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 출근

2008.10.30 00:52

지희선 조회 수:980 추천:90

                                         기차 출근
                                                                    
   차를 역에다 버려두고 기차를 타면서 나만의 사색 시간을 많이 갖게 되었다. 시간과 시간 사이, 사물과 사물 사이, 인간과 인간 사이, 그 사이에 잠깐 잠깐 끼어들어 상상은 나래를 편다. 줄 낚시하듯 눈을 먼 풍경 속으로 던져보기도 하고 계곡만큼이나 깊은 사색에 잠기다 보면, 출근이 아니라 마치 여행을 가는 기분이다.  바쁠 것도 없이 쉬엄쉬엄 산마루를 휘돌아가는 기차와 함께 흐르다 보면, 느림의 철학은 저절로 터득하게 된다. 기차 출근을 하며 얻는 한 시간 반의 사색 시간. 이 시간은 잠시 순수 인간으로 돌아가는 시간이요, 평화의 시간이다. 짜증나던 먼 길이 너무 짧아 아쉬워진 것도 기차 출근 덕분이다.
   기차 출근은 기다림으로부터 시작된다. 새벽 여섯 시 오 십 오 분에 출발하여 랭카스터를 거쳐오는 앤텔롭 밸리 매트로 링크는 일곱 시 십 오 분이면 어김없이 빈센트 역에 도착한다. 일곱 시에 도착한 나는 시골 역 창문에 이마를 바짝 대고 기차를 기다린다. 기다리는 십 오 분간의 이 절실함. 모퉁이를 돌아 나오는 기차를 타고 누군가 내게로 올 것만 같다. 연인인가, 추억인가, 젊음인가. 잡을 수 없는 그 무엇은 모두가 쓸쓸한 잔영을 남긴다. 응달의 잔설처럼 애잔함으로 떠오르는 눈동자. 만남은 짧고 기다림은 늘 길었었다. 오늘따라 스쳐가는 간이역처럼 추억의 장소도 몇몇 떠오른다. 아카시아 휴게소, 에덴 공원, 태종대, 표충사........그리고 ‘크리스티나의 세계’가 걸려있던 행운 다방. 내가 걷던 그 길을 지금은 어느 젊은 연인들이 걷고 있을까.
   땡, 땡, 땡, 종소리 울리며 기차가 오고 있다. 마치, ‘아서라, 재가 되어버린 추억은 잊어버려라’하고 경고라도 해주려는 듯. 나도 정신을 차리고 일상으로 돌아온다. 테이블이 있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핸드폰과, 책 한 권, 물 한 병을 올려놓는다. 그리고  버릇처럼 이마를 창문에 바짝 붙인다. 이렇게 하면, 바깥 풍경이 거실 벽면에 붙어있는 그림 액자처럼 가깝게 느껴져 좋다.
   하늘, 구름, 산, 나무, 집, 땅, 기차....... 이렇게 위에서부터 풍경을 훑어올 때가 있고, 어떤 때는 반대로 훑어 올라갈 때가 있다. 그 날 그 날 분위기에 따라서 한참 내 마음을 붙잡고 있는 사물이 다르다. 요즈음은 유난히 ‘산’이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산을 바라보는 방법도 여러 가지라서 그때그때 느낌과 생각이 달라진다. 능선을 따라 보는 수평적 방법에 낮은 언덕부터 높은 산까지 보는 수직적 방법, 그리고 앞산에서부터 먼 산 쪽으로 보는 원근법. 여기에다 요즘 화두가 되어있는 낯설게 보기나 거꾸로 보기, 상식을 벗어나기, 자세히 관찰하기 등등을 합하면 보는 방법도 여러 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보는 관점이나 각도에 따라서 얼마나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오는지도 알게 되었다. 한 사물이, 혹은 한 사람이 타자에게 제대로 평가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새삼 생각해 본다. 나만 해도, 어떤 사람은 시베리아 삭풍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봄바람의 미풍이라고 한다. 나는 나일뿐인데. 사물도 마찬가지란 생각이 든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일뿐이지 않는가.
   하지만 섭섭해 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이렇게 각각 다른 시선들로 해 얼마나 많은 예술품들이 태어났으며, 실연으로 몸져누웠던 사람들이 또 얼마나 많이 새로운 사랑으로 치유 받았던가. 모름지기 모든 것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줄낚시 하듯 시선을 좀 멀리 던져 본다. 시에라 산맥을 타고 흘러온 산들이 부드러운 능선을 펼치고 있다. 먼 길을 달려온 산들. 세월의 풍화 작용에 마모되고 실키어 둥그렇게 변해버린 산들. 그 산들은 부드러운 능선을 통해 모난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넌지시 알려준다. 나 역시 정몽주의 단심가에서 이방원의 하여가로 바뀐 지 오래 되었다. 흑과 백을 분명히 하고 싶어 목청을 높이던 내가 언젠가부터 ‘회색분자’로 변질되어 있음을 본다. 연륜이 준 선물일까. 요즘의 나는 아른아른한 안개 뒤에 숨어있는 산들이 좋다. 한 폭의 산수화 같은 풍광도 아름답거니와, 반쯤 드러나고 반쯤 감추어진 모습이 더 문학적 상징성을 가지고 다가오기 때문이다. 사람도 그런 사람이 좋다. 한때는 안개 같이 비밀스런 사람이 싫었지만, 이젠 너무 앞장서서 나 여기 있소 하고 내대는 사람보다는 더 정이 간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열두 번도 더 변한다는데, 취향이 조금씩 바뀌는 걸 보니 나도 덜 자랐나 보다.      
