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2011.12.10 01:27

김학천 조회 수:477 추천:161

엊그제 오래 알고 지냈던 토마스 선생님으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올해 80 이신데도 아직도 사회적 활동이 대단하신 어른으로 항상 존경하던 분이신데 놀라운 내용을 담고 있었다.
‘내가 아무래도 치매의 초기 증상인 것 같아요. 이제 힘든 치열한 싸움이 내 차례로 다가온 것입니다. 내 아내가 그랬고 내 친구가 그랬듯이 나도 그 자리에 섰어요. 내가 얼마나 잘 해 나갈는지 그리고 얼마만큼 나를 지켜 나가는지 잘 지켜보세요.’
돌이켜보면 15년 전 어느 오후였나 보다. 한 초로의 부부가 병원을 찾아오셨다. 내 병원 오피스의 위치가 한국인들이 잘 안 오는 곳이어서 누가 소개한 적도 없는 초면의 손님이기에 의아해서 여쭈었다. ‘어떻게 제 병원을 알고 오셨습니까?’ 의례적으로 묻는 질문에 부인께서 먼저 말을 꺼냈다. ‘제가 오자고 했지요. 전화번호부를 뒤져보니 한국 사람이기에. 제가 평생을 남편과 살면서 언제나 이 사람하자는 대로 했어요. 헌데 이제 부터는 나도 한번 내 맘대로 하고 싶다고 투정을 했는데 마침 이(齒)가 아프다 보니 선생님 병원을 찾게 되었네요.’ 남편 분은 그냥 웃으시면서, ‘맞아요. 그러고 보니 언제나 내 마음대로만 하고 산 것 같아서 이제부터는 안사람이 하자는 대로 하기로 했어요.’ 하시자 부인도 따라 웃으셨다. 이런 계기로 이분들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토마스 선생님은 미국회사에 컨설턴트로 일하면서 틈틈이 책도 내는 아주  멋쟁이로 인정받는 인텔리셨다. 언제나 바르고 점잖으며 부드러운 성품이셨다. 그러다가 정년퇴직을 하면서 캘리포니아 남쪽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도 자동차로 거의 2시간 거리를 마다않고 언제나 부인과 함께 오고가셨다. 거의 샌디에고에 가까운 조용하고 아름다운 조그만 해변 도시였는데 특히 부인이 자동차로 바람 쐬기를 좋아해서 남편이 운전을 하려고 나서면 항상 따라나서 같이 다니기를 좋아하던 분이었다. 그러니 멀다않고 드라이브삼아 데이트 삼아 올 수 있으니 오히려 좋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정기검진 차 오셨는데 의례적 인사로 시작된 대화 속에서 무언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부인께서 하시는 말씀이 “선생님, 왜 먼 곳으로 이사를 왔어요? 그냥 같은 곳에 계시지. 좀 머네. 먼저 곳이 좋았는데요. 도로 옮겨요.”  
“?” 갑자기 이게 무슨 말씀이신가? 속으로 의아했다.
그리곤 문득 짚이는 데가 있어 토마스 선생님 얼굴을 바라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선생님은 무언가 인정하시는 듯 끄덕이셨다. 사모님이 치매의 시작이었다. 그래도 두 분은 변함없이 정규적으로 오시고 언제나 함께 하셨다. 같은 이야기를 종종 반복하실 뿐 아주 위험한 행동을 보이는 수준은 아니어서 치과치료도 잘 받으시고 집에서도 별 큰 탈 없이 지내신다며 그나마 다행이라고 안도하시며  5년이 지난 어느 날 선생님은 혼자 오셨다.  
“닥터 김. 우리 할머니 2 달 전에 먼저 갔어요.” 눈물이 그렁그렁 했다. 가라앉은 분위기에서 정규검진을 마치고 가시면서 “할머니가 언제나 닥터 김한테 고마워했어요. 그리고 자기가 한 첫 번째 선택이라고 무척 좋아했고. 나도 감사해요.”
그 후로도 선생님은 어김없이 6개월에 한 번씩 들르셨다. 언제나 한번 댁으로 찾아뵙겠다고 하고는 한 번도 방문을 못하고 기껏 전화나 이메일을 한 것이 전부일 뿐인 것이 내내 죄송하고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다.
그리곤 한 두 해가 바뀌었을까. 또 다시 검진날짜에 선생님이 오셨는데 못 뵈던 여성노인 한분과 동행이었다. ‘그새 새 부인을 얻으셨나?’ 싶었다.
‘살아서 정이 두텁던 분들이 더 외로움을 타서 오래 견디지 못하고 재혼을 빨리한다고들 하더니 그런 건가?’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런 내 마음의 기미를 알아챘는지 선생님께서 먼저 말문을 열었다. “내 대학 동창인데 집 앞 마켓에 갔다가 우연히 만났어요. 헌데 이 친구 남편과 얼마 전 사별하고 혼자가 되었데요. 자식들은 동부에 있다는데 몸이 편치 않아요. 우리 집에 와 있으라고 했어요. 헌데 지난주부터 이가 무척 아프다고 해서 왔으니 잘 봐줘요.” “아, 네. 그러세요.” 속내를 들킨 것 같아 송구스럽고 내 스스로 부끄러웠다.
