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길을 따라오다, LA 하이스쿨 앞을 지나게 되었다. 하교시간이라, 왁자하니 떠들며 나오는 학생들과 픽업하러 온 스쿨버스들로 몹시 혼잡스러웠다. 앞 차를 따라 나도 속도를 줄이고 느긋하게 기다렸다. 

    LA 하이스쿨은 이민 초기 시절, 내가 다녔던 어덜트 스쿨이라 ‘모교’처럼 애정이 가는 곳이다. 새떼처럼 무리지어 나오는 아이들을 보니, 이민 초기 어덜트 스쿨 시절이 생각난다. 20 여년도 더 넘은 이야기다.
   매사에 서툴고 어리둥절하던 이민 초기시절, 한 일 년 정도 지나면 영어는 '도사’가 될 줄 알았다. 여기는 영어 공용인 본토요 미국 현지인이 지천으로 깔려있는 곳이 아닌가. 귀동냥을 해서라도 영어쯤이야 아이들 말대로 ‘코끼리 비스켓'이다. 엄마 말 듣고 말귀가 트였던 우리말처럼 영어도 생활 속에서 그렇게 배우면  될 거라 생각했다. 

   이민 천국의 나라, 미국. 그것도 서울시 나성구라는 LA요, 등푸른 고등어같이 싱싱한 서른 남짓의 패기 만만한 나이. 무엇이 두려우랴. 라디오야, 텔레비젼이야 틀기만 하면 쏼라쏼라 영어 천국이요 그도 안 되면 헐리웃도 가깝겠다 쪼르르 달려가 영화 한 프로씩 떼면 될 터.

   허센지 자신감인지 의기충천한 나를 보고 이민 생활 대선배이신 형부는 빙글빙글 웃으며 한 마디 던졌다. “한 번 있어 보라우. 십 년 있어도 공부 안 하면 영어가 나오나."  그러거나 말거나. 그 말도 귓등으로 흘러버렸다.  
   그런데 웬 걸? 일 년이 지나도 라디오에서 나오는 말은 웅성웅성 소음으로만 들릴 뿐, 통 알아 들을 수가 없다. 빠르기는 왜 그리 빠른지. 앞엣말 생각하고 있으면 어느 새 뒷말은 듣기도 전에 달아나 버린다. 게다가, 여기 앵커들은 이야기 하면서 왜 그리도 많이 웃어대는지. 즐기면서 일하는 것까지는 좋으나, 빠른 말에 웃음까지 섞여 나오니 짜증이 났다.

   일 년 쯤 지나니, 슬슬 생각이 달라졌다. 24시간 코리아 타운에서 맴돌고 있는 내 모습을 보니 좀 한심해졌다. 이러다가 ,코리아 타운에서 한국식으로 살다가 인생이 끝날 것 같았다. 84년 LA 올림픽 게임을 앞두고 '올림픽 에세이' 섹션을 맡아 매일 인터뷰를 나가며 일간지 문화부 기자로 일할 때였다.

   한국식 허영만 가지고 문화부 여기자로 폼만 잡다가 세월을 죽일 게 아니라, 외국 사람들도 만나고 자연스레 대화도 나눌 수 있는 직업으로 바꾸어 보자 싶었다. 그러다 보니, 영어 공부는 필수. 비로소, 영어를 좀 배워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도 기술이라더니 영어도 ‘기술’이다. 그것도 파워 기술이다. 중학교 때부터 내 평균 점수를 깎아 먹던 영어란 놈이 원망스럽고 후회스럽기도 하다. 결국, 누구나 이민 오면 밟는 첫 코스 어덜트 스쿨 등록을 일 년  반 뒤에야 했다. 그때 찾아 갔던 곳이 집에서 제일 가까운 LA 하이스쿨 어덜트 클래스였다.
   6단계 중에서 알파벳을 배우는 레벨 원을 넘어 레벨 투를 신청했다. 기초부터 철저히 배워보자는 심사였다. 또 한 가지, 전직 국어 교사로서 이 사람들은 어떻게 영어 교습을 하나 하는 초보자 언어 학습법을 엿보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이민 올 때부터,  2세들이나 입양아들에게 한글을 가르쳐 주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왔기 때문이다.

