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6일 목요일 저녁.  딸과 단 둘만의 외출로 '피가로의 결혼' 오페라 감상을 하고 왔다. 작년 크리스마스 때, 딸이 선물로 사 준 티켓인데 공연은 해를 지나 오늘이란다. 
    장소는 다운타운에 있는 도로시 챈들러. 디즈니 콘서트홀이 생긴 이후로 도로시 챈들러엔 올 일이 거의 없었는데 오래간만에 오니 감회가 깊었다. '보헤미안 클럽' 멤버들과 수도 없이 드나들었던 곳이다. 
     30 여년 전, 친구 몇 명과 함께 클래식 음악 감상 클럽인 '보헤미안 클럽'을 만들었다. 초대 뮤직 해설가로 서울음대 출신인 이재우씨를 모셨다. 브로드웨이에서 율 부린너와  '왕과 나' 공연을 성공리에 마치고 막 LA에 터전을잡은 분이었다. 음악적인 열정도 열정이지만, 솔직담백하고 소탈하여 오라버니 같은 느낌이 들었다. 초창기 멤버는 서른 한 명으로 성 그레고리 성당과 밸리 성당의 성가대 주전 멤버와 친구들이었다. 
     6년 쯤 지나, 이재우씨가 오페라 공연과 영화 촬영으로 바빠지면서 노형건씨가 뒤를 이어 뮤직 디렉터겸 해설가로 왔다. 그때부터 교회 다니시는 분들도 오고 사랑의 음악회나 기사를 보고 온 일반인들도 멤버로 고루 섞이게 되었다. 
     보헤미안 클럽 뮤직 디렉터가 되면, 다 성공하고 바빠지는지 6년이 지날 즈음 노형건씨 역시 라디오 방송과선교 음악 활동이 바빠지면서 더 이상 보헤미안 클럽을 이끌어줄 수 없게 되었다. 
그동안 사랑의 음악회를 통해 젊은 음악도들을 위한 장학기금 마련과 오페라의 ABC라는 Aida, Butterfly, Carmen등 각종 오페라 공연을 단체관람하며 활발한 활동을 해왔는데 여간 섭섭하지 않았다.  그 이후, 러시아에서 음악공부를 하고온 노태철 지휘자와 필그림 합창단을 이끌던 김철희 지휘자가 음악 해설가로 거쳐가고 종종 진정우박사와 석우장 테너 성악가가 초대되어 해설을 해주시기도 했다.

   음악을 좋아하는 취미내지는 정클럽 수준에서 명실공히 오페라 감상 클럽으로서의 보헤미안 클럽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은 LA 오페라 보드 멤버인 이주헌씨가 회장이 되고부터였다. 이주헌 회장은 USC 출신인 김양희 박사를 초빙, 수준 높은 음악적 해설과 감상을 시켜주었다. 뿐만 아니라, 롱비치와 오하이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등타도시에서 공연하는 유명 오페라도 버스로 단체 관람 여행을 주선하여 10년이란 긴 세월 동안 크낙한 즐거움을 주었다. 
     내적으로는 회원들의 음악적 소양을 키우고 외적으로는 음악가를 위한 후원회로서 독보적인 모임으로 성장해 온 보헤미안 클럽은 30 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테너 석우장씨 아들인 다니엘 석이 맡아 잘 키워가고 있다. 나와 더불어 보헤미안 발기인이 되어 그 초석을 놓았던 김홍묵 박사는 지금 '금요 인문학' 강좌를 이끌고 있고,임진환 치과 의사는 종신부제로서 그 소임을 다하고 있다. 누구보다 보헤미안 클럽에 애정이 많았던 김낙중 CPA는 불행히도 수년 전에 돌아가셨다.  3,40대의 열정을 가지고, 제대로 된 클래식 음악 감상 클럽 하나 없는 LA의삭막한 문화 풍토를 섭해 하면서 '보헤미안 클럽'을 발족했던 우리 초창기 멤버는 이제 6,70대 초로의 나이에 접어 들었다. 
     이제 다시, 수없이 우리의 발길이 닿았던 도로시 챈들러에 들어서니 지나간 추억이 물밀듯 밀려왔다. 삼십 년세월 동안, 초창기 멤버는 생활의 변화로 많이 떠났지만, 지금도 보헤미안 클럽 올드 멤버들이 만나면 옛이야기를 나누며 향수에 젖곤 한다.  '보헤미안 클럽'이란 이름도 12월에 첫모임을 가진 터라, 겨울 오페라 '라 보엠'을첫 감상곡으로 선택한 것도 있고 '라 보엠' 주인공들처럼 화가, 시인, 음악가, 철학자 대신 신부님까지 다 있으니잘 됐다며 만장일치로 지어진 것이다.
   '보헤미안' 덕분에, '피가로의 결혼'은 본 지 오래건만, 딸의 특별한 크리스마스 선물이니 시간을 함께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꺼이 응했다. '피가로의 결혼'은 누구나 알다시피 모짤트의 코믹 오페라다. 이발사인 피가로가 백작의 시녀 수잔나와 결혼하기 위하여, 흑심을 품고 있는 유부남 알마비바 백작을 조롱하는 책략이 너무익살스러워 배꼽을 쥐게 한다. 
  오늘 저녁 공연은 일곱 시 삼십 분부터 열한 시 삼십 분까지 이어진 롱런이었다. 하루종일 일을 하고 온 터라, 줄창 네 시간을 앉아서 밤 늦도록 오페라를 감상한다는 게 쉽지 않았다. 하지만, 뛰어난 무대 연출과 피가로Roberto Tagliavini와 수잔나역의 Pretty Yende의 연기가 압권이라 지루하지는 않았다. 
  오랫만에 딸과 함께 가진 오붓한 시간, 맛난 저녁을 먹으며 밀렸던 서로의 생활 보고를 하고 오페라 감상을 하고 나니, 체증이 가라앉는 듯 개운했다. 대나무가 매듭을 지으며 한 마디씩 성장해 가듯, 가끔은 이런 호사를 통해 삶의 질을 높이고 활기도 찾아야 할까 보다.