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편지쓰기 행사에 부쳐 (님의 침묵)

2011.12.17 02:19

김학천 조회 수:599 추천:150

[아아, 님은 갔습니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운명의 지침(指針)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님의 침묵).’

일찍이 스님은 풍전등화 같던 조선의 암담한 시기에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출가를 통한 독립운동에 뛰어 들으셨습니다. 일제의 국권강탈에 분노하고 저항하는 불굴의 정신과 꺾이지 않는 기개로 ‘뒷걸음쳐서 사라져 가는’ 그 님을 안타까워하며 온 생애를 통해 민족운동에 전념하고 실천하셨던 스님.

‘많지 않는 나의 피를 더운 눈물에 섞어서, 피에 목마른 그들의 칼에 뿌리고, 이것이 나의 님이라고 울음 섞어서 말하겠습니다(참말인가요).’라던 독립에 대한 스님의 피 끓는 갈망과 얼음장 같은 의지는 우리민족의 사표이자 표본이셨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토록 바라시던 독립을 한해 남기고 돌아가셨으니 어찌 눈을 편히 감으실 수 있었겠습니까? 스님이 가신지 벌써 66년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님을 빼앗겼던 그 날 후 어언 100년이 지났습니다.

얼마 전 덕수궁 중명전이 복원되었습니다. 1897년 황실도서관으로 건립됐다가 경운궁(지금의 덕수궁) 화재 이후 고종황제께서 집무실로 쓰실 때 을사늑약과 헤이그 특사 파견의 현장이기도 했던 그 정명전말입니다. 경술년(1910)에 조선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와 대한제국 총리대신 이완용이 합세하여 군대를 동원하여 강제병합조약을 체결하면서 우리는 님을 빼앗겨야만 했었지요. 전쟁에 진 것도 아니면서 도장만 찍어 님을 남의 손에 넘겨주어야 했던 그 치욕은 패배의 굴욕도 아닌 분함과 억울함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어야만 했을까요? 나라의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겠지요. 힘이 없기도 했겠지만 그 힘을 기르려는 마음도 없었던 것입니다. 일본은 아주 오래 전부터 이 나라의 건국시발점부터의 역사를 왜곡하고 조작하고 급기야 정한론의 필요불가론의 음모를 꾸며왔음에도 소위 사대부란 자들은“군자 왈” 만 외치며 먹이를 노리는 이리의 눈초리는 모른 체 허세와 자만의 체면치레에 어리석었던 것 아니었겠습니까. 그 피를 이어받은 후손들이 오늘도 당리당략에만 눈이 멀어 온갖 궤변으로 국민을 현혹하고 있으니 어찌한단 말입니까?

어디 그것뿐이겠습니까? 스님은 조선총독부를 마주보는 것조차 싫어 북향으로 집을 짓고 등 돌리고 식량배급조차 거부하신 채 무상대도를 깨치시며 올 곧은 마음으로 항거하다 돌아가셨는데 오늘의 우리는 대항하기는 커녕 뭐 얻어먹을 것 없나 남의 집 대문을 기웃거리다 못해 깡통 찬 거지 마냥 구걸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수치인 줄도 모르고 있습니다.

남의 나라에겐 눈치 보기 바쁘고 제 나라 안에서는 서로 속이고 빼앗으면서 그것이 능력이고 자랑인양 거들먹거리기 바쁜 ‘나리’들을 닮아 백성들까지 모두가 ‘개나리’가 되어갑니다. 일이 이러하니 스님의 매서운 정신이 살아있는 심우장 그 자리 앞에 궁궐 같은 일본의 대사관저가 세워졌다는 기이한 일에도 나라 전체가 무관심 한 것 아니겠습니까?