   교실 안에 들어서자, 오십 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 있는데 완전히 인종 전시장이다. 백인, 흑인, 황인종까지 피부색도 갖가지요, 와글와글 떠드는 소리도 몇 개국 언어인지 마치 외계인 세계에 온 듯 정신마저 혼미하다. 과연, 이민 천국 미국은  샐러드 볼이요 열대어들이 모여 사는 거대한 어항과 같았다. 시골 학교에서 전학 온 촌닭처럼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어디선가 하이 소프라노로 한국말 인사가 날아왔다.
   “안녕하세요? 한국분이세요?”
   한 눈에 봐도 성격이 명랑쾌활하게 보이는 여자였다. 그 옆에는 남편인 듯 얌전하게 생긴 남자분이 미소를 띠며 서 있었다.
   “아, 네에......” 당당한 모습으로 자신 있게 물어오는 그녀에게 좀 어설프게 대답했다. 하지만, 낯선 곳에서 만난 한국 사람이라 여간 반가운 게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을 ‘미세스 유’라고 소개하고 연이어 남편을 ‘미스터 유’라며 인사를 시켰다. 나이는 나보다 한두 살 많은 듯 했지만, 우리는 곧 친구가 되었다. 한국 사람은 우리 셋 뿐인 듯했다.

   그러나 딱 한 사람이 고개를 갸웃거리게 했다. 한국사람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필리핀이나 월남 사람 같기도 한 까무잡잡한 남자였다. 그런데 그 사람은 우리를 보고도 전혀 아는 척 하거나 반가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만약 한국 사람이라면, 이런 데서 만난 것도 귀한 인연이라며 분명 악수를 청할 터. 우리는 그가 한국 사람이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어찌 하다 보니 그 ‘까무’씨가 우리 옆에 앉게 되었다. 여전히 그도 나도 말없이 공부만 했다. 노랑머리 여 선생님은 재치있게 가르치진 못해도 자기 의무에는 충실한  듯 열심히 가르쳐 주었다. 쉬는 시간이 되자, ‘까무’씨는 화장실을 가는지 담배를 피우러 가는지 슬그머니 사라졌다.

   우리는 이때다 싶어 한국말로 재재거리며 수다를 떨었다. 조용한 ‘미스터 유’는 두 수다쟁이 이야기에 간간이 미소 지으며 비적극적으로 대화에 동참하고 있었다. 얘기 도중, 편한 자세로 바꾸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나는 ‘기이한’ 물건을 보고 말았다. 꺄악! 너무나 놀라 비명을 질렀다.
   “아니, 이거 <동아 사전 > 아냐?”
   책과 노트를 가지런하게 포개놓은 ‘까무’씨 책상 위에는 <동아 사전>이 버젓이 놓여 있었다.
   “어디? 어디?” 하며 ‘미세스 유’가 일어서려는 찰라, 언제 왔는지 ‘까무’씨가 빙그레 웃고 서 있었다. 나는 너무나 기가 막혀 힐난하듯 물었다.  
   “아니, 한국분이면서 몇 달 동안이나 우리를 깜쪽 같이 속이셨어요?”  
   “뭐, 일부러 속인 건 아니고. 어덜트 스쿨에 오면서 한국말은 안 쓰기로 다짐하고 와서.........”
  이때쯤 뒤통수를 긁적일 만도 한데 그는 상투적인 연기를 싫어하는 듯 두 손을 바지 포켓에 꽂은 채 빙글빙글 웃기만 했다.    
  “아니, 그러면 <동아 사전>은 안 갖고 오셔야죠?  완전 범죄를 위해서라도.......”
  ‘미세스 유’가 한 마디 보탰다.
  “나, 참. 완전히 범죄자 됐구먼. 허허. 내 언제 맥주 한 번 사리다.”
  맥주 산다는 말에 우리는 금방 마음을 풀고 친구가 되었다. 사실, 그 정도 쏘아붙였으면 됐다. 재미로 짐짓 화난 듯 더 쏘아붙였지만 그도 왜 그걸 모르겠는가. 행간을 못읽으면 진짜 내 독자가 아니듯, 속마음을 못 읽으면 진짜 한국 사람이 아니지.    
   그 이후, ‘까무’씨는 ‘미스터 전’이 되어 제대로 한국사람 행세를 했다. 볼링이 수준급이었던 그는 미안한 마음을 만회라도 하려는 듯 종종 우리를 사토 볼링장으로 데려가곤 했다. 때때로 장난기가 발동하면, 나는 “어이! 동아 사전씨!”하고 놀려먹었다. 그러면 그도 맞장구를 치며 “그 놈의 <동아 사전> 때문에 그만...'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일 년 남짓한 어덜트 스쿨을 수료한 후 우리는 헤어졌다. '미세스 유’ 부부하고는 종종 연락을 주고받는데 ‘미스터 전’은 한국으로 역이민을 갔는지 깜깜 무소식이다. 우리의 삼십 대 이민 초기 시절은 <동아 사전> 한 권  때문에 고달픈 줄도 모르고 그렇게 한바탕 웃으며 넘어갔다. 오늘 따라, 나와 이민 역사를 같이 한 내 <동아 사전>이 우리의 ‘까무’씨 소식을 궁금케 한다.

