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를 만드는 여인

2010.10.04 00:33

지희선 조회 수:918 추천:135

                    무지개를 만드는 여인

                                                                          

   유난히 맑고 바람이 단 아침이었다. 새벽부터 주인장 잠들을 쫓은 닭들은 아침밥을 달라고 날개를 퍼덕이고 염소도 덩달아 부산스럽다. 발목을 적시는 잔디는 무지개 이슬방울을 반짝이며 온천지에 색채의 아름다움을 뿌리고 있었다. 남편은 닭장으로 가고 나는 스프링클러가 닿지 않는 귀퉁이 꽃밭에 물을 주러 발걸음을 옮겼다.
  그늘에 가려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으면서도 늘 칙칙하게만 보였던 극락조부터 물을 주기 시작했다. 마치 새 이름을 닮은 극락조. 보통 때는 잊혀져있다가도 황금색 꽃을 피울 때면 장미보다 더 환영을 받는 꽃이다. 뜰에 있는 꽃으로 꽃꽂이를 할 때면 제일 먼저 꺾이는 꽃도 바로 이 극락조다. 마치 등불을 들듯 높이 솟은 꽃대궁 위에 피어있는 황금색 꽃은 두 송이만 브이자로 꽂아 놓아도 확실히 중심을 잡아준다.
  사시장철 누렇고 칙칙한 잎만 드리우고 있는 극락조가 미운 오리새끼라면 꽃 핀 극락조는 놀라운 변신을 한 백조다. 한 순간의 아름다움, 그 황홀한 꽃의 색채로 긴 시간을 기다려준 주인에게 기꺼이 보답한다. 극락조야, 빨리 빨리 더 많이 피거라 하고 속삭이며 물을 뿌려준다. 사실 그 이름값에 맞게 나는 극락조야 빨리 날아라, 훨훨 날아라, 하고 말해주고 싶다. 하지만 어쩌랴. 날지 못하는 새인 것을. 길을 가다가도 꽃 핀 극락조를 보면 나도 몰래 극락조, 하고 이름을 되뇌게 된다. 마치 나를 극락으로 데려가줄 수호천사인 양 이름이 주는 어감이 정겹다. 다음은 옆에 있는 장미다.
   장미꽃은 빨강, 분홍, 진노랑, 연미색 네 종류로 뒤섞여 있다. 단색의 지루함을 피하기 위해 종류별로 심었었다. 이 중에서 나는 연미색 장미를 제일 좋아한다. 있는 듯 없는 듯하면서도 다른 꽃들을 더 돋보이게 하는 부드러움이 나는 좋다. 그러나 조심해야 한다. 부드러운 연미색에 홀려 잠시 방심하면 가시에 찔리고 만다. 겉으로는 있는 듯 없는 듯 ‘유야무야’로 있지만, 오히려 가시는 튼실히 키워 한번 찔리면 그 상처는 깊고 오래간다.
   나도 최근에 연미색 장미 같은 친구한테 찔려 깊은 상처를 입었다. 본인은 정작 얼마나 깊은 상처를 주었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을 터이다. 몇몇 사람들은 내가 이전에 했던 것처럼, 오늘도 연미색 친구 주변을 맴돌고 있겠지. 정이 그리워서, 그리고 그 부드러움이 좋아서. 빨간 장미의 강함 속에 오히려 진실이 숨어 있더라는 말은 입 안에 담아두자. 정열적이라 좋다던 것도 잠시, 너무 강해서 싫다며 떠나버린 빨간 장미의 연인들. 오래 기다려줄 수 없는 장미는 그래서 더욱 서럽다. 오늘 따라 빨간 장미의 외로움을 읽었음인가.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빨간 장미에게 한줄기 물을 더 뿌려주고 싶었다.
   호스를 높이 들었다. 물줄기는 반원을 그리며 기분 좋게 뻗어나갔다. 그 순간이다. 높은 물줄기 위에 아침 햇살이 얹히자 아름다운 무지개가 피어올랐다. 와우. 너무나 아름다웠다. 이토록 가까이에서 무지개를 보다니. 나는 호스를 높이 들어 무지개를 그리고 또 그렸다. 어느 새 나는 무지개를 만드는 여인이 되어 있었다.
   무지개를 만드는 여인이라. 정말 멋지다. 무지개를 꿈꾸는 여인이 아니라, ‘만드는’ 여인이라니. 무지개 하나에 행복, 무지개 둘에 기쁨, 무지개 셋에 희망, 무지개 넷에 사랑. 그리고 또 뭐가 있나. 무지개를 나누어 주는 행복한 요정이 엉뚱하게도 별을 헤는 윤동주 흉내를 내고 있었다. 꽃들도 화답하듯 방글거렸다. 이 꽃 저 꽃 옮겨가며 무지개를 만들어 주다보니, 아예 창조주라도 된 기분이다. 무지개는 하느님만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네 뭐. 그리고 하늘에만 있는 것도 아니네 뭐. 한 마디 할 때마다 무지개는 더 높이 피어올랐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아침 내내 물장난 하는 어린 아이처럼 크고 작은 무지개를 그려댔다. 정말 기분 좋은 아침이었다.
   그래, 사람 사는 거 별 거냐. 이렇게 무지개 만들면서 하루하루 기쁘게 사는 거지. 어떤 시골아이는 웅덩이에 괸 물에서도 무지개를 보고 휘저어 막대기 끝에 무지개를 걸고 갔다지. 어찌 보면 이 지상 처처에 무지개는 있고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무지개를 만들며 살 수 있는 것을. 꽃들에게 나누어 준 아름다운 말들이 어느 새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고 있었다. 어쩌면 연두색 장미에게도 미풍처럼 다가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은 천지가 무지개 색채다. 잔디에도, 꽃밭에도. 그리고 내 마음에도. (09-2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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