일이 이러할진 데 기미년(1919) 고종의 승하와 함께 이 나라에서 그“님”의 그림자까지 말살해 버린 일본만을 탓할 수 있겠습니까? 스님은 언제나‘우리의 적은 그 누구도 아니요 바로 우리들 자신이다. 즉 우리들 자신의 게으름, 이것이 바로 우리의 가장 큰 원수’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님의 몸이 치한들에 유린당하고 갈기갈기 찢기고 이름도 빼앗기고 말과 글을 모르는 벙어리가 되어가니 스님은 나라를 빼앗긴 민족은 ‘호적이 없는 이’라며 암담해 하셨습니다. 하루는“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은‘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주는 것은 죄악이다.’(당신을 보았습니다)” 라는 슬픈 고함에 눈물을 흘리고 그 눈물 속에서 님을 보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조선 땅덩어리가 하나의 감옥이다. 그런데 어찌 불 땐 방에서 편안히 산단 말인가.’하시고는 차디 찬 냉돌 위에서 꼼짝 않고 앉아 생각에 잠길 때면 스님의 자세는 한 점 흩어짐이 없었습니다.
해서 창씨개명을 하고 찾아온 춘원에게 ‘네 이놈, 보기 싫다. 다시는 내 눈 앞에 나타나지 말아라.’ 하고 큰 소리로 꾸짖으셨다지요. 지식인들이 이미 스스로 그 가치를 갖지 못함에 분노하셨던 것이지요. 오늘의 이 땅 위의 소위 지식인들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나 리더들이라고 자칭하는 자들 모두가 더 이상 지식인들이 아닙니다. 칼레의 시민까지는 못 될망정 취소한의 해야 할 덕목은 고사하고 그 알량한 지식과 눈곱만한 힘이라도 있으면 그것을 최대 활용하여 말 바꾸기와 궤변으로 세상을 미혹하고 있을 뿐이니 이것이 스님께서“지(知)가 도리어 치(痴)다. 치(痴)자를 파자(破子)하면 ‘疒’ 밑에 '知'를 더한 것이 되니 아는 것이 병(病)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들 모두가 백치요 천치인 치식인(痴識人)들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럼에도 부끄러움을 모르고 오히려 얼굴을 높이 더 높이 들고 잘난 행세를 하고 으스대고들 있습니다.
‘아아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 지내는 연기인 줄을 알았습니다.(당신을 보았습니다)’라며 슬피 울던 스님. 오늘날 우리의 도덕과 윤리, 법률은 모두 날아가 버리고 있습니다. 삶의 가치, 도덕의 가치, 정의의 가치 모든 것을 땅에 묻고 탐욕과 강탈 그리고 거짓 등의 오물들만 냄새만 피우고 있습니다. 가치를 모른 채 올바른 국가관과 민족관의 혼돈에서 우리는 지금‘작은 배는 가없이 출렁거리는 달빛의 물결에 표류되어 멀고 먼 별나라를 넘고 또 넘어서 이름도 모르는 나라에(명상)’ 다다르고 있는 오늘의 우리들을 보시는 스님께서 얼마나 한탄스럽고 답답하시겠습니까?
그것은‘대지의 음악은 무궁화 그늘에 잠들었습니다. 광명의 꿈은 검은 바다에서 자맥질합니다. 거기를 가지 마셔요(가지 마셔요).’라고 간곡히 말리는 스님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가지 말라고 하시던 그런 곳으로 질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선청년을 학병으로 강제 동원하려고 혈안이 됐던 총독부가 조선인 고위관료를 보내 지지연설을 해달라고 할 때 스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 때 스님은 ‘이놈아 잘 들어라. 세상에 났으면 사람 노릇 제대로 해야 한다. 사람의 도(道)는 정의와 양심이다.’라고 벼락같은 목소리로 거절하면서 ‘너희 같은 놈들은 조금만 이익이 있으면 양심에 부끄러움도 모르고 짐승 같은 짓을 하지만 나는 죽어도 못한다. 돌아가 총독 놈에게 나를 잡아다 죽이라고 해라.’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지요. 이 말을 듣고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한 그는 ‘노약자이며 병이 있어 출입도 못 한다’고 거짓으로 보고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지요.