                                                                   (2009년 재미수필 제11집 수록))



* 후기 : 지금 생각해도 '까무'씨 결심은 대단했다. 몇 개월을 벙어리 행세까지 하며 빙글빙글 웃기만 했으니. 사실, 동부나 한국인이 없는 오지에 첫 발을 디딘 사람들은 그나마 필요에 의해 영어를 빨리 배운다. 하지만, 우리 같이 서울시 나성구라는 엘 에이에 사는 사람들은 24시간 영어 한 마디 안 써도 생활에 지장이 없으니 그냥 영어 하고는 담 쌓고 살게 된다. 그러다가, 영어 한국말 섞어가며 브로컨 잉글리쉬로 소통을 하다 어느 새 십 년 이십 년 세월을 죽이게 된다. 그 놈의 영어, 한국에서도 담 쌓고 살았는데, 여기 까지 따라 와 친구 하자고 떼를 쓰니 어찌 할 거나. 손님이 모두 외국 사람이니, 틀리거나 말거나 일단 쓰고 봐야 한다. 실수를 두려워 하거나, 한국식 겸손을 떨다가는 미국에서 먹고 살기 힘들다. 그리고 사실, 영어 조금 못한다고 주눅까지 들 필요는 없다. 이중언어가 어려운 건 누구에게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배우는 것도 배짱이 있어야 빨리 배운다. 영어 얘기가 나오니, 생각나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베벌리 힐스 유명 샵에서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리즈 테일러를 비롯 기라성 같은 영화 배우와 가수가 왔다갔다 해도 친구같이 지내는데, 딱 한 명이 올 때마다 까다롭게 굴고 거드럼을 피웠다. 매주 우리 가게에 들리는 CNN 유명 앵커였다. 항상 대접만 받고 살아 왔는지, 자기는 'Big Customer'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며 안하무인격이었다. 그렇다고 매상을 사우디 아라비아 공주들처럼 팍팍 올려주는 것도 아니었다. 피 뜨거운 삼십 대 초반. 나는 비위가 좀 상했다. 하루는, 바보처럼 눈을 깜빡이며 "Big Customer means … um um..."하고 더듬다가  "Oh, I see...Fat and Tall?"했더니 기암을 했다. 자기 말도 못 알아 듣는다고. 마침, 그녀가 뚱뚱하거나 크지 않아 나는 '큰 손님'에 대한 반격을 코믹하게 할 수 있었다. 속이 시원했다. 오거나 말거나 했는데, 다음에 와서는 크리스탈로 된 값 비싼 브로치까지 선물로 줬다. 받기가 좀 거북했다. 그녀는 "I know you are so sweet" 하며 어깨까지 토닥여 준다. 결과적으론, 내가 '통 큰 손님'에게 한 방 먹은 셈이었다. 하하. 하지만, 영어로 곤욕을 치르면서도 열심히 공부하지 않고 세월 뭉개고 있는 습성은 지금도 여전하다. 이 무슨 배짱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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