헌데 이 여동창생이란 분, 이도 이려나와 몸이 말이 아니었다. 병색에 찌들긴 했어도 얼굴선이 고우신 게 젊었을 때는 꽤나 미인이셨을 텐데 몸이 성치 않아서 인지 머리도 엉망이고 옷도 대충 입은 것을 보면 나이를 먹는다는 것과 병든다는 것이 이렇게 사람을 초라하게 만드는 것이구나 생각하니 공허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곤 순간 좀 전 의아했던 심정과는 달리 선생님이 무척 안쓰러워 보였다. 본인도 이제 70의 중반에 혼자 몸을 다스리기도 힘들고 더욱이 사별의 고통이 다 가시지도 않았을 텐데 하필이면 이렇게 돌보아야만 하는 불편한 분을 또 만나야하다니. 팔자이신가 하는 타령이 절로 나왔다.
그 후에도 여동창생은 선생님과 이 치료차 여러 번 다녀가셨는데 말과 행동이 전과 같지 않았다. 그래도 전엔 비록 병으로 몸이 성치는 않아도 말씀 속에 위엄이 배여 있었는데 점차 무너져 버리더니 급기야는 이분마저 치매가 시작되고 있었다.
한 3년 그렇게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진료실을 다시 찾은 선생님은 다시 혼자이었다. 혹시 ‘결국 이 분도 돌아가셨나?’ 했는데 그게 아니고 증상이 너무 심해져서 동부에 있는 아들과 연락해서 그곳으로 보냈다는 것이다. 이 여동창생은 왜 가는지도 잘 모르는 채 아들집으로 가면서 하는 말이 ‘애들 만나고 곧 바로 다시 올게’ 했다던데.
“이제 얘기지만 선생님, 정말 힘드셨겠어요. 먼저 사모님 간호도 어려우셨을 텐데 동창생분도 그러셨으니 아주 고생 많이 하셨겠어요.”
그 분의 대답은 의외였다. “아니에요, 닥터 김. 그 사람 아니었으면 난 아마도 사별의 슬픔을 이기기 힘들었을 게고 그 암울한 시간도 견디기 힘들었을 거예요. 그 친구 덕에 동무도 하고 일도 생기고 시간가는 줄 몰랐거든요. 하느님께 감사하지. 어쩌면 그렇게 타이밍 맞게 만날 수가 있었겠어요. 내가 남을 도운 게 아니라 내가 오히려 도움을 받은 거예요. 내가 더 감사하지요.”
그 덕에 이제 무너진 마음 다잡고 혼자서 열심히 일도 하면서 집안일 돌보며 컴퓨터도 하고 글도 쓰고 할 수 있는데 할 일이 너무나도 많아서 즐겁다던 선생님. 이제 그 자신이 치매의 길로 들어서서 스스로와의 처절한 싸움을 하려고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이겨내기 위해서. 그러면서 레이건 대통령이 자리에서 물러나고 치매 진단을 받았을 때 그분이 세계를 향해 자신의 병을 알리고 이제 마지막 황혼의 여정을 시작한다며 메시지를 던졌던 그 용기를 닮고 싶고 그리고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많은 아픈 이들이 다시 일어나고 서로 함께 돕는 사회가 되기를 바라는 희망을 남기고 가는 위대함의 가치를 느꼈다고 했다.
언젠가는 누구에게나 나이와 함께 다가올 치매로 주위의 사랑하는 것들에 대한 기억이 하나둘씩 지워져갈 때 그 처참함을 어떻게 표현 할 수 있을까.
일본 작가 오기하라 히로시가 쓴 ‘내일의 기억’에서 중견회사원 사에키는 자신에게 치매가 시작된 것을 안다. 점점 소중한 것들을 뇌리에서 잃어가면서 그는 아내에게 ‘너무 슬픕니다. 당신을 알아보지 못할까봐.’라며 두려워하던 그 기억마저 지워지고 급기야 ‘미안합니다. 당신을 기억 할 수 없어서’라고 밖에 말 할 수 없었던 참담한 그의 모습에서 기억의 사형선고가 얼마나 가혹한 것인가를 절감한다. 기억에도 없는 낯선 배우자나 얼굴모르는 가족에 의지하여 살아가야하는 삶이 얼마나 외롭고 두려울까.
문득 미치 앨범작가의 '모리와 함께 화요일'에서 스승인 모리의 말이 떠오른다. "베푸는 것만이 사는 것이다" 아무도 자신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는 연약한 우리들이기에 더욱 더 서로에게 내민 손잡아주고 껴안아 부추기며 함께하는 따뜻한 동행자가 되 준다면 육신의 치유는 어렵더라도 상처받은 영혼만은 결코 외롭지 않을 거라 여긴다. 왜냐하면 비록 본인은 모든 것을 다 잊어버렸는지는 몰라도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를 기억해 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사실이 우리를 구원해 주고 삶을 이어가게 해 주는 원동력인 것이다.
내 아내가 늘 입버릇처럼 ‘기도하고 바라는 건 오직 하나. 건강하고 오래 살되 꼭 함께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 잔소리가 아닌 감사의 마음임을 깨닫는다.
(한맥, 201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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