러다가 미국역사상 최대의 땅 매매 거래인 루이지애나 매입으로 딸려온 미주리가 연방에 편입하려 할 때 문제가 생겼다. 미주리를 노예주로 받아들이면 균형이 깨질 것이므로 이를 고민하던 의회는 마침 메인주가 연방가입을 시청하자 실마리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해서 미주리는 노예주로 하고 메인주는 비노예주로 하여 전체적으로 동등한 비율로 각각 12개 주로 하되 차후에 생기는 또 다른 주들은 미주리 남단의 북위 36도 30분을 기준으로 북쪽과 남쪽을 자유주와 노예주로 한다는 새 기준을 마련하였다. 소위 '미주리 타협안' (1820년) 이란 것이다.
  허지만 멕시코와의 전쟁 후 얻은 땅 텍사스나 캘리포니아 같은 지역은 워낙 덩치가 크다보니 ‘미주리 안’에 따라 위도로 나누는 제도에 문제가 생겼다. 같은 주안에서 자유와 노예가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주들에서 노예찬성자와 반대자간에 정쟁이 격화되자  '1850년 타협안'이 통과되어 캘리포니아 주는 자유주가 되고 뉴멕시코 및 유타주는 노예제에 대한 제한이나 규제를 두지 않으며 워싱턴 DC내에서는 노예제 자체는 폐지하지 않지만 노예매매는 금지하도록 하는 규정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외에도 도망노예들에 대한 연방차원의 제재조항도 포함되어있었는데 이에 격분한 사람들 중의 하나가 스토우 부인으로 ‘엉클 톰스 캐빈’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법안을 타협시킨 더글러스상원의원은 자신의 서부철도사업 이권문제로 캔자스와 네브래스카 2개주를 신설하려했다. 이렇게 되면 '미주리 법안'에 따라 새로운 자유주가 더 생기게 되니 이것을 싫어하는 남부 주들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치게 된데다가 그 자신 또한 대선에서 지지를 얻어야 하는 처지가 되다보니 캔자스 주에 대해서는‘주 스스로가 노예제존폐문제를 결정토록 해야 한다’는 일종의 ‘주민투표원칙’을 내세운 '캔자스-네브래스카 법(1854년)'이 통과되도록 하였다.
  이는 근본적으로 ‘미주리 법안’을 뒤엎는 셈으로 새로운 주가 노예주가 될 것인지,  반노예제주가 될 것인지를 주민투표를 통해 결정하는 결과에 따라 남과 북 양대 세력의 운명이 좌우되는 사활의 문제로 되어 버렸다.
  그 시험대에 캔자스 주가 올랐다. 자연 북부 반노예자들과 남부의 노예지지자들은 캔자스로 몰려들고 물리적 충돌사태가 빈번히 벌어지는 와중에 ‘피의 캔자스 (1854-59년)’가 발생했다. 로렌 시에서 노예지지자들이 북부에서 온 자유정착민 5명을 살해하자 이에 격분한 폐지론자들이 피의 복수를 다짐하고 노예찬성론자 5명을 잡아다 잔인하게 죽였는데 그 장본인이 바로 존 브라운이었던 것이다. ‘포타와토미 학살’로 유명한 이 사건으로 캔자스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져들고 노예제를 둘러싼 문제는 점점 더 심각해져 갔다.
  더욱이 1857년 미주리 출신의 흑인노예 스코트가 제기한 자유인 소송에 대해 연방대법원에서는 “노예는 '시민'이 아니라 '재산' 이므로 소송의 자격이 없다"며 그의 청구를 기각했는데 이는 미주리타협이나 1850년 타협 등과 상반되는 선언과 다름없는 것이어서 남부와 북부간의 정치적 대립을 악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노예제를 둘러싼 전국적인 충돌의 상징이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1861년에 일어난 남북전쟁이 북부의 승리로 끝남에 따라 미국에서 드디어 노예 제도가 종식되었다. 1863년 링컨은 노예들을 해방하였으며 1865년 수정헌법 13조로 전국의 노예 제도를 금지하였다. 하지만 법은 법일 뿐 실제로 흑인들을 노예로 부리던 인종차별 의식까지 없어진 것은 아니어서 교육이나 의료시설은 물론 식당이나 교통 및 공공시설 등 각종분야에서의 차별이 100년이란 세월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에도 남북전쟁 전에 불렀던 노예들의 탈출노래 ‘조롱박 (북두칠성)을 따라서’는 죽지 않고 살아있더니 1950-60년대의 인권운동이나 민간부흥운동에 까지도 영향을 끼치고 오늘날 초등학교 교육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 결과 1955년 몽고메리 시 버스 안에서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된 로사파크의 항거는 1년이 넘는 시위 끝에 법원의 흑인차별철폐 판결로 이어지고 1963년 마틴 루터 킹의 ‘노예의 후손들과 백인주인들의 후손이 한 식탁에 앉는 날을 그리는 꿈’을 부르짖은 지 45년 후에 미국은 드디어 흑인을 대통령으로 맞이하기에 이르렀다.
  미국이 흑인노예를 잡아다 강제노동으로 지은 백악관에 그들의 후손을 상징하는 검은 대통령이 자유인으로 들어서는 데 거의 230 여년이 걸린 것이다. 그는 이 뜻 깊은 취임연설에서 앤 닉슨 쿠퍼라는 애틀랜타의 흑인여성이 투표를 할 수 있었다는 자유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고하면서 그녀의 선조는 아득한 옛날 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팔려온 흑인이었음을 알렸다. 2세기만에 일구어낸 대역사의 장인 셈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의문을 갖는다. 왜 아직도 자유와 민주주의가 꽃핀 이 나라에서 오늘도 탈출을 해야 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조롱박을 따라 길을 찾고 이들을 돕는 자들과 잡으려는 자들의 싸움은 그치지를 않고 있는가?
아직도 외다리 조가  필요하고 존 브라운 같은 이들이 피를 더 흘려야 하는가?
  흑인의 지성 윌리엄 뒤 보아는 인간의 삶에는 4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살아 움직이고, 배워 알고, 사랑하며, 꿈을 갖는 것이라 했다. 그러나 노예나 압박 받는 자에게는 이 모든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이들에게는 오로지 3개의 선택권만이 주어졌을 뿐이다.‘복종하느냐, 싸우느냐, 아니면 도망치느냐.’
허나 이 모두 역시 자유를 찾기 위해서는 목숨을 담보로 해야 한다니, 오호 통재라!
  흑인들이 팔려나가던 노예해안의 나라 가나에 있는 눈물의 엘미나 성 지하 감옥 입구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다고 한다.
   '죽은 자는 편히 잠들고, 돌아온 자는 뿌리를 찾게 하소서.'
    편히 잠든 자 그 누구였고 돌아온 자 그 누구였던가?
  조롱박을 따라 나서는 이 끝나지 않은 엑서더스가 막을 내리려면 또 다른 2세기나 더 걸려야 하는가. 오호 애재라!
(계속) (아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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