그런데 어찌합니까? 이제 100년이 지난 지금 호적도 없고 인격도 없는 허깨비였던 우리들이 호적을 다시 찾고 인격도 찾았지만 겉만 찾았을 뿐 아직도 생명이 없으니 말입니다. 무려 한 세기가 지났는데도 우리는 나라를 왜 일본에 빼앗겼는지에 대한 반성과 각오보다는 일본치하에서 어떻게 살았느냐에 대한 문제에만 더 급급합니다.

마치 임진왜란 후에 여성들의 정조가 유린되었는지 아니면 지켜졌는지 하는 문제에만 골똘해서 여성들의 부끄러운 죄를 씻어주고 용서함으로‘홍제동(성은으로 구제되었다)’이니 ‘홍은동(성은을 입었다)’이니 하는 동네 이름을 짓는 것으로 모든 일이 잘 청산된 듯 착각하는 아둔함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러한 그릇된 반성과 청산의 결과가 다시금 300년 후의 강제 병합으로 나라를 빼앗기는 비극으로 이어졌음에도 다시 100년 후 오늘날 똑같은 초점 흐린 과거사 정리를 되풀이 하고 있는 지금의 작태가 걱정스러울 따름입니다. 그들에게는 올바른 민족관도 국가관보다는 지켜야 할 자신들의 위치만이 더 소중한 관심사뿐 일 것입니다.
‘악한 사람은 죄의 길을 좇아갑니다. 의(義) 있는 사람은 옳은 일을 위하여서는 칼날을 밟습니다(나의길).’는 스님의 말씀대로 과연 칼날을 밟을 자가 몇이나 있겠는지요.
스님은 3.1 운동에 참여한 후 옥중에서도 일제의 회유를 물리치고 민족대표로서의 추상같은 절개를 지켰습니다. 주모자들을 사형시킬 것이란 소문이 돌자 일부 인사들이 눈물을 흘리고 통곡을 했지요. 이에 분개한 스님은 감방에 있는 분뇨 통을 던지며 ‘비겁한 사람들아 왜 우느냐? 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로 서명을 한 사람들이 맞느냐. 죽는 것이 억울하면 지금 당장 서명한 것을 취소해라.’하며 혹독히 그들을 꾸짖었다 했습니다.
그리고 출옥 후에도 스님의 쉬지 않는 민족운동은 민립대학설립운동, 농민운동, 여성운동, 신간회운동, 광주학생운동, 창씨개명 거부운동 등에 적극 참여하시고 특히 불교계의 유일한 항일 비밀결사단체였던 '만당'을 이끌기도 하셨습니다.

이렇듯 스님의 저항정신은 한 겨울의 설중매인 동시에 이 땅을 뜨겁게 달구었던 활화산이기도 했습니다. 오로지 ‘님’만을 향한 마음으로“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없어서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낡아 간다(복종).”던 스님.
스님이 돌아가신 후 만공 선사는 이제 서울에는 사람이 없다고 하여 다시는 서울에 오지 않았다고 하고 일본의 거물급 낭인 두산만 조차도‘조선의 큰 위인이 갔다. 다시는 이런 인물이 없을 것이고, 지금 우리 일본에도 없다.’며 탄식했다니 만고의 적으로부터도 칭송과 존경을 받으셨던 스님이 오늘 따라 무척 그립습니다.
그러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제 우리의 정신과 자세를 가다듬어 갈 것입니다.
‘개성 송악산에서 흐르는 물은 만월대의 티끌은 씻어가도 선죽교의 피는 못 씻으며, 진주 남강에 흐르는 물은 촉석루 먼지는 씻어가도 의암에 서려있는 논개의 이름은 못 씻는다"고 하신 그 선죽교의 피와 논개의 정신으로 우리를 재무장하면 스님이 그토록 믿고 바라시던 대로 우리의 님은‘아침 볕의 첫걸음 (찬송)’이 될 것이고 ‘얼음 바다에 봄바람(찬송)’이 되어갈 것입니다.
그리 될 것입니다.
그럼 이만, 스님 평안히 계십시오.

9월 추석에
2010년을 사는 우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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