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산책

2016.05.31 15:36

서경 조회 수:54

    새벽 여섯 시 조금 넘어 눈을 떴다. 주중 마라톤 연습은 틀렸다 싶어 아침 산책길에 나섰다. 모처럼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걷고 싶었다. 그렌샤 길에서 8가를 돌아 윈저 길로 들어섰다. 거기 작은 공원 하나가 있는 걸 보아두었기 때문이다.
   비도 그치고 바람도 잠잠한 거리는 물로 씻은 듯 깨끗하고 고요하다. 팜트리 그늘 밑으로 곧게 뻗은 길을 걷고 있노라니, 마치 수도원 어느 산책로를 걷는 느낌이 든다. 근심 걱정 다 어디로 출장을 갔는지 마음이 한없이 평화롭다.
   언젠가 피정을 갔을 때 '사막 여행'이라 하여, 일체의 말을 삼가하고 한 시간 동안 혼자 묵상에 잠겨 걷던 게 생각난다. 잘 가꾸어진 정원엔 각양 각색의 꽃이 피어있고, 먼 발 아래론 태평양의 푸른 파도가 넘실대는 산정 수도원이라 처음엔 '사막 여행'이란 말이 좀 낯설었다. 그런 피정이라면, 바람이 거대한 모래산을 갖고 노는 데스 밸리로 가는 게 차라리 낫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홀로 걸으며 묵상을 하다보니 '사막'이란 바람이 모래성을 쌓았다 허물며 노는 그런 삭막한 공간만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사람이 사람과 더불어 있지 않고 홀로 있는 곳이 바로 사막이 아닌가. 그리고 그런 사막 속에 홀로 내동댕이쳐 졌을 때, 비로소 온전히 절대자를 만날 수 있음도 알게 되었다. 절대 고독 속에서 만나는 절대자. 그때 드리는 기도는 얼마나 절실하고 정결할까 싶었다.
   잠시나마, 도시의 번잡함을 떠나 자기 내면의 정화를 위해 한적한 시간을 가져보는 것. 그리고 그런 정제된 마음으로 신과 독대하는 것. 그 순간을 체험해 보라는 의도였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이후로는 유명 강사의 구태의연한 강론을 듣기보다 때로는 '사막 여행'이 더 유익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막이란 단어가 나오면 빠질 수 없는 사람이 생떽쥐베리다. 그가 사막에 불시착 했을 때 제일 먼저 했던 일은 상상 밖이요 뜻밖의 행동이다. 그는 인간의 냄새가 너무도 그리워 자기 옷을 태워 체취를 맡는다. 그토록 그는 사막 한 가운데서 절대 고독에 빠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태울 옷마저 없어졌을 때 그가 만난 건 과연 누구였을까. 그 누구를  의지하고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 했을까.
   나도 홀로 사막에 선 듯한 때가 있었다. 그때 나에게 힘을 준 책이 바로 생떽쥐베리의 <고독하기 때문에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란 산문집이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하얗게 정제된 염전의 소금이요 별빛이었다. 아니, 그의 단어를 빌리면 사막 속의 '샘'이었다. '사막도 샘을 가진다'는 말이 퍽 인상적이었다. 오아시스처럼 거창한 것도 아니고 자연스레 생긴 것도 아니었다. 샘은 자신이 발견하고, 가꾸어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아무리 마른 사막 같은 세상도 자기 가슴에 샘 하나 지니고  있으면 거기가 바로 오아시스요 에덴동산이라는 거. 아직도 내가 귀히 여기는 그의 책이다.
   생각에 잠겨 걷는 길 옆에 자목련이 홀로 피었다 홀로 지고 있었다. 목련의 애련한 모습에 오래 전에 지어 두었던 졸시 한 수를 읊조려 주었다. 
 
<꽃 그늘 아래서> 
 
바람 쓸고 간 하늘 아래
꽃이 핀다 꽃이 진다 
 
서럽게 지는 목숨
어디 너 뿐이랴 
 
이 밤도
홀로 듣는 묵시록
꽃이 피고 꽃이 지고 
 
   봄날의 따스한 햇살이 수고했다는 듯, 목련의 정수리를 어루만져 준다. 순한 봄바람도 슬쩍 와 손 한 번 잡아주고 가지를 빠져 나간다. 천사의 도시 Los  Angeles라서 그런가. 연초록 봄은 햇빛도 바람도 다 순하다.
   따스한 눈길로 주변을 보며 걷다 보니 어느 새 공원에 도착했다.  Harold A. Henry Park이다. 자그마하고 아늑한 동네 공원인데, 한 쪽에서는 리모델링 공사가 진행 중이다. 팜트리와 키재기를 하는 소나무와 내 좋아하는 자카란타 나무가 하늘을 가리고 서 있다. 그 아래 몇 몇 사람들이 둥그렇게 원을 그린 채 음악을 틀어놓고 기체조를 한다.  일전에 친구가 말해 주던 그 모임인가 보다 하고 눈 여겨 보았다. 일체의 말이 없이 느릿느릿한 동작을 녹음 방송 지시에 맞추어 연결해 간다. 열 명 남짓한 가운데 한 두어 명의 외국 사람도 섞여 있다. 연결 동작이 부드러운 걸로 봐서 제법 연륜이 쌓인 듯하다. 대부분 나이 드신 분들이다.
   운동이 끝나자 내 관심을 눈치 챈 듯, 표정도 밝고 말씀도 나긋나긋한 분이 와서 설명을 해 주신다. 김춘이란 분으로 연세가 일흔 일곱이라는데 아주 다정다감하시다. 한 십 년은 젊어 보인다. 8년 째 운동을 하고 있으며 잔병치레가 전혀 없다며 좋은 운동이니 시간 있을 때마다 나와서 같이 하자신다. 기체조 이름은 '파룬궁'으로 일체 돈 받는 것도 없고, 시간 맞는 사람들이 나와서 운동하고 각자 헤어진다고. 그리고 시간이 더 있는 사람은 한 시간 정도 명상을 하고 가지만, 특별히 종교하고는 관계가 없다고 한다.
   아침형 사람들이 모여 운동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 원래 저녁형으로 굳어진 몸이라, 일주일에 주말만 하는 마라톤 연습도 쉽지 않은 실정이다. 그런데 이 공원은 집 가까이 있고, 시간도 아침 일곱 시라 하니 그렇게 부담스러운 건 아니다. 마침, 같이 사는 친구도 운동이 필요하다고 하니 의논해 보고 시간이 되면 참석하겠노라고 했다. 또, 주말은 다들 바빠서 운동을 하지 않는다고 하니 그것도 솔깃했다.
   맑은 공기도 마시고, 소요학파처럼 한 바퀴 돌고 오니 키 작은 장미가 날 반겨준다. 바람 탓인가, 계절 탓인가. 녀석도 목련처럼 한 잎 두 잎 꽃잎을 떨구고 있다. 허전한 자리를 허드러지게 핀 연분홍 복숭아꽃이 봄날의 향연으로 채워준다. 봄은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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