   기차가 돌아들자, 먼 거리를 두고 높은 산들이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흘러가는 모습이 보인다. 마치 캉캉 춤을 추며 원무를 그리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그 중에서 가장 높은 산은 어딘지 모르게 위엄을 가지고 도도하게 자리를 틀고 앉아 있다. ‘높은 산’이라? 무언가 암시적이다. 오르고 싶었지만 오르지 못한 산. 늘 바라보고만 있었던 산. 그런 산이 내겐 무엇이었더라? 더듬고 있는 사이, 이태준이 떠오른다. 그는 '내 앞을 가로 막는 것은 모두가 산이었다'고 했었지. 암시적이고 울림이 커 긴 여운을 남겼던 마지막 말. 어릴 때 고아가 되어 생활의 어려움을 겪었던 이태준에겐 낮은 언덕도 거대한 산으로 보였으리라. 환경과 시대의 희생자였던 그에게 오늘따라 더욱 큰 연민이 솟는다.
   힘든 시대를 비켜갔음인가. 지금 창밖으로 보이는 ‘높은 산’은 퍽 친절하게 보인다. 키대로 앞산을 세워두고 낮은 언덕부터 차근차근 밟아 올라오라고 일러준다. 산과 산 사이론 강물이 흐름직한 계곡도 보인다. 그런데 기차가 끼고 도는 이 시에라 산맥 일대는 사막 기후라 물에는 인색하다. 얼마 전에 노루 두 마리가 계곡까지 내려왔다가 목도 축이지 못하고 되올라가는 모습을 보고 안쓰러웠던 기억이 났다. 하지만 물 없는 계곡은  가슴을 열어 길을 내어주고 있었다. '가슴을 열어주는 계곡'이라. 그것도 메마른 가슴이라. 그러면 산도 '어머니'였던가. 수직으로 깎인 산 속에 무수히 박혀있던 잔돌도 결국은 우리가 어머니 가슴에 못 박았던 무수한 아픔이었단 말이지. 모든 불순물을 안고도 썩지 않는 바다를 두고 늘 어머니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어머니는 산도 되고 바다도 되며 인고의 세월을 견디어 오셨구나. 높은 산을 보다가 생각은 계곡처럼 깊어져 긴 음영을 드리운다.
   생각을 묵히면, 괜찮은 수필 한 편 얻을 수 있으려나. 문학소녀의 초심으로 돌아가 메모를 해둔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여 써 둔다. 산은 발로만 오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얼마든지 오를 수 있다고. 그것도 더 높이 오를 수 있다고. 낯선 마을을 지나며 생각의 찌를 드리우고 풍경을 낚시하는 즐거움. 이 모두가 기차출근이 주는 기쁨이다.  
     버뱅크를 지나 글렌데일로 기차가 들어서자 바깥 풍경은 도시의 모습으로 바뀐다. 여기저기 큰 건물들이 드러나고 높은 굴뚝이 보이기 시작한다. 흰 연기가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다 슬 옆으로 눕는다. 바람에 거역하지 않는 자세가 보기 좋다. 그러다가 자취도 없이 허공중에 섞여버리는 모습이 마치 황동규 시인의 '풍장'을 연상시킨다.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은 서두르지 않건만,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종종걸음이다. 땅을 밟고 하는 사랑은 늘 흙이 묻는다던가. 그래서 사람들은 진작에 아스팔트길로 흙을 덮어버렸는지도 모른다. 나도 오늘 또 하루 땅을 힘차게 밟아 봐야겠다. 흙이야 털면 되는 거라고, 호기롭게 다짐해 본다.      
   땡, 땡, 땡, 기차가 종소리를 울리며 서행한다. 어느 새 유니온 스테이션, 종점역이다. 줄 그어가며 읽고 있는 알랭 드 보통의 <행복의 건축>은 열어보지도 못하고 일어나야겠다. 가방을 챙기며 슬슬 내릴 준비를 한다. 한 시간 반의 사색은 너무 짧다. 언제나 입맛을 다시게 한다. 못 다한 사색은 퇴근 시간으로 미루어야겠다. 어둠 속에 지워진 산 대신, 그 때는 산 속에 반딧불 켜고 사는 사람들의 ‘불 켜진 창’으로 들어가 봐야지. 아니면, 달빛 사랑에 한번 젖어보는 것도 좋으리라. 즐거운 상상을 하며 군중 속에 나를 묻는다. “자, 희선이! 또 하루 열심히 사는 거야!" 내가 나를 격려하며 다시 생활 속으로 빨려든다. 노동이 아니라 여행을 가는 가벼운 마음으로. (10-2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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